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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한자로 보면 전통문화가 보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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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김병기 전북대 중문학과 명예교수

김병기 전북대 중문학과 명예교수

우리 민요는 참 매력적인 게 많다. 흥이 넘치는 성싶더니 애달픔이 묻어 나오고, 애달픈 것 같더니만 어느새 어깨를 들썩이게 하는 흥을 쏟아내는 것이 우리 민요다. 겉보기에는 그저 맹물에 절임 무나 배추 몇 가닥을 담가 놓은 것 같은데 톡 쏘는 청량감과 형언할 수 없는 감칠맛을 내는 음식이 우리 동치미다. 동치미가 그렇듯이 우리 민요 또한 별 노래 아닌 듯이 쉬우면서도 범상치 않은 오묘한 매력을 간직하고 있다.

애절한 민요로 말하자면 ‘한오백년’만 한 것도 없을 것이다. 높고 강한 음으로 ‘한 많은~’이라고 부르던 노래가 ‘냉정한 님아~’의 ‘아’에 이르러서는 갑자기 툭 떨어지는 저음으로 변하면서 가슴도 철렁 내려앉는다. 절규하듯 부르다가 문득 모든 것을 다 비워버리는 허망함으로 이어지는 성싶더니 그 틈에서 다시 흥 한 자락이 희망으로 피어오른다.

민요 가사도 한자 모르면 뜻 몰라
교육과 생활 속 한자 배제는 잘못
전통문화 연구해야 한류 더 발전

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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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한오백년을 부르다 보면 후렴구가 참 이상하다. “한오백년을 사자는데 웬 성화요”라는 후렴구로 인해 노래 제목도 ‘한오백년’이 됐다는데, 이 ‘한오백년’의 뜻이 아무리 생각해도 애매한 것이다. 도대체 무슨 뜻일까. 대부분 ‘한(대략) 오백년쯤’이라는 뜻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하필 오백년일까. 오래오래 살자는 맹세를 하거나 축원할 때면 으레 “천년만년 살고지고”라고 하거나 “백수를 누리소서. 천수를 누리소서”라고 말하지, “오백년을 살고지고” 한다거나, “오백수를 누리소서”라고 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왜 이 노래는 “한오백년을 사자는데 웬 성화요”라는 후렴구를 반복하며 ‘대략 오백년 정도 살자’는 얘기를 그토록 목메게 하는 것일까. ‘오래’라는 의미를 표현하려고 일부러 오백년이라고 과장했다고 풀이할 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중문학과 한자를 오래 연구해온 필자는 ‘한오백년’이 아니라 ‘한어백년(限於百年)’ 또는 ‘한우백년(限于百年)’이라고 생각한다. 한(限)은 제한하다·한정하다는 뜻이다. 어(於)는 어조사 어라고 훈독하며 처소격 조사로서 ‘…에’라는 뜻이다. 우(于)도 어(於)와 마찬가지로 ‘…에’라는 의미의 처소격 조사다. 따라서 한어백년이나 한우백년은 ‘백 년에 한하여’, ‘백년토록’이라는 뜻이고, ‘한오백년’은 ‘한어백년’으로 풀어야 바르다고 생각한다. “한어백년을 사자는데 웬 성화요”라는 말은 곧 “백년토록 함께 살자는데 웬 불만이며 하소연이란 말이요”라는 의미가 된다.

그런데 한어백년 또는 한우백년이라는 말이 구전 과정에서 음이 와전돼 한오백년이 된 것으로 봐야 한다. 우리나라의 고대 한문뿐 아니라 중국이나 일본의 한문 중에도 한어(限於) 또는 한우(限于)+숫자+수를 세는 단위(年, 畝, 坪, 個 등)의 형식으로 구성된 구절은 일일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우리에게 한자는 이처럼 중요하다. 역사와 문화에 대한 구체적 기록은 물론이고 한자로 기록된 지명과 인명·물명(物名) 등을 꼼꼼히 따져보면 그 안에서 무궁무진한 역사·문화적 의미를 도출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교육과 생활에서 한자를 완전히 배제함으로써 우리의 역사와 문화의 방으로 들어갈 수 있는 열쇠를 사실상 잃어버렸다. 광복 이전 거의 모든 역사와 문화가 한자로 기록돼 있는데 한자를 배제한 채 어떻게 인문학을 연구할 수 있겠는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단어의 70% 이상이 한자어인데 한자를 모르는 채 어떻게 우리 말과 글의 뜻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지금 우리 교육 현장은 어떤가. 한글 교과서는 읽으면서도 그게 무슨 뜻인지를 잘 모르는 학생이 부지기수다. 기본적인 문해력을 갖추지 못한 학생들에게 최고 수준의 교육 과정 편성과 가장 우수한 과학적 교육 방법 적용은 사실상 무용지물이다.

한오백년이 아니라 한어백년 또는 한우백년이라는 필자의 주장을 불원간에 정식 논문으로 제시할 생각이다. 한류가 세계를 휩쓸고 있는 지금 우리 스스로 한자를 중국 문자라는 이유로 배척할 게 아니다. 오히려 과거에 우리가 2000년 이상 사용해온 동아시아의 공유 문자이기도 하다는 주장을 당당하게 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통해 전통문화를 바탕으로 한류의 폭과 깊이를 더해 나가야 할 것이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김병기 전북대 중문학과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