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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미국은 외교, 중국은 군사전략에서 승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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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주재우 경희대 중국어학과 교수

주재우 경희대 중국어학과 교수

낸시 펠로시 미 하원 의장이 지난 2일 대만을 전격 방문했다. 그의 방문을 앞두고 미국과 중국이 격한 설전을 벌이며 ‘치킨 게임’의 양상을 펼쳤다. 시진핑 주석은 7월 28일 바이든 대통령과의 통화에서 작년 11월에 대만 문제에 미국의 관여를 맹렬히 비방한 발언을 재인용했다. 미국의 관여가 ‘불장난’이며, ‘불장난으로 타 죽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펠로시 의장이 대만 방문을 밀어붙이면 후과가 뒤따를 것이라고 그는 강력히 경고했다.

이렇게 미국과 중국이 대만해협 지역에서 신경전을 벌이는 사이 중국의 군사적 공세는 더욱 커져만 갔다. 하루가 멀다며 중국은 대만의 방공식별구역(ADIZ)에 전투기를 띄우는 것은 물론 대만해협을 향한 실탄 발사 군사훈련도 서슴지 않았다. 이런 배경 속에 펠로시 의장은 대만 방어에 대한 미 의회의 확고한 의지를 직접 전달하기 위해 방문을 결정했다. 이런 그의 의지는 방문단 구성원에서도 드러났다. 그레고리 믹스 미국 하원 외무위원장, 마크 타카노 하원 보훈위원장과 안보·경제 위원회 소속의 수잔 델베네, 라자 크리슈나무르티, 앤디 킴 하원의원 등이 동참했다.

펠로시 대만 방문 막지 못한 중국
대만해협 ‘항행 자유’ 무력화 성과
미, 칩4 기반 마련 … 쿼드엔 악수

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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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로시 의장의 방문으로 미국 측은 정치 외교적인 승리를 거뒀다. 대만 방어에 대한 미 의회의 확고한 입장을 직접 전하면서 대만 관계를 더욱 강화할 수 있게 됐다. 바이든 대통령은 올해에만 세 차례에 걸쳐 대만 방어에 대한 의지를 표명했다. 가장 최근에는 지난 5월에 대만이 우크라이나와 같이 침공을 받으면 무력으로 대만을 방어할 것을 다시 한번 밝혔다. 이번에 펠로시 의장은 미 의회 차원에서 이의 지지를 표명한 것이다.

또한 미국의 경제이익과 관련해 괄목할만한 성과도 올렸다. 지난 7월 28일 미 의회에서 미국 내 반도체 산업과 기술 우위 유지를 골자로 한 ‘반도체 칩과 과학 법’이 통과되면서 반도체 4강(‘칩4’)과의 연대를 공고히 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펠로시 의장은 대만의 TSMC 회장과 만나 양측의 협력 강화 방안을 논의했다.

이 밖에 중국의 치밀하지 못한 정치적 공세가 미 측이 정치·외교적으로 승리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했다. 펠로시 의장의 대만 방문 가능성이 전해지자 중국 측은 지난 7월부터 군사적 압박 수위를 높이면서 정치·외교적 공세도 가중했다. 결과적으로 이는 ‘안 한 것만 못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의 방문을 막지도 못했을 뿐 아니라 ‘불에 타 죽는’ 결과도 없었다. 중국이 역으로 오히려 이를 방관하는 자세만 취했어도 중국의 위협 발언이 신뢰를 까먹는 결과는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미 백악관 인사가 중국을 ‘종이호랑이’로 비유한 것이 수긍되는 대목이다.

반면 군사전략적 관점에서는 중국의 승리가 확연하게 드러났다. 펠로시의 독단적인 결정으로 진행된 방문이 오히려 화근이 되었다. 시진핑의 강력한 군사적 대응은 ‘신의 한 수’였다. 중국이 전투기와 전투함을 띄우면서 펠로시가 탑승한 항공기는 말레이시아에서 우회 비행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를 호위하기 위해 파견된 미 항공모함과 전투함대 또한 태평양 지역에서 중국의 최후 방어선이자 미국의 최전선 방어선인 제1도련선을 넘지 못했다. 중국의 반접근·지역거부 전략(A2AD) 전략이 실효를 본 것이다.

유사시의 관점에서 대만해협이 국제수역이 아니라는 점도 증명된 셈이다. 펠로시 의장 출국 전 대만 방문을 공식화하지 못하면서 펠로시와 미 행정부가 ‘항행의 자유’를 부각하지 못하면서 빚어진 결과였다. 전략적 함의의 관점에서 보면 이번 사태로 동중국해와 남중국해, 그리고 대만해협에서 ‘항행의 자유’가 중국에 의해 사실상 거부된 좋지 않은 선례로 남겨진 것이다. 펠로시 의장의 대만 방문이 결국 미국의 전략구상인 ‘인도-태평양 전략’은 물론 ‘쿼드’ 등에 치명적인 오류를 남긴 악수(惡手)가 되었다.

윤석열 대통령은 휴가를 이유로 펠로시 의장을 만나지 않고 전화 통화만 했다. 그의 순방 목적은 우리 국익과 긴밀한 연관성이 있다. ‘급’의 문제가 아니다. 과거 대통령들은 북한 문제로 자주 방북한 미 의원이나 심지어 목사까지도 만났었다. 더욱이 한미동맹과 관련된 중차대한 사안에 대한 입장 정리에 도움이 될 인사와의 만남을 거부한 것은 납득이 안 가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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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재우 경희대 중국어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