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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계급배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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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한영익 기자 중앙일보 기자
한영익 정치에디터

한영익 정치에디터

1970년대 스웨덴의 복지 체계를 완성시킨 올로프 팔메 총리는 상류층 출신이다. 그가 속한 팔메 가문은 스웨덴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의 재력을 자랑했지만, 올로프 팔메는 좌파 정당(사회민주노동당)에서 평생 정치를 했다. 총리 재직 시절 그는 대학등록금 전면 무료화, 연금법 개정 등을 이끌었다. 역대 스웨덴 총리 가운데 가장 급진적이란 평가를 받는다.

경제·사회적 계급과 정치사상이 일치하지 않는 사례는 생각보다 흔하다. 주요 좌파 사상가 및 활동가들의 상당수가 중산층 이상의 지식인 출신이었다. 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로자 룩셈부르크, 블라디미르 레닌 등이 모두 중상류층 출신이다.

투표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난다. 2016년 미국 대선에서는 몰락한 백인 계층 노동자들이 보수정당의 재벌 출신 후보 도널드 트럼프를 지지하며 이변을 일으켰다. 반면 버니 샌더스 같은 미국의 급진 진보는 고소득·고학력자가 주된 지지층이다. 고소득자의 진보 정당 지지를 두고는 ‘살롱 좌파’ ‘캐비어 좌파’ ‘강남 좌파’처럼 유명한 신조어가 생겨난 지도 오래됐다.

계층·투표의 불일치 때문에 정치인이 답답함을 토로하는 경우도 있었다. 1992년 12월 민주당 대선 후보였던 김대중 전 대통령은 충남 유세에서 “30년 군정(軍政) 기간 중 가장 많은 차별과 천대를 받은 계층이 농민들이다. 뭐가 좋다고 선거 때만 되면 여당(민자당)을 찍고 선거가 끝나면 후회를 하는가”라고 했다.

불일치의 원인은 뭘까. ‘프레임 이론’으로 유명한 조지 레이코프는 베스트셀러 『코끼리는 생각하지마』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사람들이 언제나 자기 이익에 따라 투표한다는 가정은 심각한 오해다. 그들은 자신의 정체성·가치관에, 자기가 동일시하고픈 대상에게 투표한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최근 “고학력·고소득자는 우리(민주당) 지지자가 더 많고, 저학력·저소득층에 국민의힘 지지자가 많다. 안타까운 현실인데, 언론 환경 때문에 그렇다”고 말해 논란이 일었다. 저학력·저소득층 상당수가 언론에 포획됐다는 의미로, 그들의 정체성·가치관을 존중하는 마음이 있다면 하기 어려운 발언이다. “대선 패배의 책임은 제게 있다. 낮은 자세로 경청하겠다”는 그의 말도 빈말이었던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