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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도 못 뗐는데 학교라니"…'만 5세 입학' 개편에 학부모가 뿔났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만 5세 초등취학 저지를 위한 범국민연대 관계자들이 1일 오후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 앞에서 정부의 '만 5세 초등학교 취학 학제 개편안' 철회를 요구하며 손팻말을 들고 있다. 연합뉴스

만 5세 초등취학 저지를 위한 범국민연대 관계자들이 1일 오후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 앞에서 정부의 '만 5세 초등학교 취학 학제 개편안' 철회를 요구하며 손팻말을 들고 있다. 연합뉴스

1일 오후 2시쯤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 앞 인도. 학부모·교사 등 500여명(경찰 추산)의 시민이 무더위 속에서 "만 5세 초등 취학 학제개편 즉각 철회하라"를 외쳤다. 시위 장소는 인파로 붐볐다. 늦게 도착한 참여자들이 주변 공원에 서서 집회에 함께했을 정도였다.

사교육걱정없는세상, 교사노동조합연맹 등 43개 단체는 교육부가 추진 중인 '초등학교 조기 입학' 학제 개편에 맞서 '만 5세 초등취학 저지를 위한 범국민연대'를 구성하고, 이날 첫 기자회견을 열었다. 집회에선 초등학교 조기 취학은 인지·정서발달 특성상 부적절하고, 입시 경쟁과 사교육 시기 앞당길 가능성이 높다는 지적이 이어졌다.

이경미 한국국공립유치원교원연합회 회장은 "놀이중심 활동을 해야 하는 유아들을 교실이라는 네모난 공간의 책상 앞에 앉히는 것은 유아기 특성에 맞지 않다"며 "우리 아이들의 삶과 성장을 희생시키는 것"이라고 했다. 정지현 사교육걱정없는세상 공동대표 역시 "근본 대책 없이 연령만 낮추는 것은 더 어린아이들에게 학교 갈 준비를 시키라는 신호"라며 가세했다.

한국전문대 유아교육과 교수협의회 회장인 손혜숙 경인여자대학교 유아교육과 교수는 기자와 만나 “만 5세에게 필요한 것은 교육보다 놀이다. 창의성과 인성, 문제해결력을 키우려면 전두엽이 발달해야 하는데 놀이를 하면서 전두엽이 발달한다”며 “학습을 하면 측두엽을 쓰게 되는데, 해당 연령에 필요한 발달이 둔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정책 추진 과정에서 적절한 논의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지적도 나왔다. 김용서 교사노동조합연맹 위원장은 “(정부가) 엄청난 파장을 불러오는 학제 개편을 교원단체나 시도교육감협의회와 한 마디 상의 없이 일방적으로 발표했다”며 “어떤 공론화 과정도 없이 밀실에서 논의해 일방적으로 밀어붙인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7세는 배고프면 칭얼거리는 나이”…교실 교육 가능할까

만 5세 초등취학 저지를 위한 범국민연대 관계자들이 1일 오후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 앞에서 정부에 전달할 '만 5세 초등학교 취학 학제 개편안' 철회 요구 서한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연합뉴스

만 5세 초등취학 저지를 위한 범국민연대 관계자들이 1일 오후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 앞에서 정부에 전달할 '만 5세 초등학교 취학 학제 개편안' 철회 요구 서한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연합뉴스

앞서 지난달 29일 교육부는 초등학교 취학 나이를 만 5세(한국 나이로 7살)로 낮추는 내용의 학제개편안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교육 효과를 높이고, 공교육이 담당하는 영역을 확대한다는 취지였다.

초등학교 진학 예정 자녀를 둔 학부모들은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며 반발하고 있다. 현 학제개편안에 따르면 2025년엔 본래 입학이 예정된 2018년생과 함께 2019년 1~3월생이 추가로 입학한다. 이후 2028년까지 4년간 15개월씩 입학 시기를 끊는 방식으로 순차적으로 만 5세로 입학 나이를 당긴다. 2026년 3월에는 2019년 4월~2020년 6월생이, 2027년에는 2020년 7월~2021년 9월생이 입학하는 식이다. 이 계획대로라면 2029년 3월에는 2023년생(만 5세)만 입학하게 된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2019년 3월생 딸을 둔 이유정(42)씨는 “만 5세 아이들은 배고프면 배고프다고 칭얼거리고 대소변도 제대로 못 가리는 나이”라며 “지금 1학년도 자리를 제대로 지키는 아이들이 많지 않은 실정인데 ‘공부하는 시간이니 가만히 앉아있어야 한다’는 말을 이해하는 7세가 얼마나 있겠냐”고 분통을 터뜨렸다. 서모(39)씨도 “어느 정도 한글을 익히고 ‘10 가르기 모으기(덧셈 뺄셈 전 익히는 과정)’는 되는 상태에서 입학해야 수업을 따라갈 수 있다”며 “한글도 모르는 6세 아이를 붙잡고 미주알고주알 한다고 아이들이 받아들이겠냐”고 했다.

최대 15개월이나 생일이 차이 나는 아이들이 한 학년으로 묶이면서 생길 문제에 대한 우려도 크다. 3살배기 아들을 둔 김모(34)씨는 “15개월 차이는 너무 크다. 혹시 뒤처진 아이들이 또래 무리에서 떨어져 왕따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아 걱정”이라고 말했다.

“초등 1학년에 워킹맘 휴직 많아…경력단절 부추기냐”

일선 초등학교들이 여름 방학을 맞은 15일 서울 중구 청구초등학교에서 방학식을 마친 학생들이 하교하고 있다. 뉴스1

일선 초등학교들이 여름 방학을 맞은 15일 서울 중구 청구초등학교에서 방학식을 마친 학생들이 하교하고 있다. 뉴스1

취학연령 하향이 오히려 ‘경력단절’을 1년 앞당긴다는 지적도 나왔다. 2019년 2월생 딸아이를 둔 아버지인 최모(40)씨는 “워킹맘들이 출산 직후 다음으로 가장 많이 휴직하는 때가 초등학교 1학년이다. 아이가 오전 수업 마치고 나오면 돌볼 곳이 없어서 태권도, 미술학원 돌리다 돌리다 결국 일을 그만두는 것”이라며 “거기다 한 살 어릴 때 입학을 한다니, 돌봄 걱정이 커져 학부모들의 경력 단절만 더 부추기는 정책”이라고 비판했다.

학부모들은 급작스러운 발표에 당황스럽다는 반응이다. 최씨는 “이렇게 중요한 일을 시행 2년여 앞두고 선(先) 발표, 후(後) 여론 수렴하는 게 어디 있냐”며 “아이 초등학교 1학년 입학 시기에 맞춰 취학 전 교육과 이사·돌봄 등 계획을 짜고 있었는데 1년씩 당겨지면서 계획이 다 헝클어지게 생겼다”고 말했다.

이씨는 “하반기보다 상반기에 아이를 낳을 걸 계획해서 둘째를 가졌었다. 밥이라도 더 먹이고 생활 습관이라도 더 가르쳐서 학교에 보내고 싶은 마음이었는데 언니들과 같이 입학하라니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며 “보조 교사가 필요할 경우의 대책 등도 내놓지 않으니까 너무 당황스럽다”고 말했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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