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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선2035

이순신과 대우조선해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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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여성국 기자 중앙일보 기자
여성국 팩플팀 기자

여성국 팩플팀 기자

영화 ‘한산’을 본 뒤 기억에 남은 건 묵직한 이순신도 위엄있는 적장도 아니었다. 긴박한 전투 장면마다 짧게 등장하는 노 젓는 격군(노꾼)들의 모습이었다. 작가 김훈은 이순신에 관한 글에서 “노 젓는 격군들의 노동과 훈련은 가혹했다”고 썼다. 조선 판옥선의 노꾼은 전투원의 두 배가 넘었고, 거북선 노꾼은 90명이었다는 분석도 있다. 영화 속 노꾼들이 신음하는 장면에서 최근 파업한 하청노동자들이 겹쳤다. 일터에서 말단이자 최대 다수로 꼭 필요한 이들이란 점에서 노꾼과 닮았다.

2년 전 거제 출장을 다녀왔다. 조선소 하청 산재가 연이어 발생한 때다. 숙소 앞 옥포항 둘레길 입구에는 ‘충무공 이순신 만나러 가는 길’이라 적힌 팻말이 있었다. 임진왜란 때 조선 수군이 처음 승리한 옥포대첩 이야기가 둘레길을 따라 이어졌다. 이순신이 승리한 해안은 현재 건조 중인 대형 선박, 크레인이 있다. 절로 조선업을 응원하는 마음이 드는 그곳은 노꾼과 하청노동자가 고군분투한 현장이다.

이순신 장군이 승전을 이끈 옥포 바다에서 건조 중인 선박과 크레인. 여성국 기자

이순신 장군이 승전을 이끈 옥포 바다에서 건조 중인 선박과 크레인. 여성국 기자

노동부 등에 따르면 2020년 대우조선 하청노동자 수는 원청의 1.8배인데 사고 재해는 원청이 하청보다 20% 많았다. 하지만 은폐가 힘든 산재 사망은 최근 7년간 11건 중 원청 1건을 제외하고 모두 하청에서 발생했다. 하청 산재 은폐 의혹이 나오는 이유다.

위험요소를 미리 분석해 부정적 영향과 비용 소요를 사전에 제거하는 활동을 경영학에선 ‘위험관리(Risk Management)’라 한다. 수년간 하청노조는 일터의 안전과 차별, 저임금 문제를 호소했다.  원청·노동청 앞에서 기자회견도 했다. 당시 사측과 산업은행, 정부가 나섰다면 어땠을까. 사전에 위험신호를 포착할 기회는 분명 있었다.

임금인상 4.5% 조건에 하청노조는 파업을 그만뒀다. 인건비 조금 아끼려고 수천억원 손실을 본 건 위험관리 실패라는 지적이 나왔다.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았다는 것. 보수 중 보수인 이언주 국민의힘 전 의원마저 “현장의 구체적 내용을 살펴보지 않고 노동을 절대악으로 모는 경솔함도 경계해야 한다”며 “조선업이 어려울 때 임금을 대폭 삭감했으니 수주물량, 노동량이 늘어난 지금은 임금을 정상화하자는 주장은 일리가 있어 보인다”고 말했다. “일이 이렇게 되기까지 대우조선은, 산업은행은 무얼 했는지 묻고 싶다”라고도 했다.

파업 이후 회사 피해, 조선업 하도급, 산은 경영방식, 임금체계, 노노갈등 등 풀 과제가 많다. 법과 원칙이 통했다고 자찬하기 전에 회사와 정부는 위험관리 실패를 반성해야 한다. ‘떼법’ 낙인부터 찍는 건 실패의 반복처럼 보인다. 이순신 장군은 전투 후 임금에게 보고하는 장계에서 모든 노꾼의 이름을 적어 공로를 챙겼다고 한다. 가장 말단에 있는 이들도 세심하게 챙겨 나라를 지킨 그가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