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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전투기들이 도열한 도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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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서현 건축가·서울대 건축학과 교수

서현 건축가·서울대 건축학과 교수

영화 ‘탑건:매버릭’의 주인공이 누구냐. 잘생긴 톰 크루즈에 반해서 30여 년 전의 영화를 뒤져봤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그런데 이 영화의 실제 주인공은 따로 있다. 톰 크루즈보다 더 화끈하고 성깔있게 생긴 그 기계의 이름은 F/A-18. 영화에는 조연도 필요하니 그건 이전 기종 F-14이다. 이 조연에 대한 영화 속 평가는 ‘박물관 전시품’이다. 백 년 남짓의 전투기 계보를 육군에 비교하면 과연 F-14는 2차 대전의 전차 정도에 해당할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은 레이더에 잡히지도 않고 작전 반경이 한반도 전역을 간단히 뛰어넘는 전투기 시대라고 한다. 파일럿조차 없는 시대도 올 것이고.

우리에게 익숙한 건 더 구기종인 F-4다. 전 국민이 방위성금 모아 5대 구입했던 눈물의 주인공이고, 국군의 날의 주연배우였다. 이 왕년의 스타가 영화에 등장하면 나폴레옹 전쟁기의 대포 대접을 받을 듯하다. 그런데 F-4와 등장 시기는 비슷한데 여전히 활주로를 압도하며 질주하는 현역 스타가 있다. 당연히 그간 적지 않은 발전과 개량을 거쳤지만 기본적인 모델명은 보잉747이다.

크기가 규정하는 진화의 속도
도시 경쟁력은 기업 유치로 계측
너무 큰 단위로 진행돼온 재개발
큰 사업은 갈등 커지고 진화 지체

목숨을 건 진화가 전투기의 생존조건이다. 이전 기종을 압도하고 무용지물로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전투기는 테스트 파일럿의 목숨이 걸려있어도 극한실험을 하게 된다. 그러나 여객기의 최우선 원칙은 안전성이다. 수백 명의 목숨이 걸린 여객기로 선회기동 실험을 하면 곤란하다. 덩치가 커지면 상황 변화에 대처가 어렵고 진화가 늦어진다. 제작 실패로 제작사의 운명도 오가니 보수적이 된다.

도시를 보자. 도시라는 공항에는 건물들이 빽빽이 도열해 있다. 도시도 진화해야 한다. 세워지는 모든 건물들이 문화재 보존가치를 얻는 도시는 지구 위에 없다. 건물의 내구성도 필요하나 복엽기로 무장하고 새로운 시대를 맞을 수는 없다. 쟁기가 트랙터로 대체되었을 때 농지 형상도 사각형으로 바꿔야 했다. 필지 변화가 없이 새 건물을 지으면 재건축, 필지를 조정해서 새로운 도시기반시설을 추가해 넣으면 재개발이라 부른다. 문제는 도심 재개발의 규모다. 우리는 재개발 규모가 너무 커서 유연한 진화가 어려운 도시조직을 만들어왔다.

자본주의 개발시장에서 건물은 필지가 허용하는 법적 최대기준으로 짓고자 한다. 건물 덩치 규정의 직결 요소는 필지 크기다. 그러나 필지가 커지면 거기 들어서는 건물에 투입되는 소요 자원의 단위가 커진다. 그래서 개입할 수 있는 소규모 자본이 사라지고 결국 초대형 자본의 투자은행, 건설사들만 살아남는다. 전 세계에서 엔진 네 개를 달고 날아다니는 코끼리 같은 대형 상용여객기를 만드는 회사는 보잉과 에어버스라는 두 고래밖에 없다. 등 터질 새우들이 사라진 고래들만의 생태계, 그건 위험하다.

단군 이래 최대의 아파트단지 건설 ‘둔촌주공아파트 재건축 사업’이 표류하고 있다. 1만2000여 세대 탑승의 덩치면 국내 최대 규모 건설사들이 사업단을 꾸려 참여하게 된다. 조합 입장에서는 대안도 없으므로 시공사업단의 입김이 그만큼 커진다. 조합은 구성원들이 워낙 많으므로 사안마다 의견 수렴이 어렵고 타협은 힘들어 갈등은 커지고 반발이 빈발하고 분쟁은 상존하여 진행은 더디고 피해가 이어진다. 결국 다수결로 사안을 결정하나 소수의 크기도 워낙 커서 많은 이들이 피해의 눈물 흘려야 한다. 덩치가 커지면 맞게 되는 위협과 위험도 당연히 커진다.

최소가 최적은 아니다. 제트엔진 장착을 위해 필요한 비행기의 적정 최소 크기가 있다. 도시에서 건물이 경쟁력을 갖기 위한 최소 규모도 있다. 지금 도시를 결정하는 엔진은 자동차고 건축설계의 최대 변수는 주차장이다. 자율주행 자동차의 시대가 되어도 주차장은 필요할 것이다. 설계를 해보면 지하주차장이 원만하게 작동하는 최소 규모의 필지는 대략 2000㎡ 정도로 수렴한다. 나는 자동차라는 엔진의 전제하에서는 이 경험치 인근이 도심재개발 필지 규모의 적정 상한치라고 짐작한다.

19세기 이후 지구는 모든 국가들의 무력 경쟁터에 돌입했다. 20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전쟁 방법과 단위가 바뀌었다. 전투기를 앞세운 방위력은 국가별 지표지만 다른 경쟁력은 거의 도시별로 매겨진다. 도시 간 경제 경쟁터가 된 것이다. 그 경쟁력의 직접 지표는 새롭고 영향력 있는 기업의 존재다. 그래서 기업의 변화에 맞게 도시도 적절하게 변화할 수 있어야 한다. 도시의 민첩성 계측단위는 마하가 아니라 수십 년이다. 활주로에 늘어선 비행기의 규모에 따라 도시의 미래가 달라진다. 참고로 엔진 네 개의 코끼리 여객기들도 결국 단종에 들어섰다.

각설하고, F/A-18보다 더 멋진 한국산 전투기 KF-21이 시험비행에 성공했다. 드디어 우리도 초음속 전투기를 만드는 나라에 한발 다가섰다. F-35 팔면서 거들먹거리던 나라가 거꾸로 제발 자기들에게도 팔아달라고 애걸하는 비행기로 진화하기 바란다. 다음 세대의 톰 크루즈가 영화 찍자고 제안해오는 그런 비행기, 생각만 해도 속이 시원해진다. 아예 우리가 그런 영화를 만들면 더 시원하겠다.

서현 건축가·서울대 건축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