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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성탁의 시선

보수의 품격은 어디 갔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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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김성탁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김성탁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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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가 취임 3년 만에 최근 물러나기로 했다. 명문 이튼 스쿨을 거쳐 옥스퍼드대 토론클럽 회장을 지낸 그는 런던시장 시절 공공주택 보급 등 성과를 내고 특유의 캐릭터로 인기를 끌었다. 유럽연합(EU)에서 탈퇴하는 브렉시트를 주도하며 외무장관을 거쳐 당 대표와 총리까지 됐다. 그의 불명예 퇴진은 코로나 방역 규정을 어기고 관저 등에서 파티한 게 발단이었다. 이어 측근의 과거 성 비위 전력을 알면서도 원내부총무로 임명하고 언론에 이를 몰랐다고 거짓말한 게 드러났다.

 국내에선 '버티고 보자'가 일상이라 저 정도로 물러나느냐 싶겠지만, 소속 보수당 내에서 반발이 일었다. 이틀 만에 핵심 장관들과 참모진 40명 이상이 총리에 대한 신뢰를 잃었다며 사퇴했다. 결별을 통해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려는 보수 정당의 자정 움직임에 존슨은 백기를 들었다.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가 의회에서 발언하고 있는 모습 [로이터=연합뉴스]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가 의회에서 발언하고 있는 모습 [로이터=연합뉴스]

 당 대표인 총리를 다시 뽑을 수 있는 영국의 의원내각제와 임기제 대통령제인 한국을 단순 비교하긴 어렵다. 하지만 정권 교체에 성공한 현 보수 집권세력이 보이고 있는 자중지란은 영국과 달리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다. 여권의 혼란상은 탄핵의 늪을 간신히 건넌 보수에 먹칠을 하고 있다.

 보수의 시조로 꼽히는 영국 정치인 에드먼드 버크는 프랑스 혁명을 고찰하며 기존 질서를 단숨에 해체하고 새 사회를 만들어내겠다는 진보 혁명가들을 비판했다. 이와 달리 전통적 가치를 유지하면서도 효과가 확인된 정책으로 사회와 제도를 점진적으로 바꾸는 겸손하고 신중한 정치적 태도가 보수주의라고 설파했다. 대중의 눈으로 평가받는 데 익숙하고, 사소한 실수에도 극도로 조심성을 보이는 자세도 '보수의 품격'으로 꼽았다.

영 존슨 총리 퇴진, 보수당 자정 때문
윤석열 정부는 핵심층이 혼란상 반복
널리 의견 구해 보수 개혁 비전 보여야

국민의힘 권성동 당대표 직무대행 겸 원내대표가 27일 국회로 등원해 원내대표실 앞에서 전날 본회의장에서 윤석열 대통령과의 문자내용 공개와 관련해 입장을 밝힌뒤 국민들께 사과하며 인사하고 있다. 김상선 기자

국민의힘 권성동 당대표 직무대행 겸 원내대표가 27일 국회로 등원해 원내대표실 앞에서 전날 본회의장에서 윤석열 대통령과의 문자내용 공개와 관련해 입장을 밝힌뒤 국민들께 사과하며 인사하고 있다. 김상선 기자

 이런 품격과 거리가 먼 논란이 집권 핵심에서부터 촉발되고 있다. 권성동 당 대표 직무대행 겸 원내대표는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 합의와 번복으로 논란을 자초했다. 대통령실 ‘사적 채용’ 파문이 일자 자신이 추천했다며 “7급에 넣어줄 줄 알았더니 9급에 넣었더라. 최저임금보다 조금 더 받아 미안했다”고 말했다. 채용됐던 인사의 부친이 권 대행의 지역구인 강릉시 선관위원이었고, 윤 대통령의 지인이자 1000만원 후원금도 낸 것으로 드러나 정권의 트레이드 마크인 공정에 금이 갔다.

 권 대행과 윤 대통령이 주고받은 문자 메시지가 공개된 것은 화룡점정이다. 국민의힘 당원 게시판에 “한두 번도 아니고 한심하다. 권 대행은 사퇴하라”는 글이 쏟아졌다. 대통령의 당무 언급은 적절치 않다고 해온 윤 대통령이 이준석 대표를 ‘내부 총질이나 하던 당 대표’로 표현하자 “원칙과 상식을 벗어난 꼼수 정치를 시작한 게 아니냐”는 실망이 나왔다.

26일 오후 국회 본회의장에서 열린 제 398회 임시회 6차 본회의 대정부 질문도중 권성동 국민의힘 원내대표가 문자대화를 하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26일 오후 국회 본회의장에서 열린 제 398회 임시회 6차 본회의 대정부 질문도중 권성동 국민의힘 원내대표가 문자대화를 하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이 대표 역시 한때 보수정당의 30대 대표로 기대를 받았다. 하지만 대선 때 페미니즘에 대한 태도를 ‘복어 요리’에 비유하며 젠더 갈라치기를 주도했다. 대선 당시 윤 후보의 입당과 관련해 “앞에 타면 육우, 뒤에 타면 수입산 쇠고기” “비빔밥 거의 다 완성. 지금 당근 정도 빠진 상황”이라고 했다. 너나 할 것 없이 보수의 핵심 덕목인 겸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태도다.

 윤석열 정부의 집권 초반 지지율 폭락은 비전을 보여주지 못한 탓도 크다. 2019년 타계한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일본 총리는 저서 『보수의 유언』에서 “보수는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려는 에너지의 양이 풍부하다”며 보수주의에 내포된 개혁성을 강조했다. 정치 리더의 덕목으로 철학과 열정을 꼽은 뒤 원대한 비전을 선보이라고 주문했다. 유권자가 반응하는 포퓰리즘만 추구하는 정치인과 즉흥적으로 행동하는 ‘순간 터치형’ 정치인을 경계 대상으로 꼽았다.

윤석열 대통령이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열린 나토(NATO. 북대서양조약기구) 정상회의 첫 순방을 마치고 경기 성남 서울공항에 도착해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와 악수하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윤석열 대통령이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열린 나토(NATO. 북대서양조약기구) 정상회의 첫 순방을 마치고 경기 성남 서울공항에 도착해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와 악수하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정당을 불문하고 대선 때 선심성 공약을 쏟아냈지만 집권한 윤석열 정부는 달라야 한다. 그런데도 경제 위기와 양극화, 고령화와 지속가능한 성장 등을 포괄하는 국가운영 철학이 보이지 않는다. ‘공정과 상식’을 내세웠지만 블라인드 면접이 제도화한 나라에서 서울대 등 학벌 위주 인사와 검찰 등 과도한 측근 중용으로 빛이 바랬다. 권한이 비대해진 경찰의 관리 방안 하나 설득해내지 못한 채 장관이 ‘12·12 쿠데타’에 비유하며 ‘까라면 까’라고 하고 있지 않나.

 국내에서 보수에 대한 긍정적 평가는 산업화를 이끌고 집권 경험이 풍부하며 유능하다는 점이었다. 실제 경륜과 학식, 비전과 통찰력을 갖춘 보수 인사들이 있다. 두루 의견을 구해 미래로 나아갈 비전 수립부터 해야 한다. 국정 운영의 차질은 집권세력만이 아니라 국민의 실패가 된다. 인적 쇄신 등을 통해 스스로에 엄격한 보수의 자세도 실천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