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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유홍림의 퍼스펙티브

시민 토론·논쟁 없는 한국 민주주의는 위태롭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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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담론 생태계’ 살리는 시민 교육

유홍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유홍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프로이센의 군사 이론가 클라우제비츠는 『전쟁론』에서 “전쟁은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연속이다”고 설파했다. 주어와 술어를 바꾸면 ‘정치는 다른 수단에 의한 전쟁의 연속이다.’ 여기에서 앞 구절의 다른 수단은 폭력이고, 뒤의 다른 수단은 언어 행위다. 정치는 ‘말로 하는 투쟁’이다. 정치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이 하나일 수는 없지만, 민주주의에서 이 명제의 설득력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정치는 판단 기준이 불확실한 상황에서 주어진 시간 내에 합당하다고 인정되는 의사결정을 달성하는 일이다. 복잡한 이해관계와 상충하는 주장, 예측 불가능한 사건들로 가득 찬 ‘회색의 정치 세계’에서 토론과 숙의는 어렵사리 진행된다. 이 과정에서 참여자들은 자신의 역량을 발휘해 어느 정도 합당한 공동의 해결책을 모색해야 한다. 확장된 사유 능력, 상황 판단력, 균형 감각, 결과에 대한 숙고 등 객관적이고 종합적인 사고 능력이 정치의 성패를 가른다.

자유·평등·공정 등에 대한 공적 논의 제대로 진행되지 않은 채
정치인들이 이런 가치들을 일시적 슬로건으로 소비하고 말아
선진 민주국가들은 체계적 시민 교육으로 정치 담론 활성화
공교육·시민사회에서 시민 덕성·역량 기르는 교육과 훈련 절실

‘민주주의 축제’ 여는 북유럽 국가들

유홍림의 퍼스펙티브

유홍림의 퍼스펙티브

스웨덴에서 시작돼 덴마크·핀란드·노르웨이·아이슬란드 등 북유럽 및 발트해 연안 8개국이 한 달에 걸쳐 각각 개최하는 ‘민주주의 축제’에서는 정치인과 시민·청소년이 함께 모여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논의한다. 거의 모든 정치적 현안을 다루는 포럼에서 부처 장관들이 청중과 질의응답 하고, 축제 기간 중 매일 저녁 열리는 정당별 연설 행사에서는 정당 대표들이 시민과 직접 토론한다.

‘민주주의 축제’는 오랫동안의 시행착오와 경험의 축적을 거쳐 형성된 민주적 ‘담론 생태계’를 보전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토론과 논쟁의 장인 담론 생태계는 공적 신뢰와 마찬가지로 매우 어렵게 형성되지만, 한번 관심에서 멀어지면 쉽게 무너질 수 있다.

담론 생태계의 구성 요소와 형성 과정을 잘 이해해야만 지속가능한 민주주의의 조건인 시민 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할 수 있다. 정치 세계는 기본적으로 담론의 세계다. 자유와 평등에 대한 열망과 필요를 우리가 현실화하기 위해서는 적극적으로 서로 소통해야만 한다. 우리가 일상용어를 정치 개념으로 전환하고, 그 개념들이 토론과 논쟁의 중심에서 장기간 관심을 끌면 정치적 이상으로 진화한다. 그 이상과 가치가 제도화됨으로써 법과 원칙이 수립된다. 이러한 정치 경험 속에서 발생하고 진화하는 정치 언어의 요소들이 체계화된 형태가 정치 이념이다.

자유·평등·정의 등은 정치 담론을 구성하는 개념이자 이상이며, 법과 원칙의 형태로 발전한 대표적인 예다. 담론 생태계에서 가치와 이상의 생명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열망과 필요에서 비롯된 정치 언어의 의미가 퇴색하지 않도록 지속해서 토론과 논쟁을 이어가야 한다.

우리의 정치 현실은 어떠한가? 산적한 과제를 수행해야 할 정치 사회에서 오가는 공적 언사들이 국민 신뢰를 얻지 못하는 것은 물론 정치 담론 생태계 자체를 파괴하는 상황에 이르고 있다. 복합적 위기와 도전에 대응하기 위해 개혁이 절실하다는 사회적 인식이 퍼지고 있지만, 막상 개혁의 방향에 대한 진지한 토론은 없다. 이념과 철학의 빈곤과 그에 대한 무관심, 권력 정치와 ‘생존주의’에 매몰된 정치 게임의 만연이야말로 가장 근본적인 위기 징후이다.

정치 게임 만연은 민주주의 위기 징후

우리 사회에서는 자유·평등·정의·공정 등의 핵심 가치에 대한 공적 논의가 지속해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담론 생태계를 말솜씨의 경연장 정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권력 정치가들에 의해 이러한 가치들은 일시적 슬로건으로 소비되다 슬그머니 사라진다. 국가 정체성과 연관된 자유주의·민주주의·공화주의·민족주의 등의 정치 이념에 대한 논쟁도 관심을 끌지 못한다. 우리의 정치 담론을 지배하는 보수와 진보라는 용어조차 과연 엄밀한 의미의 개념이나 이념인가도 의문이다. 보수 대 진보라는 구분도 민주적 핵심 가치로서의 콘텐트가 없이 특정 정치 상황에서 전략적 필요 때문에 편의적으로 사용됐다.

슬로건 경쟁이 아니라 정치적 이상과 이념을 둘러싼 논쟁이 필요하다. 맹목적 신념에 매몰된 교조적 갈등은 문제지만, 이상과 이념이 왜 중요한지, 그 의미가 무엇인지 따지는 논쟁이야말로 건전한 민주 정치의 기초다.

예컨대 불공정 사례들이 언론에 잠시 등장하고, 그에 대해 즉흥적으로 불만을 토로하는 상황이 반복되어서는 의미 있는 정의 담론이 형성될 수 없다. 간헐적으로 분출하는 ‘광장의 정치’만으로는 정의 담론의 생명력이 유지되기 어렵다. 시민사회 속에 정의에 대한 ‘공통 감각’이 지속해서 살아 움직여야 상이한 정책 제안 간의 타협과 절충이 가능하다. 그렇지 않으면 여론조사와 다수결에 의해 정의 문제가 섣불리 결정되는 상황이 발생하고, 그것은 또 다른 분란의 씨앗이 된다.

교육 통해 길러져야 하는 시민성

인간은 시민으로 태어나지 않는다. 현대의 대표적 민주 국가들은 민주주의의 근본 원리와 가치, 절차와 제도를 함께 이해하고, 정치 참여에 필요한 지식과 토의 역량을 함양하며, 다원성을 인정하는 관용과 타협의 정신을 북돋우기 위해 체계적이고 지속적인 시민 교육을 시행해왔다.

건국 당시부터 시민의 관심과 참여가 민주주의의 근간이라는 가치관을 공유해온 미국은 연방정부·주정부·시민단체·언론 등 여러 경로를 통해 시민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초당적 비영리 기구인 시민교육센터는 ‘We the People’과 ‘Foundations of Democracy’ 등의 학교 시민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 보급한다.

1976년 체결된 ‘보이텔스바흐 합의’는 독일 시민 교육의 근간을 이루는데, 세 원칙으로 구성된다. 첫째, 강압과 교화, 주입식 정치 교육을 금한다. 둘째, 정치와 학문 세계에서 논쟁적으로 다루어지는 내용은 수업 시간에도 그 논쟁성과 각 입장이 잘 드러나야 한다. 셋째, 학생들이 당면한 정치 상황과 이해관계를 분석하고, 자율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함양한다. 독일을 포함한 유럽 민주 국가들에서 시민 교육을 이끌어가는 실질적 주체는 공교육 기관뿐 아니라 시민사회의 다양한 조직과 기구들이다. 주요 정당과 사회단체·시민대학·청소년단체 등 다양한 행위자들이 나름의 방식과 내용의 시민 교육을 제공한다.

젊은 세대, 시민적 덕성 연마 기회 없어

현재 한국의 시민 교육은 교과목 중심의 공식적 교육과정에 머물러있다. 이제 시민 교육의 지평을 넓혀야 할 시점이다. 우리가 18세 이상의 젊은 유권자에게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부여했지만, 그들이 가꾸어나갈 정치 담론을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는 의문이다.

시민성은 구체적인 삶의 경험이 축적되어 길러진다. 초등-중등-고등-평생 교육의 전 단계에서 시민의 덕성과 역량을 기르는 교육과 훈련이 계속돼야 한다. 어떤 정치적 사안에 대한 논의도 중고등학교 교실에서 진행되는 것을 막는 관성적 태도를 반성해봐야 한다.

시민 교육 기관으로서 대학의 역할에 대한 관심이 부족한 것도 치명적 공백이다. 대학에서 우리의 후속 세대는 시민적 덕성을 연마할 기회조차 없이 취업 준비에 내몰리고 있다. 대학은 미래의 노동력을 생산하는 거점이기 이전에 공동체를 구성하는 많은 시민이 인생 주기의 형성적 시기를 보내는 공간이다.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기반은 단순한 지식과 정보의 양이 아니라 갈등과 논쟁을 이해하고 다룰 줄 아는 역량이다.

시민 교육은 공교육과 시민사회의 두 영역에서 상호보완적으로 진행돼야 한다. 시민 교육의 저변이 확대되기 위해서는 시민사회의 다양한 주체와 경로가 필요하다. 정부는 교육 현장과 시민사회에 존재하는 담론 생태계의 다양성을 북돋고 토론을 증폭시키는 매개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시민들이 지역사회에서 직접 관찰·경험하고 스스로 의제를 발굴하며 문제 해결 능력과 비판적 사고력을 키워나갈 수 있는 구체적인 프로그램을 구성하는 것도 중요하다.

고대 아테네의 영웅 페리클레스는 “토론은 행동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아니라 현명한 행동을 위한 필수불가결의 조건”이라고 강조했다. 근대 이후 민주 정치는 ‘토론을 통한 통치’를 지향하며 발전해왔고, 이제 토론과 숙의의 절차와 과정은 민주주의 그 자체로 여겨지게 되었다. 대화와 근거 제시를 통해 참여자의 사유 범위를 확장하고, 공동선에 부합하는 입법과 정책 결정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시민 교육과 담론 생태계를 연결하는 틀부터 근본적으로 다시 짜야 한다. 아니면 우리는 후속 세대에 시민성이 아닌 정치적 냉소주의만을 물려주게 될 것이다.

유홍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