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남정호의 퍼스펙티브

'은둔형 영부인'은 시대착오...건강한 활동이 바람직

중앙일보

입력 2022.07.28 0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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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남정호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퍼스트 레이디는 왜 중요한가

영부인은 국가 전반의 귀한 자산 #존경받는 미 영부인, 활동가 많아 #육영수·이희호 여사도 마찬가지 #대외활동 외 현명한 처신도 필수

남정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남정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 1962년 초 당시 미국의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 주(駐)인도 대사는 신생 독립국 파키스탄과의 관계 강화를 위해 고민했다. 남아시아 내 미국의 위상을 굳건히 하려면 파키스탄과의 우호가 절실한 탓이었다. 그는 마침내 한 가지 묘안을 짜냈다. 당시 연예인 못지않은 인기를 누렸던 영부인 재클린 케네디를 활용하는 방안이었다. 반년 전 백악관에 온 모함마드 아유브 칸 파키스탄 대통령과 재클린 모두 승마 애호가여서 영부인을 데려오면 큰 도움이 될 거로 본 것이다. 그리하여 갤브레이스 대사는 재클린과 여동생 리 라지윌을 자신의 손님으로 초청, 인도와 파키스탄을 차례로 방문하게 한다.

한미 역대 최고의 영부인들

한미 역대 최고의 영부인들

1962년 3월 당시 미국 영부인인 재클린 케네디와 여동생이 파키스탄을 방문해 낙타를 타보고 있다. 두 자매는 미국과 신생독립국 파키스탄 간 우호 관계를 증진시키기 위해 이 나라를 찾았다. [미국 정부 자료사진]

1962년 3월 당시 미국 영부인인 재클린 케네디와 여동생이 파키스탄을 방문해 낙타를 타보고 있다. 두 자매는 미국과 신생독립국 파키스탄 간 우호 관계를 증진시키기 위해 이 나라를 찾았다. [미국 정부 자료사진]

재클린 케네디의 빼어난 외교
 막중한 임무를 맡은 재클린은 나름대로 신경을 썼다. 미리 양국 역사를 공부하고 항공편도 에어 인디아를 탔다. 인도에 도착한 자매는 이 나라의 자랑인 타지마할에 가고 파키스탄에서는 낙타를 타면서 현지 문화를 존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현지인들은 자매를 보러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자와할랄 네루 총리는 임기 말까지 재클린과 찍은 사진을 집무실에 걸어뒀다. 아유브 칸 대통령은 재클린의 방문에 감격해 값비싼 말을 선물했다. 미 언론은 재클린의 인도·파키스탄 방문을 성공적이라고 평가했다.

# 2009년 12월 차기 중국 정상으로 내정된 시진핑 부주석은 부인 펑리위안(彭麗媛)과 일본을 찾았다. 펑리위안은 빼어난 미모와 고운 목소리를 자랑하는 중국의 국민가수였다. 시진핑 부부가 방문한 당시 현지에선 아키히토(明仁) 일왕의 즉위 20주년 축하공연이 열리고 있었다. 이에 펑리위안은 무대에 올라 일본인의 국민가요인 '사계(四季)의 노래'를 열창한다. 나루히토(德仁) 왕세자는 기립박수를 보냈다. 그리고 2주 후 시진핑 부부는 일왕을 접견한다. 통상 한 달 전에 신청해야 한다는 전통을 깬 파격 대우였다. 펑리위안의 노래가 큰 역할을 한 게 틀림없다. 한 나라의 퍼스트레이디가 얼마나 큰 역할을 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실례다.

김건희 여사가 대선 후보 부인 시절이던 지난해 12월 서울 여의도 국민의힘 당사에서 자신의 허위 이력 의혹 등과 관련, 대국민 연설을 하고 있다. 당시 김 여사는 ″남편이 대통령이 되더라도 아내의 역할에만 충실하겠다″고 밝혔다. [뉴스1]

김건희 여사가 대선 후보 부인 시절이던 지난해 12월 서울 여의도 국민의힘 당사에서 자신의 허위 이력 의혹 등과 관련, 대국민 연설을 하고 있다. 당시 김 여사는 ″남편이 대통령이 되더라도 아내의 역할에만 충실하겠다″고 밝혔다. [뉴스1]

시야에서 사라진 김건희 여사 
 윤석열 대통령의 부인 김건희 여사가 대중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보름이 되도록 두문불출하며 공식 행사에 참석하지 않는 것은 물론 언론의 안테나에도 안 잡힌다. 자신의 행보를 둘러싼 논란이 윤 대통령 지지율 하락의 원인이 됐다는 판단 때문일 수 있다.
 "너무 나선다"는 문재인 대통령의 부인 김정숙 여사에 대한 비판적 여론에다 본인과 관련된 의혹을 의식한 탓인지 김 여사는 대선 기간 중 "남편이 대통령이 되더라도 아내의 역할에만 충실하겠다"고 기자회견에서 약속했다.
 하지만 온종일 집안일에만 몰두하는 영부인이 바람직한가.  미국 뉴욕주 올버니에 위치한 시에나대연구소(SCRI)는 1982년부터 역사학자 등 전문가를 대상으로 미국의 역대 영부인 평가를 5차례 실시했다. 평가는 10가지 항목을 기준으로 각 영부인에게 점수를 매기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10가지 기준은 ^배경 ^국가적 기여 ^백악관 안주인 역할 ^용기 ^업적 ^진실성 ^지도력 ^여성성 ^공적 이미지 ^대통령에 대한 기여 등이다. 바꿔 말하면 이 10가지 기준이 영부인에게 요구되는 덕목인 셈이다.

미국의 가장 존경받는 영부인로 꼽히는 엘리나 루스벨트가 1940년 7월 미국 시카고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에 참석, 연설하고 있다. [루스벨트대통령 기념도서관]

미국의 가장 존경받는 영부인로 꼽히는 엘리나 루스벨트가 1940년 7월 미국 시카고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에 참석, 연설하고 있다. [루스벨트대통령 기념도서관]

미 최고의 영부인 엘리나 루스벨트
 가장 최근 조사는 2014년 실시됐다. 가장 존경 받는 영부인으로는 엘리나 루스벨트가 꼽혔다. 이어 애비게일 애덤스, 재클린 케네디, 돌리 매디슨, 그리고 미셸 오바마 순이었다.
 압도적인 1위인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부인 엘리나는 누구보다 활발하게 대외활동을 한 인물이다. 그는 휠체어 신세였던 남편 대신 온 나라를 누비며 루스벨트의 메시지를 전했고 때로는 협상까지 했다. 타고난 문장가여서 각종 잡지와 신문에 칼럼을 기고하고 여러 권의 책을 썼다. 1940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는 연설까지 했다.
 존 애덤스의 부인 애비게일은 여성 인권신장에 앞장선 선각자였다. 지독한 남녀 차별로 여성은 교육조차 못 받던 18세기 말, 비록 실패하기는 했지만 미 헌법에 남녀평등을 명시하라고 남편에게 요구하기도 했다. 애비게일은 또 대통령인 남편에게 1100여 통의 편지를 써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 것으로 유명하다.
 스타일리스트인 재클린은 다른 방면으로 나라에 기여했다. 프랑스계인 데다 파리 유학까지 해 그의 불어 실력은 원어민 수준이었다. 그 덕에 재클린이 남편 케네디와 함께 파리를 방문했을 때 프랑스인들로부터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다. 불어뿐 아니었다. 타고난 언어 감각으로 그는 스페인어와 이탈리아어까지 능통했다. 그리하여 남편의 선거운동 때면 재클린은 스페인어 연설까지 했다. 남다른 패션 감각으로 젊고 세련된 미국이란 이미지를 전 세계에 퍼트린 것도 그의 업적 중 하나다.

2013년 2월 영부인 미셸 오바마가 시카고의 공립학교 학생들과 함께 운동을 하고 있다. 미셸은 '움직이자! (Llet's move!)' 캠페인을 펼치며 아동비만 퇴치 운동에 앞장섰다. [AP]

2013년 2월 영부인 미셸 오바마가 시카고의 공립학교 학생들과 함께 운동을 하고 있다. 미셸은 '움직이자! (Llet's move!)' 캠페인을 펼치며 아동비만 퇴치 운동에 앞장섰다. [AP]

미셸 오바마의 비만 퇴치 운동
 미국 4대 대통령 제임스 매디슨의 아내 돌리는 최초로 '퍼스트레이디'로 불렸다. 그는 정당 간 알력이 극심했던 당시 여야 정치인들을 한꺼번에 백악관에 불러 처음으로 초당적 모임을 성사시킨 주인공이다. 아울러 돌리는 1814년 백악관이 영국군에 의해 불타자 건물 내 문화재를 구해내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버락 오바마의 부인 미셸이 칭송받는 이유는 여럿이다. 남편 못지않게 유능한 변호사였지만 백악관 입성 후에는 전업주부로 변신했다. 미국인이 보기 원하는 단란한 가정의 모습을 연출하기 위해서였다. 미셸은 그러나 평범한 가정주부로 남는 것은 거부했다. 그는 '움직이자! (Let's move!)' 라는 비만 퇴치 캠페인을 벌이며 운동 권장과 함께 학교 급식 개선을 위해 노력했다.
 이렇듯 미국의 존경 받는 영부인 다섯 명을 살펴보면 이들 모두 집안에 틀어박힌 현모양처형이 아닌, 대외적으로 의미 있는 역할을 활발히 수행했었음을 알 게 된다. 특히 최근의 영부인들은 각기 특별한 목적의 캠페인을 벌이는 게 일반적이다.

미국 영부인들의 주요 캠페인

미국 영부인들의 주요 캠페인

육영수·이희호 여사의 공통점
 한국도 마찬가지다. 그간 존경하는 영부인을 묻는 여론조사에선 육영수·이희호 여사가 늘 1~2위를 다퉈왔다. 중요한 사실은 두 사람 모두 영부인으로서 활발한 활동을 했다는 점이다. 육 여사는 고아 등 사회적 약자, 특히 나환자 지원에 앞장섰다. 청와대로 이들을 불러 다과회를 열고 전국 각지의 나환자 병원을 찾았다. 이와 함께 아동을 위해 육영재단을 설립하고 어린이회관도 지었다. 그뿐 아니라 정권에 비판적 목소리로 유명했던 동아방송을 늘 듣는 등 남편인 박정희 대통령의 눈과 귀가 되도록 노력해 '청와대 내 야당'으로 불리기도 했다.

1971년 12월 육영수 여사가 전남 나주에 위치한 음성 나환자촌 현애원을 방문, 옷과 책, 종돈 등 위문품을 전달하며 환자와 가족들을 격려하고 있다. [청와대 자료사진]

1971년 12월 육영수 여사가 전남 나주에 위치한 음성 나환자촌 현애원을 방문, 옷과 책, 종돈 등 위문품을 전달하며 환자와 가족들을 격려하고 있다. [청와대 자료사진]

 이희호 여사는 김대중 대통령과 결혼하기 전부터 이름난 재야인사였다. 이 여사는 단순한 아내를 넘어 정치적 동지이자 조언자로 활약했다. 김 대통령 재임 중인 2002년에는 유엔 아동 특별총회에 참석, 남편 대신 회의를 주재하고 기조연설을 하기도 했다. 요컨대 한국과 미국 모두 의미 있는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영부인일수록 높은 평가를 받는다는 얘기다.

최근 역사학자 등 전문가들을 상대로 한 여론조사에서 최악의 미국 영부인 중 하나로 꼽힌 팻 닉슨.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물러난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부인인 그는 전형적인 현모양처형 영부인으로 1960~80년대에는 존경받는 여성으로 뽑히기도 했다. [닉슨기념도서관]

최근 역사학자 등 전문가들을 상대로 한 여론조사에서 최악의 미국 영부인 중 하나로 꼽힌 팻 닉슨.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물러난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부인인 그는 전형적인 현모양처형 영부인으로 1960~80년대에는 존경받는 여성으로 뽑히기도 했다. [닉슨기념도서관]

현모양처형 영부인 평가 낮아
 반면 집에서 살림만 하는 현모양처형 영부인에 대한 평가는 박하다. 실제로 지난해 10월 1960년 이후의 영부인 12명에 대한 데일리메일의 여론조사 결과 팻 닉슨이 최악의 영부인으로 꼽혔다. 리처드 닉슨의 부인인 팻은 전형적인 현모양처형으로 늘 집안일을 하면서 웃는 모습을 보여 '종이 인형'이란 별명까지 얻었다.
 흥미로운 대목은 1950년대 말부터 20년 동안 펫 여사가 가장 존경하는 여성으로 14번이나 뽑혔다는 사실이다. 과거에 칭송받던 현모양처형 영부인이 이제는 외면받고 있다는 사실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러니 김건희 여사에게 "집안에 틀어박혀 꼼짝 말고 있으라"고 요구하는 건 중요한 국가적 자원을 낭비하는 처사다. 현재 대졸 여성 취업률은 63.1%로 남성(67.1%)과 그리 큰 차이가 없으며 미성년 자녀를 둔 기혼 여성도 56.2%가 일한다. 이런 상황에서 오로지 집안일만 하는 영부인을 요구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칼은 사람을 해치는 흉기가 되지만 생명을 살리는 메스로도 쓰인다. 영부인이란 자리 역시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얘기다.
 그렇다고 대외 활동을 활발하게 한다고 항상 좋다는 뜻은 아니다. 최악의 영부인 중 하나로 꼽히는 낸시 레이건은 '그냥 싫다고 해 (Just say No)'라는 마약 퇴치 운동을 벌였지만 좋은 평가를 얻는 데 실패했다. "마약 중독자는 악"이고 "당장 끊어야 한다"고 강요하는 등 지나치게 단순한 메시지를 고집한 탓이다. 낸시는 또 점성술사에 집착해 중요한 의사 결정 때마다 점을 봤던 것으로 알려져 반감을 샀다. 요컨대 적절히 대외활동을 하되 현명하게 처신하는 게 영부인에게 필요한 덕목이라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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