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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선2035

공정 디플레이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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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박태인 기자 중앙일보 정치부 기자
박태인 정치팀 기자

박태인 정치팀 기자

공정(公正)이 범람하고 있다. 누구나 공정을 말하고 있다. 역설적인 건 공정을 외칠수록 공정의 가치는 떨어진다는 점이다. 내 월급만 빼고 다 오르는 인플레이션 시대에 펼쳐지는 ‘공정 디플레이션’이다.

청와대가 옮겨간 용산에서 벌어지는 각종 채용 논란에도 공정이 화두다. 검찰 출신으로 편중된 장·차관급 인사에서 시작한 공정과 능력주의 논란이 9급 공무원까지 내려왔다.

대통령의 지인 아들이자 대선에서 대통령에게 1000만원을 후원한 행정요원 A씨를 두고 대통령실은 공정을 꺼내 들었다. 선거 캠프에서 헌신한 공헌을 고려한 “공정한 채용”이라고 했다. A씨를 대통령실에 추천한 권성동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문재인 정부 당시 박성민 전 청년비서관을 언급하며 “낙하산 1급을 만든 민주당이 노력으로 성취한 9급을 비판할 수 있느냐”라며 또 공정을 말했다.

대통령실 청사 앞에 “새로운 국민의 나라”라는 슬로건이 걸려있다. [연합뉴스]

대통령실 청사 앞에 “새로운 국민의 나라”라는 슬로건이 걸려있다. [연합뉴스]

여당 원내대표의 추천을 받고 유력 대선후보에게 1000만원을 낼 청년은 대한민국에 몇이나 될까. 당장 갚아야 할 빚이 매달 무섭게 다가온다. 무급으로 캠프에서 일할 수 있는 청년도 극소수다. 대선에 공헌이 있다고 모두 대통령실에 합류하는 것도 아니다. 운 좋게 들어가 보니 “누구 아들, 누구 딸이 왜 이리 많으냐”는 말이 나온다. 추천한 사람을 부모로 비유한 표현이다. 출발점부터 달랐다는 불공정의 하소연이다. 공정이 공허하게 들린다.

범람하는 건 공정뿐이 아니다. 차별이란 단어도 비슷한 조짐을 보인다. 대통령의 6촌과 극우 유튜버 누나의 채용을 두고서도 대통령실에선 “인척이란 이유만으로 지적하는 건 차별” “누나와 동생을 엮어 채용을 문제 삼는 건 연좌제”란 반박이 나왔다. 차별은 주로 소수자가 쓰는 용어였다. 법 없이도 불편하지 않은 강자에게 ‘차별금지법’은 불필요하다. 대통령실과 차별이란 단어의 조합은 어색하다. 누구나 정권 초기엔 대통령실에 가려 한다. 급수보다 권력과의 거리가 중요해서다. 사람들은 “왜 하필 그 사람을 뽑았냐”고 공정을 물었는데 “묻는 것부터가 차별”이란 대답인 셈이다. 차별을 연구해 온 구정우 성균관대 교수는 “신중히 쓰여야 할 단어가 남발되는 건 용례에 대한 고민이 부족하다는 뜻”이라고 했다.

취임 두 달 만에 윤석열 대통령의 지지율이 30%대 초반으로 떨어졌다. 공정의 가치를 내걸고 당선된 대통령이다. ‘공정 디플레이션’ 시대에 지지율 하락은 피할 수 없어 보인다. 사람만 바뀌면 다 공정해질 줄 알았는데, 사람만 바뀐 것 아니냐는 말이 나온다. 최규석의 웹툰 『송곳』에는 이런 대사가 있다. “당신은 안 그럴 거라고 장담하지 마. 사는 데가 바뀌면 풍경도 달라지는 거야.” 시민들과 같은 풍경을 바라봐야 한다. 누구나 공정을 말할 수 있지만, 아무나 공정을 말해선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