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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든 느린 미술평론가 유준상, 점심 요리 저녁 때야 완성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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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7호 29면

예술가의 한끼

1992년 2월 국립현대미술관 회의실에서 업무 중인 유준상. 국립현대미술관 1대 학예실장과 서울시립미술관의 초대 관장을 역임한 그는 국내 1세대 미술평론가다. [사진 서울시립 미술아카이브]

1992년 2월 국립현대미술관 회의실에서 업무 중인 유준상. 국립현대미술관 1대 학예실장과 서울시립미술관의 초대 관장을 역임한 그는 국내 1세대 미술평론가다. [사진 서울시립 미술아카이브]

미술평론가 유준상(1932~2018)의 청년 시절은 꽤 특이하다. 그는 중앙고교 재학 시에 미술부 반장이었다. 한국인 화가로는 최초로 파리에서 공부한 이종우(1899~1979)가 미술 교사였다. 고교 3학년 때 한국전쟁을 맞았다. 부산으로 캠퍼스를 옮긴 서울대학교의 미대와 상과대학(상대)을 동시에 입학한 게 1951년이다. 서울미대 회화과 교수를 지내게 되는 서양화가 김태(1931~2021)가 입학 동기다. 어리숙한 시절이라 이중 학적이 가능했다. 미대는 조금 다니다가 결국 포기하고 상과대학에서 수학했다.

술자리 취기에 주먹 김두한과 붙을 뻔

피란지 부산에서 처음으로 거친 경상도 사투리를 들었다. 외국어처럼 귀에 설었다. 매일 낙동강 전선의 전황을 체크해야 하는 긴장감과 이국에 온 듯한 해방감을 동시에 느꼈다. 치열한 박진 전투가 벌어지는 의령, 창녕 등지의 낙동강변의 자그마한 마을 이름까지도 다 외웠는데 평생 잊지 않았다. 긴장이 풀리면 술집을 다녔다. 풋술에 취기가 빨리 올랐다. 옆자리 일행과 말다툼이 일었다. 상대는 덩치가 큰 건장한 장년이었다. 유준상은 싸움에 자신이 있었다. 특히 박치기가 쓸만했다. 덩치는 유준상에게 인자한 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술자리로 불렀다. 명함을 꺼내다 건네주었다. 명함에는 ‘대한민국 김두한’이라는 일곱 글자만 박혀 있었다. 글자의 크기도 글씨체도 한 자 한 자 다 다른 엉성한 명함이었다. 전쟁 중이라 활자를 있는 대로 구해다 만든 조잡한 명함이었다. 자칫 천하의 김두한(1918~1972)과 대결할 뻔했던 좌충우돌의 청춘이었다.

상과대학을 마치고 파리로 갔다. 발행 순서대로 부여되는 여권번호가 45번이었다. 유준상의 동갑내기 친구인 백남준의 여권번호는 7번이었다. 이 둘은 꽤 일찍 해외로 나간 청년들이었다. 유준상은 파리대학교에서 경영학을 공부했다(1956~57). 경영학 공부는 오래가지 못했다. 미술에 대한 꿈이 다시 살아났다. 그랑 쇼미엘에서 회화실기를 공부했다(1957~1959). 실기를 공부하는 한편 청강으로 파리대학교에서 서양미술사와 근대미술사 수업을 받았다(1957~1959).

1989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임히주, 백남준, 유준상(왼쪽부터). 유준상 유족이 기증한 사진. [사진 서울시립 미술아카이브]

1989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임히주, 백남준, 유준상(왼쪽부터). 유준상 유족이 기증한 사진. [사진 서울시립 미술아카이브]

당시 파리에는 한국인 학생이 몇 없었다. 그들이 모여 학생회를 만들었는데 유준상이 회장이 되었다. 회원으로는 채성민, 나중에 서울대 음대 교수가 된 바이올리니스트 양해협(1929~2021) 등이 있었다. 파티가 열리면 유준상이 요리를 맡았다. 소고기가 많아 곰탕은 만들기가 수월했다. 케첩에 고춧가루를 넣어 엉터리 고추장을 만들었다. 학생회 회장이란 경력은 나중에 귀국했을 때 유준상의 신변에 위협으로 작용했다. 정부가 싫어했다. 쫓기는 몸이 되어 강원도의 탄광으로 숨어들었다. 파리에서 배운 지식을 써먹을 데가 없었다. 신변의 안전이 보장되자 1965년 신문회관의 한국신문연구소에 연구원이란 자리를 얻었다. 여기서 3년간 일하면서 유준상은 파리에 있을 때보다 더 많은 공부를 했다. 연구소의 자료를 다 섭렵했다. 홍익대, 서라벌예대 등에 강의를 나가며 미술계에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일찍 파리에 입성한 유준상은 나중에 파리로 온 선배 화가들의 정착을 도왔다. 1957년에는 화가 권옥연이 왔다. 1958년에는 화가 이응로가 왔다. 이응로의 집과 작업실을 알아봐 주었다. 선배들을 초대하여 손수 차린 음식을 대접했다. 유준상은 뭐든 느리다. 원고를 쓰는 속도도, 음식을 차리는 동작도 신중하다 못해 너무 느리다. 점심을 요리해주겠다고 선배들을 불렀는데 음식이 완성되고 나면 저녁때가 되었다. 선배들은 주린 배를 참았다.

유준상은 요리할 때, 재료의 극히 일부만을 쓴다. 가장 맛있는 부분만을 고르고 나머지는 다 버린다. 파를 써야 한다면 흰 부분과 푸른 부분이 만나는 딱 그 지점만 챙기고 나머지는 다 버린다. 쓰레기가 많이 나온다. 옆에서 조수역으로 시중을 들어야 하는 부인 손선희는 묵묵히 기다려 주었다. 부인에게 가끔 가쿠니(角煮)를 해주었다. 삼겹살을 큰 깍두기처럼 잘라서 만드는 일본식 돼지고기 간장 조림인데 가장 약한 불로 몇 시간이고 졸이는 유준상의 표정은 꽤 진지했다. 불은 절대 세게 하지 않고 뭉근하게 익도록 약한 불로 오랜 시간을 기다리는 게 유준상의 요리 스타일이었다. 유준상은 서울 종로구 신교동에서 태어나서 청운국민학교를 다녔다. 한국전쟁 때 부산으로 피란을 갈 때도 트럭 몇 대를 끌고 갈 정도로 대단한 부잣집이었다. 그런 탓인지 요리 하나 만드는데 재료와 시간을 아끼는 법은 없었다.

백남준은 경기고, 유준상은 중앙고를 나왔다. 학교는 다르지만 어릴 때부터 아는 사이다. 백남준은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서울을 자주 방문했다. 과천에 있는 국립현대미술관에 설치할 다다익선의 작품제작을 위해서다. 당시 유준상은 국립현대미술관의 학예실장이었다. 작품설치의 현장을 지휘해야 하는 유준상과 뉴욕의 백남준은 서로 연락을 자주 해야 했다. 시차가 있어 뉴욕의 백남준이 낮에 전화를 걸면 서울의 유준상은 밤에 전화를 받았다. 백남준은 꼭 유준상이 전화비를 내어야 하는 콜렉트 콜로 전화했다. 한국 최고의 부잣집 아들이었던 백남준이 볼 때도 유준상은 여유가 있어 보이는 사람이었다. 작품제작의 의욕이 넘치는 백남준은 항상 돈에 시달렸다. 그런 사정을 유준상은 이해했다.

말년에 둘이 만났을 때는 동병상련이었다. 둘 다 당뇨병이었다. 백남준이 먼저 왔고 상태가 심각했다. 백남준은 당뇨로 한쪽 눈을 실명했다. 유준상이 물었다. “남준아, 한쪽 눈이 보이지 않으니 힘들지 않아?” 백남준이 대답했다. “아냐 더 좋아. 한쪽 눈으로 보니 드디어 세상이 일목요연(一目瞭然)하게 보이기 시작했어.” 일목(一目)의 백남준이 웃으면서 받아쳤다.

유준상은 호기심이 많았다. 젊은이들이 잘 가는 핫 플레이스에 가는 걸 좋아했다. 1988년 당시의 서울의 핫 플레이스 중의 하나로 신촌의 ‘러쉬’가 있었다. 서울 최초의 록카페였다. 여기서는 맥주만 판다. 그런데 유준상은 당뇨 때문에 맥주를 못 마신다. 록카페에 당연히 소주는 없다. 사정을 눈치챈 주인이 특별히 소주 음주를 승낙했다. 후배인 H가 나가 소주 한 병을 사서 돌아왔다. 유준상은 러쉬를 나와 신촌 기차역 앞의 ‘비 풀’까지 갔다. 마광수 등이 단골인 바였다. 몇몇 전문공연자가 있어 공연하다가 손님도 나가서 노래를 부르곤 했다. 유준상은 당시 신촌 일대의 바를 드나들던 사람 중 가장 연장자였다.

동갑친구 백남준과 말년엔 동병상련

파리 유학시절의 유준상(앞줄 오른쪽). 왼쪽은 채성민. 뒷줄 오른쪽이 바이올리니스트 양해협이다. [사진 서울시립 미술아카이브]

파리 유학시절의 유준상(앞줄 오른쪽). 왼쪽은 채성민. 뒷줄 오른쪽이 바이올리니스트 양해협이다. [사진 서울시립 미술아카이브]

유준상은 젊은 작가들에게 관심이 많았다. 1988년 당시 육근병(1957~ )은 무명작가였다. 첫 개인전을 인사동의 ‘갤러리 도올’에서 했다. 당시로서는 낯선 비디오 설치작업이었다. 유준상이 몇 번이고 이 전시를 보러왔다. 도올 갤러리 김홍년 대표의 주선으로 유준상과 육근병은 만났다. 유준상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리는 청년작가전에 육근병을 추천했다. 이어서 육근병은 1989년에는 상파울로 비엔날레에 한국 대표작가로 참가하고, 1992년에는 제9회 카셀 도큐멘타에 한국 작가로는 처음 참가했다. 유준상의 안목이 젊은 후배의 길을 터주었다.

유준상은 평소에 글도 쓰레기가 될 수 있다는 지론을 가졌다. 그게 글을 늦게 쓰거나 안 쓰는 변명이 되기도 했다. 원고를 독촉해도 감감무소식일 때가 많았다. 과천에 있는 국립현대미술관 그의 방으로 직접 찾아가서 선 채로 원고를 기다리던 미술잡지 기자가 한둘이 아니었다. 목전에 사람을 세워놓고서야 원고지의 칸이 메워지기 시작했다. 재불화가 이성자(1918~2009)가 고인이 되자 화가의 막내아들은 어머니에 대한 평론을 유준상으로부터 받고 싶어 했다. 유준상은 몇 년을 망설이다 결국 글을 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요리도 늦고 글도 늦었다. 미술관에 대한 애정이 남달리 깊었다. 서울시립미술관의 초대관장이 되어 대법원 건물을 리모델링하여 미술관으로 개관하도록 서둘렀다. 빠를 때도 있었다.

황인 미술평론가

황인 미술평론가

황인 미술평론가. 미술평론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전시기획과 공학과 미술을 융합하는 학제 간 연구를 병행하고 있다. 1980년대 후반 현대화랑에서 일하면서 지금은 거의 작고한 대표적 화가들을 많이 만났다. 문학·무용·음악 등 다른 장르의 문화인들과도 교유를 확장해 나갔다. 골목기행과 홍대 앞 게릴라 문화를 즐기며 가성비가 높은 중저가 음식을 좋아한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는 필자 사정으로 이번 주에 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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