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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그린 황용엽, 고향의 맛 못 잊어 평양냉면 순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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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3호 24면

예술가의 한끼

황용엽은 신체가 기하학적인 형태로 요약되고 환원되어 반복적인 선묘로 표현된 인간의 형상을 그렸다. 사당동 작업실에서, 2022년. [사진 황용엽]

황용엽은 신체가 기하학적인 형태로 요약되고 환원되어 반복적인 선묘로 표현된 인간의 형상을 그렸다. 사당동 작업실에서, 2022년. [사진 황용엽]

황용엽(1931~ )이 우리 나이로 스물이 되었을 때 한국전쟁이 났다. 평양미술학교 학생이었던 그는 남으로 피난을 와선 국군에 입대했다. 1952년 7월에 상이군인으로 제대했다. 만 나이로는 아직 스물이었다. 삶과 죽음을 넘나든 그는 이십심이후(二十心已朽, 나이 스물에 마음은 벌써 늙어 버렸네)가 되어 있었다.

황용엽은 1931년 12월 18일 평양시 신양리 184-11번지에서 태어났다. 평양 시내 중심부에 있었던 광성유치원과 남산소학교를 다녔다. 논과 개천에는 미꾸라지, 논 게, 개구리가 지천이어서 아이들이 놀기에 그만인 목가적인 평양이었다. 일제 말기에 미군 폭격기의 공습에 대비하여 평양 시내가 소개(疏開)되었다. 황용엽이 살던 집도 헐렸다. 황용엽은 이사를 한 강서에서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녔다. 1948년 9월 북한의 유일한 미술학교인 평양미술대학에 2기로 입학했다.

황용엽의 어머니는 젖이 나오질 않았다. 유모의 젖을 물고 그 집에서 네 살 때까지 살았다. 유모의 남편을 할아버지라 부르며 따랐다. 유모 남편의 형은 책방을 했다. 책방에는 일본 책이 많았다. 그 가운데에 ‘아틀리에’, ‘미즈에’, ‘예술신조’ 등 일본 미술잡지들이 있었다. 이 책들을 독파하며 해외미술을 공부했다. 책 속에는 학교에서는 허용되지 않는 자유로운 표현의 그림들이 있었다.

대학 2학년 때 전쟁이 터졌다. 징집을 피하러 5개월간 산과 들판에서 노숙하며 숨어 살았다. 국군이 북진하는 틈을 타서 형들과 함께 서울로 내려와 영등포에 거처를 마련했다. 황용엽은 국군에 입대했다. 1950년 12월 18일, 자신의 생일날이었다. 곧 전장에 투입되었다. 이듬해 4월 중부전선 전투에서 오른쪽 무릎 위에 총상을 입었다. 마산으로 후송되었다. 임시병원이 된 마산고등학교 건물에서 몇 달을 누워서 지냈다. 총상으로 짧아진 오른쪽 다리를 물리치료로 5cm 늘였는데도 결국 왼쪽 다리보다 1.5cm가 짧아졌다. 통영 보충대에서 제대했다.

미군 초상화 그려 모은 큰돈 휴지 돼

왼쪽부터 김충선, 황용엽, 장성순, 1990년대. [사진 황용엽]

왼쪽부터 김충선, 황용엽, 장성순, 1990년대. [사진 황용엽]

황용엽은 영등포의 큰형님을 찾아갔다. 일본 유학생 출신의 큰형님은 양키물건 장사를 하고 있었다. 황용엽도 장사에 나섰다. 미군부대에서 나온 담배, 맥주, 버터, 치즈, 통조림 등을 팔았다. 얼마 후 인천 항만우체국 앞에서 초상화 가게를 개업했다. 미군들의 초상화를 그렸다. 몇 달 사이에 큰돈을 벌었다. 그런데 서울 청계4가 우래옥 근처의 큰 기와집을 사려고 했던 큰돈은 화폐개혁으로 하루아침에 휴지조각이 되어버렸다. 1953년 2월의 일이다.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미술공부를 다시 하기로 했다.

누상동에 있는 홍익대로 찾아가서 2학년으로 편입을 했다. 간단한 실기 테스트가 있었는데 평양미술대학에서 인체 데생의 기초를 잘 다졌기에 쉽게 통과했다. 당시 홍익대에는 서양화의 이종우, 김환기, 이봉상, 동양화의 이상범, 조각의 윤효중, 판화 및 염색공예의 유강렬 등이 교수로 있었다. 이 외에도 주경, 유영국, 한묵, 손응성, 김영주, 이응로 등이 강사로 나와 실기를 지도했다. 미술사는 이경성, 최순우 등이 강의했다. 이종우(1899~1979)는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프랑스를 유학한 화가였다. 이종우는 황용엽의 백부와 평양고보 동기였다. 친자식처럼 따뜻하게 황용엽을 맞아주었다.

다시 미대 학생이 되고 나니 생활이 막연해졌다. 인천에서의 경험을 살려 미군들의 초상화를 그리기로 했다. 임시 군속 신분증을 만들어 전방의 미군 부대를 출입했다. 문산, 포천, 일동, 이동, 봉일천 등 서부전선의 미군 부대를 거의 다 찾았다. PX에 들어가 현장에서 초상화를 그리거나 그들이 건네주는 사진을 가져와서는 벨벳 천 위에다 초상화를 그렸다. 천이 가볍고 부드러워 몇장이고 둘둘 말아다가 이동할 수가 있었다.

홍대 미대 3학년 때 국전에 출품하여 입선했는데 4학년 때는 낙선을 했다. 마침 평소 그를 잘 돌봐주던 이종우 교수가 심사했는데 그는 황용엽이 도대체 뭘 그렸는지를 잘 모르겠다고 했다. 그만큼 작품의 개성이 강했다. 이종우는 황용엽을 아껴 장학금을 주는 미국유학을 독려했다. 유학은 포기했다.

1957년 홍대를 졸업한 후 인천고등학교에 부임했다. 2년 후 서울의 보성여고로 옮겨 3년간 근무한 후 그만두었다. 1964년 친구 둘과 함께 퇴계로에 삼청미술연구소라는 미술학원을 열었다. 미술학원은 청진동으로 이어지며 오랫동안 지속하였다. 함흥 출신의 장성순(1927~2021)과 의기투합하며 함께 미술학원을 꾸려나갔다.

숙명여중고에서 미술 교사를 하면서 안정적으로 작업에 매진할 수가 있었다(1967~1978). 학교가 시내 한가운데에 있어 편했다. 학생들을 위한 미술 실기실도 넓었지만 미술 교사에게 따로 커다란 작업실을 내주었다. 웬만한 대학보다 환경이 나았다. 시청각실이 있어 슬라이드로 유럽의 명화를 감상케 했다. 학생들은 변덕이 심해 어떤 때는 집중하다가 어떤 때는 졸기도 했다. 조는 학생들에게 자도 좋다고 했더니 학생 전원이 다 자 버린 적도 있었다. 야외실기를 한다고 운동장에 풀어놓았더니 학생들은 그림은 안 그리고 삼삼오오 무리 지어 숲속에 숨어 놀고 있었다. 화가 황주리(1957~ )도 그들 중의 한 명이었다. 학생을 찾으러 다니는 미술 교사 황용엽의 모습은 느긋했다. 자도 놀아도 뭐라고 야단치지 않았다. 홍대의 스승인 김환기, 유영국이 자유로운 분위기로 수업을 이끌었던 것처럼 황용엽도 학생들에게 너그러웠다.

숙명여중고에서 가까운 한국문화예술진흥원 미술회관에서 연달아 전시를 했다(1974~1978). 미술회관은 조계사 맞은편에 있었다. 목조 이층 건물이었다. 삐거덕대는 계단을 오르면 전시장이 나타났다. 신문회관에서 열린 제2회 개인전에 이어 여기서도 ‘인간’ 시리즈를 전시했다. 신체가 기하학적인 형태로 요약되고 환원되어 반복적인 선묘로 표현된 인간의 형상이었다. 판에 박힌 듯한 인물화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낯선 그림이었다.

학생들 수업 시간 자거나 놀아도 놔둬

‘인간’, 캔버스에 아크릴릭, 114x90㎝, 1979년. [사진 동산방화랑]

‘인간’, 캔버스에 아크릴릭, 114x90㎝, 1979년. [사진 동산방화랑]

한국 현대미술을 이끌었던 명동 화랑의 김문호 대표는 황용엽을 좋아했다. 그의 소개로 동산방화랑에서 연달아 세 번 전시를 열었다(1979~1981). 동산방화랑의 박주환 대표는 화랑의 몫을 떼지 않고 팔린 몇 점의 그림값 전부를 황용엽에게 주었다. 훗날 알고 보니 팔렸다고 한 그림들은 손님들이 사 간 게 아니라 화랑 대표가 개인적으로 컬렉션을 한 것이었다. 황용엽은 두고두고 이를 고마워했다.

황용엽의 냉면 사랑은 각별하다. 평양 시절의 유모는 평양역 앞의 시장에서 쌀장사를 했다. 공출하고 남은 쌀을 암시장에서 거래했다. 쌀 가게 근처에는 냉면 골목이 있었다. 열 개 정도의 냉면 가게가 줄지어 있었다. 물냉면만 팔았다. 유모를 만나러 갈 때마다 냉면을 먹었다. 서울에 정착하고 나서도 냉면 순례는 이어졌다. 을지로의 을지면옥과 우래옥, 필동의 필동면옥, 장충동의 평양면옥, 빈대떡이 맛있는 남대문 시장의 부원면옥을 다니며 평양냉면을 즐겼다. 평양냉면을 좋아하는 사람은 대체로 함흥냉면을 멀리한다. 평양에서 자란 황용엽은 함흥냉면이란 걸 서울에서 처음 먹어보았다. 메밀 면이 아닌 고구마 혹은 감자 전분으로 만든 면에다 명태나 가자미 회를 올린 게 신기했다. 맛있었다. 황용엽은 함흥냉면 가게가 모여있는 오장동도 자주 찾았다.

황용엽과 오랜 인연인 장성순은 함흥 출신임에도 함흥냉면을 먹지 않았다. 한반도에서 몇 손가락에 꼽을 정도의 부잣집 아들이었던 그는 함흥냉면은 뱃사람들이 먹는 음식이라고 멀리했다. 둘은 그들이 운영하던 미술학원과 가까웠던 신신백화점 뒤편의 초밥집을 자주 찾았다.

황용엽의 호는 우산(又山)이다. 산 너머 또 산의 삶이란 뜻이다. 선을 그어도 또 더 그어야 할 만큼 절박함을 담은 그의 그림처럼 파란만장의 삶이었다.

황인 미술평론가. 미술평론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전시기획과 공학과 미술을 융합하는 학제 간 연구를 병행하고 있다. 1980년대 후반 현대화랑에서 일하면서 지금은 거의 작고한 대표적 화가들을 많이 만났다. 문학·무용·음악 등 다른 장르의 문화인들과도 교유를 확장해 나갔다. 골목기행과 홍대 앞 게릴라 문화를 즐기며 가성비가 높은 중저가 음식을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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