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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 수리하다 조각에 눈뜬 문신, 바지락 먹고 미각 키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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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1호 24면

예술가의 한끼 

1983년 11월 서울 신세계화랑에서 열릴 개인전을 준비하는 문신. 서울 이태원에 위치한 아틀리에에서.

1983년 11월 서울 신세계화랑에서 열릴 개인전을 준비하는 문신. 서울 이태원에 위치한 아틀리에에서.

“이 격렬한 인간을 말하려 보니 나는 말의 빈곤을 느낀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인가’ 그것부터가 문제이다.” (이병주, 문신의 인간과 예술, 예화랑 개인전 서문, 1986년)

격렬한 인간 문신(1922~1995)은 일본 규슈 사가현 다케오의 탄광지대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문안신(文安信)이다. 문신의 아버지는 다케오에서 일본 여자를 만났고 문신의 형과 문신이 태어났다. 잉어낚시를 즐긴 문신의 아버지는 다케오의 낚시터로 가끔 문신을 데리고 갔다. 어린 문신은 비릿한 잉어 냄새를 맡고 자랐다.

해방 후 마산중학교서 교편 잡기도

올림픽-화합, 25m, 1988년, 올림픽 조각공원, 서울.

올림픽-화합, 25m, 1988년, 올림픽 조각공원, 서울.

문신이 부친과 함께 처음으로 마산을 온 건 그의 나이 여섯 살 때였다. 마산 오동동에 사는 그의 할머니가 문신을 반겼다. 이듬해 형이 어머니와 함께 마산으로 왔다. 그들은 오동동 소전(우시장) 거리 옆에서 살았다. 어머니는 뜨개질로 생계를 꾸렸다. 어머니는 오동동의 갈밭샘 앞바다로 나가 바지락을 캤다. 캔 바지락은 갈밭샘 우물로 가져와 씻었다. “긴 여름날이면 어머님은 나와 같이 갈밭샘 앞 바닷가에서 바지락을 캐기에 종일을 소일한다. 모래를 끌어모아 사람도 만들고 집도 짓고 조개껍데기를 주워 모아 기와집인 양 얹어보는 등 하면 해가 어느새 서산에 기우는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문신 회고록 『돌아본 그 시절』에서)

마산사람들은 바지락을 개발이라 한다. 배를 타고 가는 마산 앞바다의 구실에도, 마산 앞바다의 자그마한 섬인 돝섬에도 개발이 많았다. 마산 시내의 갈밭샘 앞바다에도 개발이 지천이었다. 아낙들은 호미로 개발을 캐내었다. 개발에 무, 대파, 고추를 넣어 시원한 국을 끓일 수도 있다. 봄에는 향긋한 냄새를 피워올리는 정구지(부추)를 뜯어다 개발을 넣어 전을 부쳐 먹었다. 그 맛이 일품이었다. 어린 문신의 미각을 키워줬다. 불종거리에서 구마산역으로 통하는 길목은 겨울이면 대구를 말리는 넓은 덕장이 있었다. 마산사람들은 대구를 꾸덕꾸덕하게 말려 겨우내 먹었다. 바닷바람이 불어오는 밤이면 대구의 인광이 어두운 길을 찾아다니며 빛을 뿜어내었다. 어머니와의 마산 생활은 짧았다. 문신의 어머니는 곧 일본으로 떠났다. 그 길로 자식들과는 영영 이별이었다. 어린 문신은 혼자서 갈밭샘 앞바다의 모래밭으로 가서 놀았다.

문신은 집에서 가까운 성호국민학교를 다녔다. 또래 아이들보다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서너 살은 더 성숙했다. 몸의 근육도 머릿속의 근육도 울퉁불퉁했다. 큰 키는 아니나 가슴이 두툼한 남미형의 단단한 몸매는 이때 이미 틀을 갖추었다. 자전거를 타고 술통 배달을 하는 등 집안일을 도왔다. 국민학교를 졸업할 무렵에는 화방의 보조원으로 일하며 미술 재료의 기본을 익혔다. 그림을 그리며 액자도 만들고 광목을 사다가 아교를 칠해 캔버스를 만들었다. 이윽고 그 화방을 인수하게 되었다. 극장 공락관(나중에 시민극장으로 이름이 바뀜)의 간판도 그렸다. 문신이 그린 영화 간판은 인기가 많았다. 신문배달원의 한 달 수입이 3원일 때 영화 간판 하나를 그리면 15원이 손에 쥐어졌다. 돈도 제법 모았다.

숙명여자대학교 내 문신미술관.

숙명여자대학교 내 문신미술관.

소년은 일본행을 결심했다. 그의 나이 17세가 되던 1938년이었다. 이듬해부터 도쿄의 일본미술학교 양화과를 다녔다. 학교는 와세다대학이 가까운 니시와세다에 있었다. 해방이 되던 해 청년 문신은 마산으로 돌아왔다. 6년제 마산중학교(현재의 마산중고등학교)의 일본인 미술 교사들은 본국으로 돌아갔다. 그 자리를 한국인 미술 교사들이 메웠다. 오사카 미술학교 출신의 임호(1918~1974)가 있는 마산중학교에 문신도 자리를 잡았다. 문신의 미술 교사 생활은 길지 않았다.

문신의 아틀리에는 추산동 언덕배기의 화원(花園)에 있었다. 이때까지는 문신은 조각가가 아닌 화가였다. 여기에 어린 미술학도들이 꽤 드나들었다. 마산중학교를 다니던 화가 정상화(1932~ )는 마산중학교에서 잠시 문신에게서 배웠다. 사생하러 다니다가 화원을 기웃거렸다. 문신은 액자를 잘 만들었다. 자신이 그린 그림의 액자는 자신이 직접 만들었다. 문신이 그린 그림에는 문신이 직접 만든 액자가 붙어 있어야 제대로 완성된 문신의 작품이 된다. 고교를 졸업할 무렵 정상화는 문신을 따라 액자를 한 점 만들어 보기도 했다. 문신과 정상화는 나중에는 사제지간을 넘어서서 예술적 동지가 되었다. 정상화가 처음 파리에 정착했을 때 문신의 아르바이트를 잠시 하는 것으로 둘의 관계는 연속적이었다.

해방 후 지방에서 열린 최초의 종합미술전이라 할 수 있는 ‘제1회 미술전람회’가 1947년 6월 28일부터 7월 4일까지 마산 남성동의 마산백화점 2층, 3층에서 열렸다. 김기창, 윤자선, 박래현, 정종녀, 최재덕, 이순종(이상 서울), 우신출, 서성찬, 김종식, 양달석(이상 부산), 김종영(창원), 임호, 이림, 문신, 이준, 이수홍, 최운, 안윤봉(이상 마산) 등이 출품했다. 마산에서 활동하던 이림, 임호, 문신, 이수홍, 이준 등이 이 전시를 주도했다. 문신은 1948년 서울의 동화화랑(현 신세계백화점)에서 100여점의 회화작품으로 제1회 개인전을 열었다. 한국전쟁 전후의 마산에는 예술인들이 많이 몰려 살았다. 시인 김춘수, 김남조, 조각가 김세중, 소설가 이병주, 화가 최영림, 전혁림, 강신석 등이 문신과 시기를 조금씩 겹치면서 살았다.

이병주 “파리 아틀리에 방문하고 충격”

우주를 향하여, 280x120x120cm, 스테인리스강, 1985년. [사진 숙명여대 문신미술관]

우주를 향하여, 280x120x120cm, 스테인리스강, 1985년. [사진 숙명여대 문신미술관]

마산과 서울을 오가며 활동하던 문신은 1961년에 1차 도불(渡佛)했다. 파리에 도착하니 수중에 50달러밖에 없었다. 엿새를 굶었다. 화가 이응로의 도움으로 기아는 면했다. 밥벌이를 위해 석공이 됐다. 파리에 먼저 와서 정착해 있던 화가 김흥수의 도움으로 라브넬 고성(古城)의 보수와 개조 작업 일을 얻었다. 이 일을 하면서 자신의 역량이 조각에 더 뛰어나다는 것을 깨치게 됐다. 화가에서 조각가로 변모했다. 1965년에 귀국하여 홍익대 미술대학에서 강의했다. 1968년에 제2차 도불을 하여 파리에 정착했다. 1970년 남불의 포르 발카레스(Port Barcares) 국제조각심포지엄에 13m 높이의 나무조각 ‘태양의 사자’를 출품하여 세계적인 반열의 조각가로 부상하게 된다. 그는 허름한 헛간 같은 데서 작업을 하며 살았다. 마산 시절의 친구 소설가 이병주가 이 장면을 기록하고 있다.

“1980년 4월의 어느 날 나는 파리의 교외(郊外)에 있는 문신(文信)의 아틀리에를 방문했다. 내게 있어서 그것은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13~14호쯤의 농가가 들판 한가운데 조그만한 못(池)을 끼고 봄볕 아래 졸고 있는 듯한 농촌이었는데 문신은 그곳 어느 농가의 창고라고 하기보단 헛간 같은 델 상하로 질러 2층으로 만들어 거처하고 있었다. 1층은 우리 시골의 대장간을 닮은 작업장이었다. 연마기 같은 것이 한구석에 있고 비좁은 공간엔 작업 도중의 대소(大小) 미완성작품과 공구들이 꽉 차 있었다. 통나무로 만든 계단을 4, 5단 오르니 그곳이 거실이었는데, 탁자를 비롯한 모든 조도(調度)가 문신 자신이 만든 작품들이었고 이것저것이 산란해 있어 비집고 앉기가 겨우였다. 여류화가이며 드물게 보는 미인인 부인 최성숙씨가 있었기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더라면 삭막하고 잡다해서 견딜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는 세계적인 작가가 되어 금의환향했다. 마산에는 문신미술관이 들어섰다. 88서울올림픽 때 세운 대형조각 ‘올림픽-화합’은 지금도 큰 감동을 준다. 흔히 문신의 조각을 시메트리(대칭)의 조각이라 한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애시메트리(비대칭)의 조각이다. 형태의 반복성이 만든 질서정연한 시계열의 대칭축 반대편에서 다른 질서의 시계열이 간섭하고 있다. 그건 생명의 탄생, 성장, 진화의 원리를 닮았다. 생명의 원리대로 살다 간 격렬한 인간 문신은 육신의 활동을 멈추었다. 바지락을 캐던 갈밭샘 앞바다의 모래밭도, 바지락을 씻던 갈밭샘도 사라졌다. 이 모두를 품은 문신의 귀한 작품들이 오늘도 힘차게 숨을 쉬고 있다.

황인 미술평론가. 미술평론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전시기획과 공학과 미술을 융합하는 학제 간 연구를 병행하고 있다. 1980년대 후반 현대화랑에서 일하면서 지금은 거의 작고한 대표적 화가들을 많이 만났다. 문학·무용·음악 등 다른 장르의 문화인들과도 교유를 확장해 나갔다. 골목기행과 홍대 앞 게릴라 문화를 즐기며 가성비가 높은 중저가 음식을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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