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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예영준 논설위원이 간다

평화헌법 개정, 아베 필생의 과업 사후에 이뤄지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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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예영준 기자 중앙일보
예영준 논설위원

예영준 논설위원

 아베 신조(安倍晉三)  전 총리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비운의 최후를 맞은 뒤 지난 10일 치러진 참의원 선거에서 집권 자민당이 압승을 거뒀다. 사전 예상대로이긴 하지만, 아베의 비운이 보수 세력을 결집시켜 표차를 더 크게 벌렸을 것이란 분석이 유력하다. 이로써 자민당을 포함, 개헌에 찬성하는 네 정당의 의석수를 합하면 중의원과 참의원 모두 개헌안 발의 요건인 3분의 2를 여유있게 넘어섰다.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총리는 “아베 전 총리의 뜻을 이어받아 가능한 한 빨리 개헌안을 발의해 국민투표로 연결하겠다”고 공언했다. 정치인 아베의 염원이 과연 그의 사후 실현될 것인가.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생전인 2018년 10월 사이타마 현의 한 부대에서 육상자위대 부대를 사열하고 있다.  [교도=연합]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생전인 2018년 10월 사이타마 현의 한 부대에서 육상자위대 부대를 사열하고 있다. [교도=연합]

아베의 개헌 집념과 현실주의
2015년 3월 일본 국회에서 작은 소동이 일어났다. 참의원 예산위원회에 출석한 아베 총리가 답변 도중 “우리 군(軍)의 투명성을 높여…”라고 발언한 것이다. 일본은 명목상 군대가 없는 나라다. 막강 전력에도 불구하고 자위대는 자위대이지 군대가 아니다. 군대 보유를 금한 일본 헌법 9조 2항 때문이다. 야당의 반박에 부딪힌 아베가 “이런 논란에 시간 뺏기지 않겠다. 앞으로 (그런 표현을) 사용하지 않겠다”고 해 소동은 끝났지만, 정치 입문 이래 헌법개정을 필생의 과업으로 삼아왔던 아베의 본심이 드러난 발언임엔 틀림없었다. 헌법 개정은 아베가 내건 ‘전후 체제로부터의 탈각(脫殼)’을 완성하고 일본을 보통국가로 거듭나게 하는 마지막 관문이다. 2020년 지병으로 총리직에서 스스로 내려온 아베가 “헌법개정을 목표로 하는 와중에 그만두게 돼 단장(斷腸)의 심정”이라고 한 데서 그의 염원을 읽을 수 있다. 한때 아베 총리의 휘하에서 일했던 관료는 “3연임에 성공한 아베 전 총리는 마지막 임기내에 ^헌법 개정 ^납북자 문제 해결 ^러시아와의 영토문제 해결을 3대 목표로 삼았는데 그 중 개헌이 최우선이었다”고 회고했다.

제정후 75년만에 처음으로 가시권에 들어온 일본 개헌 #1993년 오자와의 '보통국가론' 이은 아베의 '전후탈각론' #보통국가 완성 이은 군사 대국화는 동북아 정세 뒤흔들 듯

☞평화헌법 9조 【전쟁 포기, 전력 및 교전권 부인】

① 일본 국민은 정의와 질서를 기조로 하는 국제 평화를 성실히 바라고 희구하며, 국제 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으로써 국권의 발동인 전쟁과 무력에 의한 위협 또는 무력 행사를 영구히 포기한다.

② 앞 항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육ㆍ해ㆍ공군, 그 밖의 전력을 보유하지 않는다. 국가 교전권은 인정하지 않는다.

사실 헌법개정을 제기한 사람은 아베가 처음이 아니다. 전력보유금지 조항을 삭제하고 명실상부한 군대를 보유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 헌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것은 모든 일본 보수주의자들의 오랜 꿈이었다. 개헌론자들에게 9조 2항은 ‘군이냐 자위대냐’의 호칭 문제가 아니라 보통국가로 가는 걸림돌을 제거하는 문제다. 멀리는 1950년대의 하토야마 이치로(鳩山一郞), 1980년대의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등이 개헌론을 피력했으나 말 그대로 소신에 그쳤지 행동으로 옮기지는 못했다. 정계 실력자 오자와 이치로(小澤一郞) 가 자민당 간사장 시절인 1993년 저서 『일본개조계획』에서 주창한 보통국가론도 큰 반향을 일으키긴 했으나 개헌을 정치과제로 실행하지는 못했다.
아베는 달랐다. 그는 1993년 정치 입문 이래 자신의 소신을 지속적으로 주장했고 정계 중진으로 올라서면서부터는 본격적인 정치 아젠다로 제시했다. 다만 일을 서두르지는 않았다. 2017년 공표한 그의 개헌 방침에는 눈여겨봐야 할 부분이 있다. 아베는 ‘평화헌법’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9조 1항과 2항은 손대지 않고 대신 ‘일본을 방위하기 위한 필요 최소한도의 실력조직’으로 자위대를 명기한다는 방안을 내세웠다. 이 방안은 이번 참의원 선거에서도 공약으로 채택됐다. 그런데 이 때 나온 아베의 방침은 기존의 자민당 개헌안에 비해서도 상당히 물러선 안이다. 2012년 자민당이 조문 형식으로 완성해 발표한 개헌 초안은 9조 2항을 삭제하고 대신 ‘국방군’을 둔다는 조항을 명기했다. 아베와 총리직을 놓고 경선을 벌였던 이시바 시게루의 개헌안도 9조 2항을 삭제했다. 이에 비해 아베의 안은 9조 2항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호헌(護憲)세력의 입장과, ‘군’이란 표현에 알레르기 반응이 적지 않은 여론 등을 감안해 일본 국민이 가장 거부감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방안을 선택한 타협안으로 해석된다. 자위대에 합헌적 지위를 부여할 수만 있다면 군이란 명칭에 집착하지 않아도 된다는 현실적 방안을 선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완고한 이데올로기의 소유자인 동시에 이해득실을 따져가며 현실 상황에 맞게 행동하는 리얼리스트인 아베의 면모가 읽힌다. 일본정치 연구의 권위자 제럴드 커티스 컬럼비아대 교수가 ‘포린 어페어즈’에 발표한 논문에서 ‘신중한 매파’로 표현한 게 딱 들어맞는 장면이었다.

개헌 발의선 돌파 후에도 난관은 남아
일본 헌법은 개정 요건이 극히 까다로운 경성(硬性)헌법에 속한다. 헌법개정을 발의하기 위해서는 중의원과 참의원에서 각각 3분의 2의 찬성을 받아야 한다. 현실적으로 대단히 높은 장벽이지만 아베 임기중에 근소한 차이로 3분의 2를 돌파한 데 이어 이번 선거로 여유있게 발의선을 넘기게 됐다.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하지만 발의선 확보가 곧바로 개헌으로 이어지는 건 아니다. ‘개헌 세력’이라 불리는 4개 정당의 입장이 각론에선 제각각 다르다. 특히 공명당은 불교계열의 종교단체를 모태로 하는 정당이어서 평화헌법을 고치는 것 자체에 대한 지지자들의 반발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야당인 국민민주당의 입장도 개헌 자체는 찬성이지만 헌법 9조에 대한 입장은 불확실하다.
국회에서 정당간 이견을 조정하고 개정안을 발의한다고 해도 국민투표를 통과할 수 있을지 여부는 여전히 불확실하다. 올해 아사히 신문의 조사에서 개헌 찬성 비율이 53%로 나오는 등 시간이 갈수록 개헌 찬성 의견이 높아지고 있지만, 아직은 압도적으로 많다고 볼 수 없고 호헌 여론도 여전히 만만치 않다. 만일 국민투표에서 부결되기라도 하면 발의를 추진한 총리는 자리를 내려놓아야 할 위기에 몰릴 수 있다. 기시다가 참의원 선거 직후 아베의 뜻을 잇겠다는 뜻을 밝히긴 했지만 얼마나 서두를지는 예단할 수 없다.
아직 얼마나 더 많은 시간이 걸릴지는 알 수 없지만 일본의 헌법 개정이 이번 참의원 선거 결과로 인해 비로소 가시권에 들어오기 시작했다는 것만은 틀림이 없다. 1947년 시행 후 75년동안 한 번도 고쳐진 적이 없어 ‘불마(不磨)의 대전(大典)’으로 불려 온 것이 평화헌법이다. 1993년 보통국가론의 제기를 기점으로 따지면 3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났다. 그만큼 먼 길을 거쳐 이 상황에까지 왔다고 할 수 있다.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널리 알려진대로 일본 헌법에 전력 보유 금지 조항이 들어가게 된 것은 2차 대전 승전국으로 일본을 점령 통치했던 맥아더 사령부에 의해 현행 헌법의 뼈대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전범국가인 일본의 재무장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현행 헌법을 ‘외제(外製)헌법’ 또는 ‘강요된 헌법’으로 비판하는 사람이 간혹 나오는 이유다. 하지만 당시의 일본 주류는 평화헌법을 받아들이고 안보는 미국에 의존하는 대신 국가의 역량을 경제성장에 쏟는 국가 노선을 채택했다. 당시 총리의 이름을 딴 ‘요시다 노선’이다. 따라서 평화헌법을 개정하는 것은 새로운 일본의 국가 노선을 공식화하는 것을 뜻한다.
또한 평화헌법의 개정은 군사력 강화로 이어질 가능성을 동반한다. 그것이 군이 되든 자위대가 되든, 헌법적 지위를 부여받고 난 뒤에는 군사력 강화의 속도가 훨씬 더 빨라질 것임에 틀림없다. 가령 공격용으로 사용될 수 있는 무기 보유는 전수(專修)방위 원칙에 따라 상당한 제약을 받고 있지만 헌법 개정 이후는 사정이 달라질 것이다. 헌법 개정과는 별도로 자민당은 이번 선거에서 방위비를 국내총생산(GDP) 대비 2%로 올린다는 방침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1%에 못 미치는 방위예산을 2025년까지 지금의 두 배 이상인 6조엔가량으로 증액한다는 공약인데, 이 또한 아베가 추진한 방침대로였다. 2%란 숫자는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회원국의 국방예산 비율을 기준으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
일본의 개헌과 보통국가의 완성, 이어지는 군사력 강화는 동북아의 세력 균형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하지만 일본의 개헌은 기본적으로 일본 국민의 선택이다. 또 동맹 강화와 동맹국 역할의 재편을 추진중인 바이든 행정부가 일본의 군사력 강화를 지지하고 있는 것은 한국에 던져진 딜레마라 할 수 있다. 한국은 이웃 국가의 급격한 군사력 강화에 경계를 늦출 수 없는 입장이다. 한ㆍ미ㆍ일 안보협력을 강화하기로 한 입장에서 미국의 후원하에 추진되는 일본의 방위력 증강과 관련해 난처한 입장에 처할 수 있다. 간단한 1차 방정식으로는 풀 수 없는 상황이 다가오고 있다는 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