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파 문전박대 뚫었다, 끝내 명품 와인 탄생시킨 '한국 어르신'

중앙일보

입력 2022.07.12 02:00

업데이트 2022.07.12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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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이달 초, 미국 와인 생산의 중심지인 캘리포니아주 나파밸리가 크게 술렁였다. 나파밸리 와인의 상징과도 같은 ‘조셉 펠프스 빈야드’가 세계 최대 명품그룹 LVMH(루이비통모에헤네시)에 매각됐기 때문이다.

[와이드 인터뷰] 이희상 다나에스테이트 회장 #수입상 운영하다 2004년 美 나파에 부지 매입 #포도나무 개별 관리하고, 새벽에 손으로 수확 #최고급 와인 ‘다나’는 연 3000병만 한정 생산 #로버트 파커도, 제임스 서클링도 “100점 와인”

최근 10년 사이 로버트 몬다비, 조셉 펠프스, 존 셰이퍼 등 1960~70년대 나파밸리의 선구자들이 세상을 뜨고 후손들은 하나둘 와이너리(포도밭과 양조시설)를 팔며 ‘시골’을 떠나고 있다. 나파밸리의 명성 뒤엔 농부들의 고령화와 개척정신 후퇴, 기후변화에 따른 재배환경 악화 등 위기감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제너러서티 리(Generosity Lee)’. 현지 사람들은 그를 이렇게 부른다. 이웃에게 잘 베풀고 너그러워(Generous) 붙은 별명이다. 나파밸리에 온 지 약 20년. 외지인, 특히 동양인에 배타적이던 이곳에서 이희상(77) 회장은 이제 동네 어르신 대접을 받는다.

“여기가 많이 변했어요. 살던 사람들이 자꾸 떠나니까…. 온통 밭밖에 없는 시골인데 젊은 사람들은 재미없지. 이러다 내가 토박이로 불리게 생겼네.(웃음)”

이 회장은 밀가루와 사료 사업을 하던 동아원그룹 회장을 지냈다. 그룹은 2016년 사조그룹에 인수돼 사조동아원으로 바뀌었다. 이 회장은 현재 ‘다나 에스테이트(다나)’ 회장이다. 다나(DANA)는 2004년 나파밸리의 땅을 사들여 2005년 세운 와이너리다. 그의 호 ‘단하(丹霞)’에서 이름을 땄다.

 이희상 회장이 다나 에스테이트 발효실에서 포즈를 취했다. 박낙희 미주중앙일보 기자

이희상 회장이 다나 에스테이트 발효실에서 포즈를 취했다. 박낙희 미주중앙일보 기자

나파밸리 최초의 한국인 소유 와이너리, 와인 평론가들이 꾸준히 99~100점을 주는 와인, 각종 국제행사의 만찬주…. 다나는 와인업계에서 이런 호평을 받는다. 비교적 짧은 시간에 어떻게 명품 와인을 만들어냈을까. 이달 초부터 몇 차례에 걸쳐 화상으로 인터뷰한 이희상 회장은 “이제 한국 식당 어디를 가도 와인이 있고 와인을 즐기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흐뭇하다”며 첫인사를 건넸다.

이 회장은 단순한 와이너리 ‘소유주’가 아니다. 1년에 몇 달을 제외하곤 나파밸리에서 산다. 지금은 나이 탓에 오랜 노동은 어렵지만 몇 년 전까지 일일이 흙을 털어내며 포도를 땄다.

기후변화로 포도 농사가 어렵다던데.
“겨울에 비가 충분히 와야 여름에 산불도 덜 나고, 포도가 빨아들일 지하수도 생기는데 캘리포니아 전체에 가뭄이 너무 심하다. 여기는 4월부터 비가 거의 안 오다가 9월 말, 10월부터 오기 시작한다. 화이트(소비뇽 블랑)는 9월 초, 레드(카베르네 소비뇽)는 9월 말에서 10월까지 비 오기 전에 다 따야 한다.”
헬름스 포도밭의 카베르네 소비뇽 포도. 마야카마스 산기슭에 위치한다. 자갈이 많아 배수가 잘 되고, 이 포도로 빚은 와인은 특유의 흙먼지 향에 고운 타닌(떫은 맛)이 특징이다. 박낙희 미주중앙일보 기자

헬름스 포도밭의 카베르네 소비뇽 포도. 마야카마스 산기슭에 위치한다. 자갈이 많아 배수가 잘 되고, 이 포도로 빚은 와인은 특유의 흙먼지 향에 고운 타닌(떫은 맛)이 특징이다. 박낙희 미주중앙일보 기자

왜 미국까지 와서 와인을 만드나.
“한국에서 90년대에 와인 수입사(나라셀라)를 하다 보니 자주 나파를 오갔다. 한 번 최고 와인을 만들어보자 싶었다. 취하려고 먹는 게 아니라 좋은 술을 나눠마시려고 모이고, 그러다 보면 지인과 친구도 많아지고…. 와인의 매력이 좋았다.”
‘나파살이’는 어떤가.  
“(현지인의) 마음 얻기가 너무 어려웠다. 그때만 해도 한국 하면 한국전쟁과 북한 핵실험만 떠올리던 때라 선입견도 심했다. 심지어 처음 물꼬를 튼 조셉 펠프스도 홍콩이나 인도는 가면서 서울은 (전쟁 날지 모른다고) 안 오더라. 나파밸리에서 ‘살아있는 전설’로 존경받는 존 셰이퍼도 문전박대하며 만나주질 않았다.”

이 회장은 한국인 특유의 끈기와 친절로 수년간 나파 주민들을 찾아다니며 인사했다. 문 앞에 선물도 놓고 오고, 동네 식당에서 만나면 그 손주들에게 맛있는 것도 사 줘가며 정성을 들였다. 그런 ‘정(情)’이 나파밸리의 근간인 ‘기부 문화’와 통하면서 조금씩 마을의 일원으로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이 회장은 “나중엔 셰이퍼 씨와 제일 친했다. 내가 부탁하니까 아들 줄 와인을 날 주더라”며 그를 회상했다.

와인메이커 크리스 쿠니(왼쪽)와 함께 포도밭을 둘러보고 있는 이희상 회장. 박낙희 미주중앙일보 기자

와인메이커 크리스 쿠니(왼쪽)와 함께 포도밭을 둘러보고 있는 이희상 회장. 박낙희 미주중앙일보 기자

헬름스 포도밭의 모습. 박낙희 미주중앙일보 기자

헬름스 포도밭의 모습. 박낙희 미주중앙일보 기자

정만큼 중요한 건 ‘장인정신’이었다. 다나 와이너리는 현지인들도 감탄할 만큼 정성을 들이는 곳이다. 다나엔 헬름스·크리스털·로터스·허쉬 4개의 포도밭이 있다. 포도는 모두 유기농법으로 재배되고, 나무 하나하나에 수분량을 알려주는 센서를 달아 개별 관리를 한다. 수확할 때는 이른 새벽 100% 손으로 따는 데, 가장 잘 익은 포도만 골라 개별 수확한다. 이렇게 고른 포도를 또 한 번 선별해 최상급 15%의 포도만으로 와인을 만든다.

다나는 나파밸리에서 유일하게 포도밭마다 서로 다른 발효 시설을 쓴다. 포도의 특성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서다. 이렇게 발효한 와인을 프랑스산 오크통에 넣어 18~24개월 클래식 음악을 들려주며 숙성시킨다.

다나 에스테이트에선 와인통을 위로 쌓지 않는다. 지게차로 옮기는 등 와인통을 많이 이동시키지 않고 와인을 최대한 편안한 환경에서 숙성시키는 게 좋다고 믿기 때문이다. [사진 준초이 작가]

다나 에스테이트에선 와인통을 위로 쌓지 않는다. 지게차로 옮기는 등 와인통을 많이 이동시키지 않고 와인을 최대한 편안한 환경에서 숙성시키는 게 좋다고 믿기 때문이다. [사진 준초이 작가]

지성이면 감천이란 말은 나파에서도 통했다. 본격적으로 와인을 만든 지 3년 만에 2007년산 와인이 업계 최고의 권위를 지닌 와인 평론가 로버트 파커로부터 100점을 받더니, 2012년에도 2010년산이 100점을 받았다. 백인들의 자존심으로 똘똘 뭉쳐있던 나파를 들썩이게 했던 ‘사건’이었다.

로버트 파커를 잇는 제임스 서클링 역시 2018~2019년산 다나 와인 전체에 96~100점을 매겼다. 현재 다나 와인은 미국 최고급 레스토랑과 싱가포르항공 1등석 기내식, 각종 국제행사에 제공되고 있다. 지난 5월 한국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 만찬에도 ‘바소 2017년’ 레드와인이 올랐다.

어떤 와인을 만드나.
“‘다나’ ‘온다’ ‘바소’ 세 종류 레드와인이 있다. 연간 생산량이 10만 병밖에 안 된다. 가장 윗급인 다나는 675달러(약 87만원)로 연간 1만 2000병을 한정으로 만들어 미국에서 회원제로 판다. 온다는 250달러(약 32만원)로 1만3000병, 바소는 90달러(약 11만원)로 7만 병씩 만든다. 허쉬밭 제일 산꼭대기 포도로 만드는 화이트 와인도 있는데 1년에 1000병 밖에 못 만들어 미국에서도 구하기 어렵다. 이웃들이 ‘세계 최고의 화이트 와인’이라고 칭찬한다.(웃음)”
시음하기 위해 놓인 다나와인. 박낙희 미주중앙일보 기자

시음하기 위해 놓인 다나와인. 박낙희 미주중앙일보 기자

허쉬 포도밭의 소비뇽 블랑 포도. 화이트와인을 만든다. 해발고도 550m로 다나 포도밭 중 가장 서늘하다. 박낙희 미주중앙일보 기자

허쉬 포도밭의 소비뇽 블랑 포도. 화이트와인을 만든다. 해발고도 550m로 다나 포도밭 중 가장 서늘하다. 박낙희 미주중앙일보 기자

한국에선 잘 보기 힘든 것 같다.
“컬트와인이란 게 워낙 생산량이 적어 대중적인 소매 유통이 어렵고 가격도 20만원 아래가 없다. 하지만 가능한 많은 한국 분들에게 다나 와인을 알리고 싶어서 오직 한국용으로 만든 게 ‘바소’다. 100% 다나 포도밭 포도를 쓰고 라벨엔 연꽃을 그렸다. 바소 생산량을 늘리려고 새로운 포도밭 매입에 투자할 사람들을 모으고 있다.”
좋은 와인은 어떤 와인일까.
“싸고 맛있는 게 제일 좋지.(웃음) 와인은 누구와 먹느냐가 정말 중요하다. 와인을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주량이나 취향을 솔직하게 말하고 추천해달라, 조금만 달라고 하면 된다. 남의 눈치 보느라 받아놓고 남기는 게 오히려 실례다.” 

처음 나파밸리로 간 건 와인이 좋아서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와인이 지닌 ‘문화 외교’의 힘이 상당하다는 걸 깨달았다. 와인은 대중적인 동시에 전 세계 최상류층이 즐기는 술이기도 하다. 와인을 매개로 영향력 있는 인물들에게 한국을 알리고 한국의 입장을 전달할 수 있다는 얘기다.

예컨대 매년 나파밸리 와인 경매 행사엔 전 세계 정치·경제·사회·문화 분야의 유명인들이 자주 모습을 드러낸다. 이 회장은 이 경매에 다나 와인을 내놓고 상품으로 한국 방문을 내걸었다. 그 결과 코로나19 확산 전까지 내로라하는 인물들이 제주와 합천 해인사를 방문해 해녀·사찰 문화 등을 만끽하고 돌아갔다.

이 중엔 빌 게이츠 후임으로 마이크로소프트 이사회 회장이 된 존 톰슨도 있었는데 그는 제주 전복에 반해 매일 시장을 찾았고 “내가 가 본 곳 중에 제주가 최고”라고 극찬했다고 한다.

2004년 이희상 회장이 처음 부지를 매입할 당시 와이너리 모습. 독일인 이민자 H.W 헬름스가 1883년 포도를 심었다가 1920년대 미국에 상업적 와인 제조를 금지하는 금주령이 내려지면서 문을 닫았다. 이후 1976년 미국의 리빙스턴 부부가 이 포도밭에 카베르네 소비뇽 품종을 심어 수확했지만 와인 자체는 다른 곳에서 만들었기 때문에 와이너리는 돌무더기가 쌓인 폐허나 다름없었다. [사진 준초이 작가]

2004년 이희상 회장이 처음 부지를 매입할 당시 와이너리 모습. 독일인 이민자 H.W 헬름스가 1883년 포도를 심었다가 1920년대 미국에 상업적 와인 제조를 금지하는 금주령이 내려지면서 문을 닫았다. 이후 1976년 미국의 리빙스턴 부부가 이 포도밭에 카베르네 소비뇽 품종을 심어 수확했지만 와인 자체는 다른 곳에서 만들었기 때문에 와이너리는 돌무더기가 쌓인 폐허나 다름없었다. [사진 준초이 작가]

오랜 돌벽을 그대로 남기고 새로 태어난 다나 에스테이트 입구. 건축가 하워드 베켄은 1883년이 새겨진 돌벽을 그대로 살려 공간을 설계했다. 박낙희 미주중앙일보 기자

오랜 돌벽을 그대로 남기고 새로 태어난 다나 에스테이트 입구. 건축가 하워드 베켄은 1883년이 새겨진 돌벽을 그대로 살려 공간을 설계했다. 박낙희 미주중앙일보 기자

와이너리도 방문객들이 한국 문화를 경험할 수 있게 공을 들였다. 입구에 들어서면 한옥을 연상케 하는 정원이 펼쳐진다. 손님들이 와인을 맛보는 공간은 한쪽 유리 벽 전체가 한옥의 문처럼 정원을 향해 젖혀지고, 벽엔 신라시대 성덕대왕신종(에밀레종)의 비천상을 복원한 철 부조를 걸었다.

나무 헛간에는 한국 시골의 향수를 물씬 풍기는 대형 장닭 사진이 걸려 있는데, 사진작가 준초이(최명준)의 작품이다. 이 밖에 한국 조각계를 대표하는 이영학 작가의 돌 작품 등이 곳곳에 자리 잡아 동양의 미술관 같은 느낌을 풍긴다.

다나 에스테이트의 시음실. 긴 호두나무 테이블에 연철 샹들리에로 꾸몄다. 커다란 유리문(오른쪽)을 들어 올리면 정원으로 연결되고 벽면엔 성덕대왕신종(에밀레종)의 비천상을 복원한 원광식 명장의 철 부조가 걸려 있다. 박낙희 미주중앙일보 기자

다나 에스테이트의 시음실. 긴 호두나무 테이블에 연철 샹들리에로 꾸몄다. 커다란 유리문(오른쪽)을 들어 올리면 정원으로 연결되고 벽면엔 성덕대왕신종(에밀레종)의 비천상을 복원한 원광식 명장의 철 부조가 걸려 있다. 박낙희 미주중앙일보 기자

목조 헛간앞에 선 이희상 회장. 과거 낡은 창고를 최대한 보수하고 커다란 장닭 사진작품을 걸었다. [사진 준초이 작가]

목조 헛간앞에 선 이희상 회장. 과거 낡은 창고를 최대한 보수하고 커다란 장닭 사진작품을 걸었다. [사진 준초이 작가]

나파에서 자리 잡았지만 남은 고민도 있다. 현재는 미국 문화와 영어 의사소통에 익숙한 사위 전재만(52)씨가 상주하며 대표로서 와이너리 운영 전반을 책임지고 있지만 한 세대 이후엔 누가 이곳을 돌볼지 확신이 없어서다.

고(故) 전두환 전 대통령과 사돈이어서 다나 와인이 등장할 때마다 ‘전두환 와인’이란 논란이 있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이 회장은 “와이너리 지분은 제가 40%, 한국과 미국 투자자들이 각각 30%로 전 대표 지분은 없다”면서 “당국의 조사를 거쳐 혐의를 벗긴 했지만 비자금이 들어갔다는 얘기가 가장 마음이 힘들고 답답하다”고 털어놨다.

그의 목표는 ‘한국인이 와인도 제일 잘 만든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 회장은 “얼마 전 교포 젊은이가 방문한 뒤 ‘부모님의 나라가 너무 자랑스럽다’고 손편지를 보내와서 뭉클했다”며 “나파, 아니 세계 최고의 와인을 만들어 조국에 자부심을 주고 한국에서 칭찬도 받고 싶다”고 말했다.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직원에게 무조건 공손하라’ ‘남들이 비판할수록 더 열심히 하라’는 철학을 늘 되새긴다고 했다.

“사람을 기분좋게 만드는 일(와인 제조)이 참 좋아요. 진심을 다하면 통할 거라고 믿어요. 힘들 때도 많지만 내 갈 길을 가고 있다고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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