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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주정완 논설위원이 간다

3년 만에 꿀 풍년…사라졌던 꿀벌이 돌아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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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주정완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지난 봄 '꿀벌 실종 미스터리'의 현장

5~6월 양봉 농가 분위기 급반전 #"고온저습한 날씨, 최적의 조건" #월동 마친 꿀벌, 흔적 없이 사라져 #39만통, 78억 마리 집단 폐사 추정 #기후변화로 생산 여건 계속 악화 #꿀벌이 보낸 '자연의 경고' 새겨야

주정완 논설위원

주정완 논설위원

지난달 16일 서울 은평구 북한산 자락에 있는 양봉농장. 올해로 양봉 경력 13년째라는 모순철씨의 얼굴에 환한 웃음기가 돌았다. 그는 “3년 만에 찾아온 벌꿀 풍년이다. 내년에도 올해만 같으면 걱정이 없겠다”고 말했다. 모씨가 벌통을 열어 소비(벌판) 한 장을 들어 올렸다. 빽빽이 붙은 벌들이 활발하게 돌아다니며 날개를 펄럭였다. 소비는 벌들이 집을 짓고 알을 낳아 키우는 직사각형 모양의 나무판이다.

 모씨는 강원도 화천과 북한산을 옮겨 다니며 ‘이동 양봉’을 한다. 원래 갖고 있던 벌통은 약 200통이다. 지난겨울을 나고 봄에 벌통을 열어봤더니 50통 정도에서 벌들이 사라졌다. 할 수 없이 남은 150통에서 꿀을 따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벌들이 많아져 이제는 180통 정도가 됐다고 한다. 그는 “올해는 벌꿀 일곱 드럼을 땄다. 월동 꿀벌의 손실로 걱정이 많았는데 한숨 돌렸다”고 전했다. 한 드럼에는 평균 300~350㎏의 벌꿀이 들어간다. 가장 많은 건 아까시꿀이고 단풍나무나 찔레나무 등에서도 꿀을 딴다.

국립농업과학원 최용수(오른쪽) 박사팀이 지난달 16일 서울 은평구 양봉농장에서 현장 조사를 하고 있다. 농장주 모순철씨(가운데)가 벌통을 열어 꿀벌의 상태를 보고 있다. 주정완 기자

국립농업과학원 최용수(오른쪽) 박사팀이 지난달 16일 서울 은평구 양봉농장에서 현장 조사를 하고 있다. 농장주 모순철씨(가운데)가 벌통을 열어 꿀벌의 상태를 보고 있다. 주정완 기자

 이날 국립농업과학원 양봉생태과 최용수 박사 연구팀이 모씨의 농장을 방문했다. 지난 4월부터 진행하는 현장 실태조사다. 연구팀은 월동 꿀벌의 실종 원인을 찾기 위해 전국을 돌아다니고 있다. 이날 농장을 찾은 연구원들이 벌통을 열어 하얀 설탕 가루를 뿌렸다. 그러자 벌들의 날갯짓이 빨라졌다. 벌통에 응애가 얼마나 많은지 조사하는 방법이다. 진드기의 일종인 응애는 꿀벌에 붙어 기생하며 체액을 빨아먹는다. 벌들이 설탕 가루를 털어내려고 온몸을 흔드는 과정에서 응애도 바닥으로 떨어진다. 응애는 꿀벌 농가들이 가장 골치 아파하는 해충이다.

 모씨의 농장은 ‘수벌 유인 포살’이란 친환경 방제법을 사용한다. 벌통 안에 수벌 방을 조성한 뒤 그곳으로 응애를 유인하는 방법이다. 최 박사는 "수벌 방에는 응애가 많았지만 일벌에는 응애가 거의 없었다. 응애 방제에 효과가 있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서울 은평구 모순철씨 양봉농장에서 수벌 방을 분리한 모습. 꿀벌에 기생하는 해충인 응애에 대응하기 위해 '수벌 유인 포살'이란 친환경 방제법을 사용한다. 주정완 기자

서울 은평구 모순철씨 양봉농장에서 수벌 방을 분리한 모습. 꿀벌에 기생하는 해충인 응애에 대응하기 위해 '수벌 유인 포살'이란 친환경 방제법을 사용한다. 주정완 기자

"40년 만에 최고 품질 꿀 얻었다" 

 지난봄 ‘꿀벌 실종 미스터리’가 사회 이슈가 됐다. 수많은 농가에서 꿀벌이 한꺼번에 자취를 감추면서다. 양봉 농가에선 겨울을 날 때 보온을 위해 벌통을 거의 열어보지 않는다. 꿀벌은 온도 변화에 매우 민감한 냉혈동물이다. 겨울에는 여왕벌을 중심으로 단단히 뭉치를 이뤄 집단으로 체온을 유지한다. 그런데 봄이 와서 벌통을 열어봤더니 상당수 농가에서 꿀벌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농림축산식품부 집계에 따르면 전국의 월동 봉군(벌무리) 약 39만 통에서 피해가 발생했다. 한 통에 평균 2만 마리씩, 전체적으로 약 78억 마리가 폐사한 것으로 추산했다. 벌통 안에서 죽은 게 아니기 때문에 꿀벌의 사체도 거의 발견되지 않았다. 꿀벌이 어디론가 날아갔다가 집(벌통)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죽어버린 것으로 보였다. 사체가 없으니 정확한 폐사 원인을 알기도 어려웠다. 국내에서도 꿀벌 실종 현상이 본격화하면서 농작물 생산까지 큰 피해를 줄 수 있다는 긴장감이 흘렀다.

 지난 5~6월 양봉 현장의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졌다. 벌들이 눈에 띄게 건강해지고 움직임도 활발했다고 한다. 벌꿀 생산이 호조를 보이면서 벌의 영양 상태가 좋아진 덕분이다. 김선희 한국양봉협회 경기지회장은 “벌들이 양질의 꿀을 마음껏 먹을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다. 너무 잘 먹어서 술에 취한 것처럼 몸을 주체하지 못하는 벌도 봤다”고 말했다. 그는 “올해는 40년 만에 가장 좋은 품질의 벌꿀을 땄다. 평년에는 벌꿀의 수분 함량이 25% 정도인데 올해는 20% 미만”이라고 소개했다.

 현장에선 꿀 풍년의 '1등 공신'은 기상 조건이라고 설명한다. 김 지회장은 "올봄은 기온이 높으면서 비가 별로 안 왔다. 밭농사 짓는 분들은 가뭄 때문에 속이 탔겠지만 양봉 농가는 좋아서 웃음이 절로 나왔다"고 전했다. 봄에 비가 안 오면 꽃에서 수분이 적은 상태로 꿀이 농축된다. 최 박사는 "양봉은 보통 한 달, 길게 잡아도 두 달 정도를 보는 농업이다. 이때 기상 조건이 좋으면 풍작이지만 기상이 안 좋으면 바로 한 해 농사를 망쳐버린다"고 말했다.

국립농업과학원 연구팀이 벌판을 들어 꿀벌의 움직임과 건강 상태를 자세히 관찰하고 있다. 주정완 기자

국립농업과학원 연구팀이 벌판을 들어 꿀벌의 움직임과 건강 상태를 자세히 관찰하고 있다. 주정완 기자

꿀벌 집단 실종, 아직 원인 몰라

 월동 꿀벌을 집단으로 사라지게 한 '범인'의 정체는 아직도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다. 농촌진흥청은 여러 요인이 한꺼번에 맞물려 돌아가면서 상승 작용을 일으켰다고 보고 있다.

 첫째는 2020년과 지난해 봄 꿀 생산량의 급감이다. 잘 먹어야 건강한 건 사람이나 꿀벌이나 마찬가지다. 꿀이 적으면 꿀벌이 더 많이 돌아다녀야 하므로 체력이 빨리 소진된다. 최 박사는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열심히 움직여야 건강하다고 한다. 반면 꿀벌은 많이 움직일수록 수명이 짧아진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에서도 꿀을 제대로 먹지 못한 벌들의 수명이 줄었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올해는 꿀이 많이 생산됐기 때문에 월동을 위한 걱정거리 중 한 가지는 덜었다"고 덧붙였다.

 둘째는 지난해 초겨울의 이상고온이다. 꿀벌이 월동에 들어가야 하는 시기인데 꽃이 일찍 피어버렸다. 벌통을 나온 벌들이 계절을 잊고 꿀을 따러 돌아다녔다. 그러다 날씨가 쌀쌀해지자 벌들의 체력이 떨어지면서 집에 돌아가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셋째는 응애와 말벌의 괴롭힘이다. 건강한 꿀벌은 응애와 말벌에 견디는 힘도 강하다. 하지만 영양이 부실하면 꿀벌의 면역력이 약해진다. 기존에 사용하던 응애 방제용 약재에 내성이 생겼을 가능성도 있다. 내성이 있는 약재를 사용하면 응애는 못 잡고 벌만 약해진다.

 "꿀벌이 사라지면 인류도 4년 안에 멸망한다"는 말이 있다. 독일의 물리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말이라고 전해지지만 실제로 아인슈타인이 이런 말을 했다는 근거는 없다. 최 박사는 "프랑스 양봉협회에서 만들어낸 말인데 틀린 얘기는 아니다. 미국이 버락 오바마 대통령 시절에 작성한 꿀벌 멸종 시나리오 보고서에도 비슷한 결론이 나온다"고 소개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벌들이 꽃가루를 옮기지 않으면 인류의 식량 생산에 엄청난 차질이 생긴다. 부자들은 재빨리 식량을 선점하겠지만 가난한 사람 중에선 굶어 죽는 인구가 속출한다. 결국 심각한 식량난은 폭동과 전쟁으로 이어지면서 인류가 살 수 없게 된다는 시나리오다.

연구팀이 벌통에 하얀 설탕가루를 뿌려 응애가 얼마나 많은지 조사하고 있다. 벌들이 가루를 털어내려고 온몸을 흔드는 과정에서 응애도 바닥으로 떨어진다. 주정완 기자

연구팀이 벌통에 하얀 설탕가루를 뿌려 응애가 얼마나 많은지 조사하고 있다. 벌들이 가루를 털어내려고 온몸을 흔드는 과정에서 응애도 바닥으로 떨어진다. 주정완 기자

30년간 아까시나무 90% 감소

 양봉은 봄꽃이 피는 시기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꽃이 건강하게 오래 피어 있을수록 좋은 꿀이 많이 나온다. 반면 꽃이 피는 시기가 짧아지면 꿀 생산에 불리하다. 국내에선 장소를 옮겨 다니며 벌을 치는 이동 양봉 농가가 많다. 이들은 가장 먼저 봄꽃이 피는 남쪽에서 시작해 꽃을 따라 북상하면서 꿀을 모은다. 이때 남부와 중부 지방에서 봄꽃이 피는 간격이 얼마나 되느냐가 꿀 생산에 중요한 변수다. 한 곳에서 충분히 꿀을 딴 뒤 다른 곳으로 옮기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김 지회장은 "올해는 꽃이 벌을 기다려주는 것처럼 천천히 북상하면서 순서대로 피었다"고 말했다.

 국내에서 꿀 생산 여건은 갈수록 나빠지고 있다. 올해 같은 꿀 풍년은 예외적인 경우다. 양봉 농가들은 기후변화로 인해 지역별 봄꽃이 피는 간격이 짧아지고 있다고 어려움을 호소한다. 산림청에 따르면 예년에는 남부와 중부 지방에서 아까시꽃이 피는 시기에 한 달가량 간격이 있었다. 2016년에는 이 간격이 10~15일로 축소됐다. 국내 벌꿀 생산량의 약 70%는 아까시꿀이다. 김 지회장은 "어떤 해는 전국에서 거의 동시다발로 꽃이 피기도 했다"고 전했다.

 꽃 피는 시기의 변화는 벌꿀 생산량에 직격탄을 날렸다. 2015년 이전만 해도 연간 2만t 이상이던 벌꿀 생산량은 2016년 이후 연간 1만t 수준으로 반 토막이 났다. 2019년에는 일시적으로 2만t 이상을 회복했지만 2020년에는 5000t까지 급감했다. 산에서 아까시나무가 빠르게 사라지는 것도 꿀벌의 생태를 위협하는 요소다. 농진청에 따르면 아까시나무의 분포 면적은 1980년대 36만㏊에서 2010년대 3만6000㏊로 줄었다. 지난 30년간 국내 아까시나무의 90%가량이 사라진 셈이다.

 유엔 식량농업기구(FAO)에 따르면 전 세계 식량의 90%를 100여 종의 농작물이 공급한다. 이런 농작물의 71%는 꿀벌이 꽃가루를 옮겨주는 덕분에 열매를 맺는다. 미국에선 2006년 '군집 붕괴 현상(CCD)'이란 이름으로 꿀벌의 집단 실종이 처음으로 보고됐다. 올봄 꿀벌 실종 사건은 국내에서도 안심할 상황이 아니라는 '자연의 경고'로 풀이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