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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경율이 고발한다

인혁당 사태 풀 의지·실력 없던 文정부, 한동훈 몸값만 높였다

중앙일보

입력

김경율 회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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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훈 법무무 장관과 문재인 대통령. 그래픽=차준홍 기자

한동훈 법무무 장관과 문재인 대통령. 그래픽=차준홍 기자

문재인 정부 시절 청와대 인사와 종종 만났던 기억이 있다. 대개 사적인 인연을 바탕으로 한 부담 없는 자리였으나 문 정부에 대해 점차 비판 수위를 높여가는 나를 향한 노골적인 경고를 비롯해 다양한 사회적 이슈가 늘 화제에 올랐다. 그중 하나가 박정희 정권 시절 벌어진 인민혁명당(인혁당) 피해자 배상금 반환 사건이었다.

이 얘기에 앞서 간략하게 인혁당 사건을 살펴보면, 1975년 4월 8일 대법원 판결이 나온 바로 다음 날 사형 판결을 받은 8명의 사형을 집행했다. 징역 20년형을 받은 이창복씨는 8년간의 수형생활을 마치고 1982년 석방됐다. 그런데 김대중 정부 시절인 2002년 9월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인혁당 사건은 중앙정보부 조작이라고 발표하고, 노무현 정부 때인 2005년 국정원 과거사위도 조작이라고 밝혔다. 이창복씨는 2008년 재심을 청구해 무죄를 받았다. 이듬해 이씨를 비롯해 피해자들은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했고, 이씨는 10억 9000만원의 가지급금(위자료 6억원에 지연손해금 4억9000만원)을 받았다.

대법원 대법정에 앉아 있는 모습의 박시환 전 대법관(가운데). [중앙포토]

대법원 대법정에 앉아 있는 모습의 박시환 전 대법관(가운데). [중앙포토]

여기부터가 문제의 시작이다. 노무현 정부 때 이용훈 대법원장 체제에서 사법개혁을 주도했던 진보성향의 우리법연구회 초대 회장인 박시환 대법관이 2011년 1월 "배상금이 과다 책정됐다"며 판례변경을 했다. 쉽게 말해 불법행위가 벌어진 1975년부터 산정한 지연손해금은 잘못된 것이니 토해내라는 얘기다. 대법원 판결을 토대로 이명박 정부는 2013년 7월 피해자 77명을 상대로 보상금 반환 소송을 제기했다. 부동산 구매 등에 보상금을 모두 쓴 이씨는 돈을 갚지 못했고, 연체이자율이 20%라 나라에 갚아야 할 돈이 원금(4억9000만원) 외에 이자만 9억 6000만원으로 늘었다.

지난 정부 시절 문 대통령은 물론이요 당시 여당은 정치적 해결을 약속했다. 하지만 현실은 2017년 국정원이 이씨 집을 압류하기에 이른다. 2019년 국가인권위원회가 정부가 피해자 구제에 나서라고 주문했고, 2020년 7월 박지원 전 국정원장은 인사청문회에서 "정의롭게 해결하겠다"고 답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박 전 원장은 최근 한 인터뷰에서 "법무부와 검찰이 하지 않았다"며 책임을 떠넘겼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 직전인 지난 2017년 2월 문재인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표(가운데)는 인혁당 사건 당사자와 피해 유가족 등과 함께 영화 '재심'을 관람했다. 김경록 기자

박근혜 대통령 탄핵 직전인 지난 2017년 2월 문재인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표(가운데)는 인혁당 사건 당사자와 피해 유가족 등과 함께 영화 '재심'을 관람했다. 김경록 기자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윤석열 정부가 들어선 후 한동훈 법무부 장관은 이씨가 물어야 할 15억원 중 법원 화해 권고에 따라 5억원만 받고 집 강제경매 절차도 종결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한 장관은 지난달 20일 “법무부는 오직 팩트·상식·정의의 관점에서 국민의 억울함을 해소하려 노력할 것이고, 국민의 억울함을 해소하는 데에 진영논리나 정치논리가 설 자리는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새 정부 취임 한달여 만에 신임 법무부 장관이 해결할 수 있었던 일을 문재인 정부는 왜 5년 동안 못했을까.

이와 관련해 몇몇 대화 장면이 기억난다. 문재인 청와대 사람들은 이 얘기가 나올 때마다 “이미 충분히 검토했는데, 시민사회가 요구하고 피해자가 딱하다고 해서 법원 결정을 정부가 뒤집어 사정을 봐줬다가는 자칫 배임 여지나 직권남용 소지가 있어 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관련 법률을 개정하거나 특별법을 만드는 것 외의 다른 절차나 방법은 없다고도 했다. 국가채권관리법상 국내 채권을 포기할 수 있는 규정이 없기에 대통령이 나서면 법적으로 곤란해진다는 거다. 해결하고픈 마음은 굴뚝같지만 국회 의석 180석과 행정권력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직권남용 우려 탓에 해결할 수 없다는 논리다. 그러면서도 그다지 안타까워하는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청와대가 피해자들에게 설과 추석이면 어김없이 명절 선물을 보내는 등 잘 챙기고 있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런데 한 장관이 이렇게 쉽게 해결한 걸 보면 문 정부는 처음부터 해결할 의지가 없었든지, 아니면 해결할 실력이 없었든지 둘 중 하나일 수밖에 없다. 아니,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르겠다.

문재인 청와대 전체가 연루되다시피 한 울산시장 선거개입 의혹,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이 민정수석 시절 유재수 전 부산시 경제부시장의 비위 의혹 감찰을 부당하게 중단시킨 직권남용혐의, 김학의 전 법무차관 불법 출금 사건 등 내 편의 이권과 안위와 관련해서는 "감히 선출직에 대든다"는 논리로 용감무쌍하게 탈법적 행위를 감행하지 않았나. 그런데 정작 정부가 나서야 할 사건에 대해선 꼬리를 말고 온몸을 비틀면서 소극적으로 나서니 차마 눈 뜨고 보기 민망할 지경이었다. 문재인 청와대 사람들을 만나면 면전에서 이렇게 공박하고 싶었지만 차마 한 번도 그러지 못했다. 일부 친문 성향 언론이 주장하듯이 이미 문재인 정부 때 합의가 이뤄진 걸 한 장관이 발표만 한 거라면 평소 없는 공도 가로채서 자랑하는 사람들이 이번에는 왜 침묵하고 있는지 의문이다.

지난 2012년 민주통합당(현 더불어민주당)이 국회에 마련한 인혁당 관련 행사 모습. [중앙포토]

지난 2012년 민주통합당(현 더불어민주당)이 국회에 마련한 인혁당 관련 행사 모습. [중앙포토]

법률 개정과 관련해서도 할 말이 있다. 거대 의석을 앞세운 입법은 지난 문재인 정부 당시 더불어민주당의 주특기 아니었나.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 같은 내 편을 위한 입법이라면 위장 탈당 등 엽기발랄한 방법까지 동원해 기어이 해내던 이들이 과연 왜 인혁당 피해자를 위해선 이런 과감한 입법 시도를 안 했는지 궁금하다. 민주당은 2020년 정부가 과거사 피해자의 채무를 감면할 수 있는 국가채권관리법 개정안을 발의하긴 했지만 법 개정은 전혀 진전이 없다. 하기야 민주당은 어떤 비판에도 대응할 수 있는 말이 늘 준비되어 있다. “국민의 힘이 협조하지 않았다. ”

그런데 재밌는 건 한 장관은 법률개정 없이 국가채권관리법에 이미 그 근거가 마련되어 있다는 걸 내세워 이 문제를 풀었다. 실력 면에서 과거 문재인 정부와의 확실한 차별성을 드러낸 셈이다. 사실 여러 말이 필요 없다. 이번 인혁당 피해자 사건 처리만 봐도 자칭 진보라는 사람들의 끔찍한 위선과 패악질, 그리고 나라를 제대로 끌어가기에 턱없이 부족한 실력이 그대로 드러난다. 이런 사람들이 지난 5년 동안 이 나라를 쥐락펴락했다니 그저 끔찍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