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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신재용이 고발한다

물가 잡으랬더니, 직장인 월급 잡겠다고? 1970년대 부총리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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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신재용 서울대 경영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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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일 추경호 경제부총리는 6개 경제단체장과의 간담회에서 규제 혁신 얘기를 쏟아냈다. 그러나 불과 한 달만에 기업 임금 문제까지 간섭했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지난달 2일 추경호 경제부총리는 6개 경제단체장과의 간담회에서 규제 혁신 얘기를 쏟아냈다. 그러나 불과 한 달만에 기업 임금 문제까지 간섭했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지난달 28일 추경호 경제부총리가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 회장단과의 조찬 자리에서 "대기업들은 과도한 임금 인상을 자제하고 생산성 향상 범위 내 적정 수준으로 임금을 인상해달라"고 요청했다는 기사를 보는 순간 제 눈을 의심했습니다. 지금이 1970년대 개발독재 시대도 아니거니와 보수 정권 첫 경제부총리가 했으리라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말이었거든요. 기업 규제 철폐를 핵심공약으로 내걸고 출범한 윤석열 정부 아닙니까. 추 부총리가 6개 경제단체장과 처음 만난 지난달 2일 범부처 차원의 과감한 규제 혁파와 법인세 및 가업 상속·기업승계 관련 세제 개편 등을 약속한 지 불과 한 달도 안 된 시점이기도 하고요. 직장인 앱 블라인드만 봐도 알 수 있듯 직장인들은 사뭇 격앙됐습니다. 잡으라는 물가는 안 잡고 월급쟁이만 잡고 있다는 싸늘한 반응입니다.

지난달 29일 직장인 커뮤니티앱 블라인드에 올라온 추경호 경제부총리 관련 글. [블라인드 캡처]

지난달 29일 직장인 커뮤니티앱 블라인드에 올라온 추경호 경제부총리 관련 글. [블라인드 캡처]

정부와 함께 언론도 임금인상이 촉발한 인플레이션이라며 최근 물가상승의 주범을 대기업 임금인상으로 몰아가는 모양새입니다. 정부(혹은 언론)의 논리를 한번 정리해보자면 전 세계적인 가파른 금리 인상,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따른 에너지 및 원자재 가격 상승, 공급망 대란에 물류비용 상승 등으로 경기침체 속 인플레이션 현상이 생기는데, 근로자들은 실질임금 수준 보전을 위해 임금인상 요구를 하지만 실제론 물가를 더 자극해 인플레이션을 악화시킨다는 겁니다. 사실 대기업뿐만이 아닙니다. 최저임금은 진통 끝에 전년 대비 5% 인상된 시간당 9620원으로 결정돼 노사 모두 불만이고, 공무원 노조는 2023년도 임금을 무려 7% 이상 올려달라 요구하고 있습니다. 물론 임금 상승이 물가상승으로 이어진다는 우려는 크게 보면 맞는 얘기입니다. 미국 등 각국 중앙은행들의 연구결과도 이를 지지합니다. 그러나 대기업이 왜 정부의 최우선 타깃이 돼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신규채용은 선이고 임금인상은 악? 

다시 지난달 2일 추 부총리와 경제단체장과의 만남을 돌아보죠. 이날 추 부총리는 주요 기업의 대규모 투자와 채용계획에 대해선 감사를 표했습니다. 이 얘기는 결국 기업의 설비투자나 신규채용은 쌍수를 들어 환영하지만 기존 인력에 대한 임금인상은 곤란하다는 뜻이겠죠. 그러곤 대기업의 임금 인상을 타깃으로 했습니다. 아마 300명 이상 대기업의 1분기 임금이 전년 동기 대비 13.2% 증가했다는 고용노동부 통계를 근거로 삼았을 겁니다. 주요 대기업 인건비가 지난해 1분기 대비 거의 25% 상승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한국만 그런 건 아닙니다. 실리콘밸리 혁신기업을 중심으로 미국 기업의 임금 역시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플레로 인한 한국의 올해 실질임금 감소 폭은 1.8%로 미국(0.6%)이나 일본(0.33%)보다 훨씬 큽니다.

지난달 23일 전국공무원노동조합과 대한민국공무원노동조합총연맹, 한국공무원노동조합이 서울 용산구 대통령실 인근에서 임금인상을 촉구했다. [연합뉴스]

지난달 23일 전국공무원노동조합과 대한민국공무원노동조합총연맹, 한국공무원노동조합이 서울 용산구 대통령실 인근에서 임금인상을 촉구했다. [연합뉴스]

임금 상승이 물가 인상으로 전이되는 정도가 업종이나 기업 특성에 따라 다르다는 점을 생각해봐야 합니다. 아무래도 제조업보다는 서비스업, 경쟁이 치열한 업종보다는 덜 치열한 업종, 재무여력이 있는 기업보다 없는 기업이 인건비 상승을 시장 가격에 전가할 확률이 높습니다. 치열한 경쟁에 직면한 많은 대기업으로선 임금상승을 가격에 전가하는 건 그야말로 최후의 수단일 겁니다. 아마 이익을 일정 부분 희생하고, 그다음 고용을 조정하고, 시급하지 않은 투자를 줄이는 식으로 대응하겠죠. 코로나 19 수혜를 많이 본 국내 제조 대기업들은 인건비 상승을 흡수할 만한 충분한 돈을 비축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이들 기업의 제조원가 70% 가까이 차지하는 건 원자재 구매비용, 즉 재료비입니다. 지난해 역대 최고 실적에 따른 성과급 잔치를 벌인 대기업들의 2022년 1분기 실적을 보면 제조원가 중 인건비 비중은 생각보다 높지 않습니다. 삼성전자는 12%, 임직원에게 영업이익의 10%라는 역대급 성과급을 지급했다는 SK하이닉스도 22% 정도입니다.

인건비 상승은 투자 결과, 내년엔 달라질 것 

대기업 근로자들이 실질 임금 감소를 막기 위해 임금인상을 요구한다는 것도 사실과 다릅니다. 최근 네이버·카카오·쿠팡·배달의 민족 등 IT기업과 넥슨·엔씨소프트·넷마블 등 게임회사의 인건비 상승은 몸값이 금값된 개발자 영입 전쟁에서 기인합니다. IT 인재전쟁은 비단 IT 업종에 국한하지 않습니다. 제조 대기업과 은행 등 금융회사도 유능한 개발자 영입을 위해 노동시장에서 IT 기업들과 치열하게 경쟁합니다. 인재 유치에 사활을 걸면서 신입·경력 가리지 않고 경쟁력 있는 임금과 복리후생을 제공하는 한편, 탁월한 성과에 따른 파격적 보상을 약속합니다. 삼성전자와 경쟁하는 대만 TSMC도 인재유출을 막기 위해 2020년 말 기본급을 20% 인상했습니다. 많은 기업은 이제 인건비를 줄여야만 하는 비용이 아니라 매출과 직결되는 투자로 봅니다. 제조라인이나 생산설비 같은 유형자산이 아니라 인적자원을 회사의 가장 중요한 자원으로 보는 겁니다. 당연히 아끼는 게 능사가 아니게 된 거죠. 지난해 직원 1인당 연봉 1위였던 카카오는 2021년도 1인당 평균 임금이 2018년에 비해 73.5% 증가한 건 맞지만 매출 역시 같은 기간 81.6% 늘었거든요.

평생직장을 기대하기 어렵고 이직이 보편화한 시대입니다. 단기보상을 중시하며 이직을 염두에 두고 몸값을 생각하는 MZ세대 직원들은 회사에 보다 많은 경영성과의 공유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난해 역대급 실적을 낸 대기업들은 인재의 영입·유지에 필수적인 경쟁력 있는 보상을 위해 역대급 성과급으로 화답했습니다. 그게 반영된 결과가 올해 1분기 대기업 임금인상률입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급변하는 현재 경제 상황에서 이미 비상경영체제에 돌입한 대기업들의 내년 성과급은 아마 올해와는 사뭇 다를 겁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5월 제20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취임사를 하고 있다. 이날 취임사에선 '자유'를 강조했다. 김성룡 기자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5월 제20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취임사를 하고 있다. 이날 취임사에선 '자유'를 강조했다. 김성룡 기자

자유 외치면서 기업 팔 비틀기 

사실 대기업이 직원 임금을 올리느냐 마느냐 하는 거보다 현 정부 경제팀이 기업을 보는 인식이 더 걱정스럽습니다. 전 정부와는 좀 다를 줄 알았다면 지나친 기대였을까요? 대외 공급에서 발생한 인플레이션이라 정부 대응에 한계가 있을 거라는 점은 이해합니다. 대기업-중소기업 간 소득 양극화를 우려하는 것도 이해합니다. 미국의 유연한 노동시장과 엄격한 성과보상제도가 아직 국내 기업에 정착되지 않았기에 최근의 임금인상이 과하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경제부총리가 대기업 경영진을 불러 임금인상을 자제하라는 엄포를 놓는 이런 구태의연한 방식은 결코 해법이 될 수 없습니다. 임금은 기본적으로 노동시장의 수요-공급을 반영해 노사 간에 자율적으로 정해야지 정부가 개입할 문제가 아닙니다. 전 세계 자본주의 국가에서 최고경영자(CEO) 연봉도 아니고 직원 임금을 놓고 정부가 왈가왈부했다는 사례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많은 기업은 이미 인건비를 비용이 아닌 투자로 보고 인건비 지불여력 내에서 인재영입에 사활을 걸고 있습니다. 추 부총리가 자꾸 생산성 얘기를 하는데요. 유무형 자산, 인건비, 재료비 등을 투입요소로, 매출액을 산출요소로 보고 효율성 분석을 해보면 제조업 분야 30대 대기업 대부분 효율성이 100%로 나옵니다. 줄 만하니까 주는 겁니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신봉해 취임사에서 ‘자유’를 35번이나 언급한 윤석열 대통령이 이끄는 정부입니다. 그런 정부 여기저기서 기업 팔 비틀려는 조짐이 슬슬 보입니다. 이게 차라리 나이 들면서 나빠져 가는 제 시력 탓에 생긴 오해였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