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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주 몰래 임차권 넘기고 보증금 쓴 임차인…대법 “횡령은 아냐”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김명수 대법원장이 23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 대법정에서 전원합의체 선고를 앞두고 배석해 있다. 뉴스1

김명수 대법원장이 23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 대법정에서 전원합의체 선고를 앞두고 배석해 있다. 뉴스1

식당 보증금을 돌려받을 권리(임차보증금반환채권)를 다른 사람에게 넘긴 세입자가 건물주에게 계약 사실을 알리지도 않고 보증금을 받아 써버려도 횡령죄로는 처벌할 수 없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민사 책임은 있을 수 있어도 형사처벌까지 할 일은 아니라는 취지로, 1999년의 유죄 인정 판례를 뒤집은 것이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김재형 대법관)는 23일 횡령 혐의로 기소된 A씨의 상고심에서 벌금 300만원을 선고한 원심을 무죄 취지로 파기하고 사건을 인천지법으로 돌려보냈다.

A씨는 2013년 4월부터 1년 동안 인천의 한 건물 1층을 건물주와 보증금 2000만원과 월세 100만원에 계약하고 식당을 운영했다. A씨는 계약 종료 전인 2013년 11~12월께 현금과 토지를 받는 조건으로 식당의 임차보증금반환채권을 포함한 임차권을 B씨에게 넘기기로 했다. 하지만 A씨는 식당 임차권을 B씨에 양도하기로 한 사실을 건물주에게는 알리지 않았다.

그러던 중 계약과 관련해 분쟁이 생겼고 A씨는 B씨의 연락을 받지 않았다. 이후 A씨는 임대차 계약이 끝날 무렵 B씨에게 주기로 한 보증금을 건물주로부터 받아 생활비 등으로 써버렸다. A씨가 건물주로부터 받은 돈은 보증금 2000만원 중 밀린 월세와 관리비 등을 제외한 1100여만원이었다.

이 때문에 A씨는 횡령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고, 1심과 2심은 A씨에게 300만원의 벌금형을 선고했다. A씨가 임차보증금반환채권을 B씨에게 양도하기로 계약을 해놓고 고의로 보증금을 반환받아 소비했다는 이유에서였다. 1999년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보증금 채권 양도인(A씨)이 채권 양도 통지를 하기 전에 채무자(건물주)로부터 변제금을 임의로 받아 쓴 것은 횡령죄에 해당한다고 판결한 점이 고려됐다.

형법 355조(횡령, 배임)는 '타인의 재물을 보관하는 자'가 그 재물을 빼돌리거나 반환을 거부한 경우를 횡령죄로 규정한다. 죄가 성립하려면 재물이 '타인의 것'이어야 하고 피의자가 '보관하는 자'의 지위여야 한다.

그러나 이날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종전의 판례를 뒤집고 A씨에 대해 무죄 취지로 파기환송했다. 먼저 횡령죄가 성립하려면 재물이 타인의 것이어야 하는데, A씨가 건물주에게 채권 양도 사실을 알리지 않은 만큼 보증금의 소유권이 여전히 A씨에게 있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A씨가 그 돈을 다 써버려도 횡령죄는 성립할 수 없다고 봤다.

또 A씨와 B씨는 통상의 계약에 따른 이익대립관계에 있을 뿐 A씨가 횡령죄를 구성하는 보관자 지위에 있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A씨가 보증금 채권을 넘긴 사실을 건물주에게 알리지 않은 건 민사상 의무를 이행하지 않은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다만 반대 의견을 낸 조재연·민유숙·이동원·노태악 대법관은 "채권 양도인이 양도 통지를 하기 전에 채권을 추심해 금전을 수령한 경우 원칙적으로 그 금전은 채권 양수인의 소유에 속한다고 봐야 한다"며 "종래 판례를 변경할 경우 횡령죄에 관한 선례들과 비교해 형사처벌의 공백과 불균형이 발생한다"고 밝혔다.

대법원 관계자는 "통상의 계약관계에서 타인의 재산을 보호·관리하는 것이 계약의 본질적 내용이 아니라면, 계약 불이행 행위를 형사법상 범죄로 확대해석하는 것을 제한해 온 최근 횡령·배임죄에 관한 대법원 판례의 흐름을 반영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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