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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기 난사와 맞먹는 분노 방화의 잔혹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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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최경호 기자 중앙일보 광주총국장
최경호 내셔널팀장

최경호 내셔널팀장

지난 12일 오전 7시40분쯤 부산 영도구 대교파출소. 50대 남성 A씨가 손에 휘발유가 든 페트병을 들고 나타났다. 지구대로 성큼성큼 들어선 그는 다짜고짜 문을 걸어잠근 뒤 불을 지르려는 시늉을 했다.

당황한 경찰관들이 A씨를 몰아냈지만 자칫 방화가 이뤄질 뻔한 상황이었다. 당시 그가 입은 조끼에서는 라이터 2개가 발견됐다.

앞서 A씨는 이날 오전 6시40분쯤 술에 취해 행인들에게 시비를 걸다가 범칙금 처분을 받았다. 경찰은 파출소에 불을 지르려 한 혐의(현주건조방물방화예비)로 14일 A씨를 구속했다.

홧김에 불을 지르는 방화 범죄가 속출하고 있다. 지난 9일 대구 변호사사무실에서 발생한 방화로 7명이 숨진 후로도 유사범행이 이어지는 추세다. 부산에서만 이틀새 3건의 방화 및 방화시도가 있었다.

15일 대구시청 직원들이 화재 발생에 대비한 대피 훈련을 하고 있다. [뉴시스]

15일 대구시청 직원들이 화재 발생에 대비한 대피 훈련을 하고 있다. [뉴시스]

대구 방화 참사의 용의자 천모(53)씨도 그동안 수차례 방화 징후를 보였다고 한다. 천씨의 한 지인은 “늦은 밤 술에 취한 채 ‘시너를 들고 찾아가겠다’고 협박했다”고 말했다. 협박을 할 때는 차에 실려 있는 시너 사진을 보내기도 했다. 결국 그는 잇따른 소송에서 패소하자 자신의 말처럼 범행을 실행했다.

법조계에선 천씨의 범행 자체가 이례적이면서도 심각한 방화라는 반응이다. 재판부나 검찰 등이 아닌 상대방 변호사를 범행 목표로 한 것은 전례를 찾기 힘들어서다. 그가 불을 지른 곳은 자신이 소송을 건 재개발 사업 시행사 쪽 변호사사무실이었다. 갑작스러운 천씨의 범행에 애꿎은 변호사와 직원 등 6명이 목숨을 잃었다.

전문가들은 최근 방화 범죄에서 사회적인 분노현상의 징후가 읽힌다는 점에 우려를 표한다. 대구지하철과 숭례문 등 참혹한 방화 사건을 경험했음에도 관련 범죄가 꾸준히 늘고 있어서다. 일각에선 유행처럼 모방범죄로 이어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분석도 나온다. 대검찰청에 따르면 국내에선 2020년에만 1210건의 방화범죄가 발생했다. 이중 424건(41.7%)이 술을 마신 후 보복 및 홧김 방화로 조사됐다. 이웅혁 건국대 경찰학과 교수는 “최근 3년간 한국사회는 코로나로 인한 우울감과 경기 침체에 따른 좌절감에 시달려왔다”며 “이런 상황에서는 사소한 요인들도 분노범죄를 촉발하는 방아쇠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방화는 총기소지가 금지된 우리나라에서 강력한 테러수단이자 흉악범죄로 분류된다. 시중에서 구입한 인화물질만 뿌리면 짧은 시간 안에 막대한 피해를 낸다. 대구 변호사사무실의 경우 불이 22분 만에 꺼졌는데도 7명이 숨지고 41명이 부상을 입었다. 총기 난사와 맞먹는 방화 범죄를 근절할 강력한 처벌과 대응이 필요한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