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예영준 논설위원이 간다

마산방어전투의 재조명 "그때 뚫렸으면 6ㆍ25는 달라졌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4면

예영준 기자 중앙일보
예영준 논설위원

예영준 논설위원

 1950년 여름 대한민국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있었다. 포항-왜관-마산을 잇는 240㎞ 워커라인(일명 낙동강 방어선)의 어느 한 곳이라도 뚫리면 대한민국은 지도 위에서 사라질 운명이었다. 9월15일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되기 전까지 국군ㆍ미군과 북한군은 워커라인 곳곳에서 사활을 건 전투를 벌였다. 워커라인의 서남쪽 끄트머리인 마산 외곽지역에서 두달 가까이 벌어진 마산방어전투는 6ㆍ25 전사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 전투 중 하나였다. 최후 교두보이자 임시수도인 부산까지 직선거리로 40∼50㎞, 북한 인민군 6사단장 방호산은 “마산을 점령하면 적의 숨통을 끊는 것”이라고 호언했다. 만약 그리됐더라면 인천상륙작전은 실행 불가능했을 것이다. 김기섭 군사편찬연구소 전쟁사부장은 “마산 방어에 실패했다면 6ㆍ25 전쟁의 물줄기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 것”이라고 말한다. 전쟁 사가들의 의견이 일치하는 대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산방어전투는 다부동 전투, 영천 전투 등 다른 낙동강 지역 전투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었으나 묻혀진 사료 발굴을 계기로 최근들어 재조명 움직임이 펼쳐지고 있다. 그 배경에는 미군의 비밀해제 자료를 찾아내고 전적지를 누비는 등 발로 뛰며 전사(戰史)를 쓰고 있는 80대 노의사의 집념이 있다.

배대균 마산방어전투기념사업회 상임대표(왼쪽)가 11일 서북산 일대의 전적지에서 수집한 탄환, 포탄 파편 등을 살펴보고 있다. 오른쪽은 학도병으로 마산방어전투에 참전했던 류승석 옹. 송봉근 기자

배대균 마산방어전투기념사업회 상임대표(왼쪽)가 11일 서북산 일대의 전적지에서 수집한 탄환, 포탄 파편 등을 살펴보고 있다. 오른쪽은 학도병으로 마산방어전투에 참전했던 류승석 옹. 송봉근 기자

워커 미군 사령관 "죽음으로 지켜라"
미군과 국군의 작전지휘권을 한 손에 쥔 미 8군 사령관 월턴 워커 중장은 7월 29일 “죽음으로 지켜라(Stand or Die)”는 엄명과 함께 낙동강방어선을 그었다. 가장 약한 고리는 서남단의 마산 쪽이었다. 7월 31일 진주를 점령한 인민군 정예 6사단 1만명이 마산 방향으로 진격해 들어왔지만 방어 태세나 병력 배치가 미흡한 상태였다. 국군과 미군의 주력은 대구 이북의 낙동강 지역에 있었고 마산의 병력 배치는 대대급의 한국 육군과 해병대 전투대대 등 소규모였다. 예기치 못한 방향에서 나타난 6사단의 진격에 놀란 워커 중장은 경북 상주에 있던 미군 보병25사단을 급히 마산으로 이동시켰다. 그리하여 인민군 6사단과 미 25사단 사이의 치열한 싸움이 50여일간 펼쳐졌다.

1950년 8월 미군이 촬영한 서북산. 나무 한 그루 남아 있지 않은 모습이 전투의 치열함을 설명해준다.

1950년 8월 미군이 촬영한 서북산. 나무 한 그루 남아 있지 않은 모습이 전투의 치열함을 설명해준다.

방호산이 이끄는 인민군 6사단은 조선인 출신 또는 조선족 병사로 구성된 중국 공산당의 4야전군 166사단이 그대로 북한으로 넘어가 재편된 부대로 국공내전과 항일전쟁 등 풍부한 전투 경험을 갖춘 북한군 최정예였다. 남침 준비를 위해 1949년 7월 중국을 방문한 김일성이 가장 먼저 요청한 부대이기도 했다. 김일성은 신출귀몰의 전법을 구사하는 것으로 유명한 방호산이 미군 방어선을 뚫고 8ㆍ15 행사를 부산에서 치를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마산 전투는 처절하고 치열했다. 주 전장은 현재의 행정구역상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동면·진전면 일대와 함안군 여항면 등 마산 서부 외곽지역이었다. 해발 740m의 서북산은 미군 전투일지에 나타난 것만으로도 19차례 뺏고 빼앗기는 혈전을 치르는 동안 피아의 포탄과 미 공군의 네이팜탄으로 나무 한그루 남지 못할 지경이 됐다. 갓을 씌운 듯한 모양때문에 ‘갓더미산’이란 별명으로 불리던 이 산을 오르며 미군들은 ‘갓댐잇(God Damm It,젠장…)’을 연발했고, 그래서 산의 별명은  ‘갓데미산’으로 바뀌었다.  북한 종군기자로 내려온 유명 작가 김사량은 서북산 고지를 점령한 뒤 쓴 종군기에서 “바다가 보인다. 동남쪽 끝 항구 부산항도 여기서 얼마 멀지를 않으니 우리들의 귀중한 조국 땅을 고스란히 끌어안을 때도 거의 임박하였다.저 아름다운 남해바다도 우리들의 것이다”고 쓰기도 했다. 그러나 김사량의 감격은 오래 가지 못했다. 마산방어전투는 북한군 전사자 4000명, 포로 3000명, 미군ㆍ국군 전사자 1000명, 부상자 5000명을 낸 끝에 인천상륙작전으로 공수가 전환되면서 막을 내렸다. 미군 25사단은 9월 18일 북한군의 최후 공세를 막아내고 26일 진주를 수복했다.
끝까지 북한의 공세를 저지한 건 미 25사단이었으나 초기에 주둔했던 김성은 대령의 국군 해병대도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귀신잡는 해병대란 말의 어원은 진동리 전투의 전과를 보고 미군이 찬사를 보낸 데서 나온 것이다. 하지만 마산방어전투의 전체상은 그 중요성에 비하면 국내에서 주목받지 못했다. 육군사관학교 교수진이 필진이 돼 펴낸 『6ㆍ25 전쟁 60대전투』에서도 빠져 있고 전쟁기념관의 전시 패널에서도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고 있다. 한국국이 아닌 미군 주도로 치러진 전투였기 때문에 국내에서는 관심을 덜 받았던 까닭이다.

 북한군을 격퇴한 미 25사단 35연대 장병들이 인공기를 펼쳐보이고 있다. [사진 미 25사단 전투일지]

북한군을 격퇴한 미 25사단 35연대 장병들이 인공기를 펼쳐보이고 있다. [사진 미 25사단 전투일지]

80대 노의사의 집념으로 밝혀낸 전황
최근들어 마산지구 전투의 전모를 알게 된 건 신경정신과 전문의 배대균(87)박사의 오랜 노력 덕분이다. 군의관으로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그는 6ㆍ25 전사에 관심을 갖고 연구해 오던 끝에 미 25사단의 전투기록을 입수했다. 소령 계급의 전투기록관이 하루도 거르지 않고 전황을 적은 일지였다. 그는 이 일지를 번역해 2년 전 출간한 데 이어 이달 중에 ‘마산방어전투 연구’를 출간할 예정이다. 그는 전투일지에 나타난 전적지를 100차례 이상 답사하며 금속탐지기로 탄환, 포탄 파편, 북한군 소총(따발총) 총신 등을 발굴해 내기도 했다.

배대균 마산방어전투기념사업회 상임대표가 격전지 서북산 일대에 진주한 북한군 6사단의 보급기지로 쓰였던 전적지에서 총탄 흔적을 가리키며 전투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송봉근 기자

배대균 마산방어전투기념사업회 상임대표가 격전지 서북산 일대에 진주한 북한군 6사단의 보급기지로 쓰였던 전적지에서 총탄 흔적을 가리키며 전투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송봉근 기자

-미군 자료로 본 마산방어전투는 어떤 전투였나.
“6ㆍ25 전쟁 어느 전투 하나 처절하지 않은 곳은 없지만, 마산 전투는 가장 길고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전투였다. 60일간 하루도 쉬지 않고 싸움이 이어졌다. 지금도 서북산, 여항산 일대에 가서 금속탐지기를 들이대면 신호음이 들리는 곳이 적지 않다. 그런데 지역 주민들에게조차도 마산전투에 대한 기억들이 잊혀지고 있어서 백방으로 수소문한 끝에 미연방 문서보관소에 25사단의 전투일지를 찾아내게 됐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 버금갈 만큼 소중한 자료란 생각이 들어 번역을 하게 되었다. ”
-기념사업회를 조직했는데 어떤 활동을 구상하고 있나.
“마산이 뚫렸으면 어떻게 됐을까 생각해보라. 그런 의미에서 다부동 전투 못지 않게 중요한 전투라 생각하는데 널리 알려지지 않아 아쉽다. 안보 교육장으로 활용할 수 있는 기념관이라도 조촐하게 마련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기념사업회를 조직했다. 그 결과 지난해 12월에 성일종 국회 국방위 간사(국민의힘 의원) 주최로 토론회를 개최하는 등 관심을 갖는 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미 25사단 참전용사 가운데 아직은 생존자가 있을 것이다. 그런 분들을 초청해서 감사의 마음을 전달하는 행사 등을 구상하고 있는데 민간인의 힘으로는 생존자를 찾아내는 데 한계가 있다. 당국에서 관심을 가져줬으면 좋겠다.”

서북산 전투 전사자 로버트 티몬스 대위

서북산 전투 전사자 로버트 티몬스 대위

 기념사업회의 김경환 사무총장은 마산지구전투에 얽힌 스토리가 많다고 강조했다. 대표적인 것이 티몬스 3부자의 이야기다. 로버트 티몬스 대위는 1950년 8월23일 서북산에서 중대원과 함께 전사했다. 당시 그의 7살난 아들 로버트가 훗날 아버지의 뒤를 이어 군인이 되었는데, 그가 바로 1994년부터 3년간 주한 미8군 사령관으로 근무한 리처드 티몬스 중장이다. 그는 부친이 전사한 서북산을 방문해 전적비를 세웠다. 그의 아들, 즉 로버트의 손자도 군인의 길을 걸었는데 역시 대위 시절에 한국 근무를 자원하여 2사단 최전방에 근무하였다. 김 사무총장은 “3대에 걸친 한국 근무 경력은 주한 미군 전체를 통틀어서도 많지 않을 것”이라며 “한미동맹의 굳건함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례”라고 말했다.
6·25의 다른 전투가 그랬듯 마산 전투에도 학도병의 피와 땀이 서려있다. 92세의 류승석 옹은 유일한 생존자다. 그는 마산합포중 재학때 학도병에 지원한 뒤 미군 정찰 활동에 투입돼 사선을 넘나들었다고 설명했다. 류 옹은 “닷새간 교육받고 인민군 점령지역으로 건너가 인민군 배치 상황을 살펴보고 돌아와서 미군에 보고했다”며 “귀환하는 중에 함께 투입된 학도병이 희생됐는데 그 날의 기억은 70여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다”고 말했다.

19차례 뺏고 뺏긴 대격전 서북산 전투 #낙동강 방어선의 서남쪽 끝에서 펼쳐진 60일 사투 #북한군 정예 6사단 격파하고 임시수도 부산 지켜내 #전사자 티몬스 가족 3대는 굳건한 한미동맹의 상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