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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시너 들고 간다" 그뒤 지옥됐다…6억 그리고 6년 악연

중앙일보

입력

평소에는 ‘형님’이라며 예우하다가도, 늦은 밤 술에 취한 채 전화해 ‘시너를 들고 찾아가겠다’고 협박한 적도 있다. 차에 실려 있는 시너 사진을 휴대전화로 보내 왔을 때는 가슴이 철렁했다. 비슷한 일을 당한 주변인들이 여럿이다.

7명의 목숨을 앗아간 대구 화재 참사의 방화 용의자인 A씨의 지인은 그를 이렇게 기억했다. “5년 전 수억 원을 빌려줬다가 돌려받아 일이 마무리된 줄 알았는데 A씨가 갑자기 ‘이중 변제를 받아 문제가 있다’며 자신에게 소송을 걸었다”는 지인 B씨 얘기다.

[사건추적]

언론 보도를 통해 A씨가 용의자로 지목된 것을 본 B씨는 “당시에는 A씨가 술에 취해 과격한 소리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번 사건을 본 순간 모골이 송연했다. 안타깝다”라고 말했다. 주변인들에게 “시너를 들고 찾아가겠다”고 말하던 A씨가 결국 앙심을 품어온 변호사 사무실을 찾아가 범행을 저질렀다는 취지였다.

9일 대구 수성구 범어동 대구지방법원 인근 변호사 사무실 빌딩에서 불이나 시민들이 옥상 부근에서 구조를 기다리고 있다. 연합뉴스

9일 대구 수성구 범어동 대구지방법원 인근 변호사 사무실 빌딩에서 불이나 시민들이 옥상 부근에서 구조를 기다리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9일 오전 10시55분쯤 소방당국에 화재 신고가 접수됐다. “대구 수성구 범어동 한 7층짜리 건물 2층에서 검은 연기가 나고 폭발음도 들렸다”는 내용이다. 신고 6분 뒤인 오전 11시1분 화재 현장에 소방차가 도착했고, 차량 50여 대와 인력 160여 명이 투입돼 신고 22분 만인 11시17분쯤 불이 꺼졌다.

당시 폭발음이 7층 건물 전체에 울릴 정도로 충격이 컸다고 한다. 불이 난 건물 2층의 한 사무실 관계자는 “상담을 하고 있는데 굉음과 진동이 느껴지기에 놀라서 바깥으로 나가려고 했는데 이미 출입문 손잡이가 뜨겁게 달궈져 있었다”며 “몸으로 문을 열고 복도로 나갔을 때 다른 사무실에서 불길이 번지고 있어 황급히 대피했다”고 말했다.

불을 끄고 건물 안을 수색한 소방당국은 이 건물 2층 203호에서 모두 7구의 시신을 발견했다. 남자 5명, 여자 2명이었다.

10일 오전 대구 수성구 범어동 변호사 사무실 건물 앞에 희생자를 추모하는 조화(弔花)가 놓여 있다. 뉴스1

10일 오전 대구 수성구 범어동 변호사 사무실 건물 앞에 희생자를 추모하는 조화(弔花)가 놓여 있다. 뉴스1

화재 원인은 얼마 지나지 않아 드러났다. 경찰이 폐쇄회로TV(CCTV) 분석 등을 통해 파악한 결과 용의자 A씨가 인화물질을 들고 건물 2층으로 들어가 불을 질렀다. A씨는 현장에서 사망한 6명과 함께 주검으로 발견됐다.

용의자 A씨가 불을 지른 곳은 그가 진행 중인 민사소송의 피고인 측인 C변호사 사무실이다. A씨가 민사소송에서 패소한데 앙심을 품고 상대방 변호사 사무실을 찾아간 것으로 경찰은 추정하고 있다. 참사 당시 C변호사는 다른 지역에 출장을 가 있어 화를 면했다.

법조계에선 재판부나 검찰 등이 아닌 상대방 변호사를 범행 목표로 삼은 것은 이례적이라는 반응이다. 방화 용의자 A씨와 변호사 C씨 사이의 ‘악연’이 시작된 것은 6년 여 전인 2016년 6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A씨가 대구 수성구에서 이뤄지는 재개발 사업에 수억 원을 투자했다가 돌려받지 못하자 시행사 대표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을 맡은 변호인이 C변호사였다.

10일 오전 대구 수성구 범어동 변호사 사무실 화재 현장에서 경찰·소방·국과수·한국전기안전공사 등으로 구성된 합동감식반이 정밀감식을 진행하고 있다. 뉴스1

10일 오전 대구 수성구 범어동 변호사 사무실 화재 현장에서 경찰·소방·국과수·한국전기안전공사 등으로 구성된 합동감식반이 정밀감식을 진행하고 있다. 뉴스1

A씨는 재개발 사업 시행사와 2013년 11월 투자약정을 체결하고 2014년 10월부터 2015년 6월까지 10차례에 걸쳐 3억6500만 원을 지급했다. 이보다 앞서 투자했던 3억2000만 원까지 합치면 A씨의 총 투자금은 6억8500만 원이다. 예상과 달리 사업이 부진하고 투자금도 제대로 돌려받지 못하자 A씨는 시행사 대표와 갈등을 빚기 시작했다.

이후 A씨는 투자 지연손해금 청구와 함께 시행사 대표의 책임을 묻는 소송을 제기했지만, 법원은 2019년 지연손해금 지급만 인용 판결했다. 이에 A씨는 시행사 대표의 책임을 지적하며 8억2000여만 원을 지급해야 한다는 소송을 추가로 냈다가 지난해 패소했다.

여기에 화재사건 하루 전날인 지난 8일에는 A씨가 시행사 대표에 대한 별도의 명예훼손 재판에서 벌금 200만 원을 선고받은 사실도 드러났다.

결국 6년간 이어지던 악연의 끝은 7명이 목숨을 잃는 참사로 귀결됐다. 방화사건 당일인 9일 오전 10시48분 A씨는 대구 수성구 자신의 집에서 차량을 타고 범행 현장으로 향했다. 차량 안에는 인화물질과 흉기 등을 챙겨둔 상태였다.

집에서 출발한 지 7분 만에 화재가 난 건물에 도착한 A씨는 흰 천에 인화물질을 숨기고 곧장 2층으로 올라가 C씨가 근무하는 203호 사무실로 들어갔다. 이곳은 대구시 수성구 범어동 지하 1층, 지상 7층짜리 건물로, 변호사·법무사 사무실이 밀집해 있다.

건물 내부 CCTV에는 A씨가 사무실로 향하는 복도로 들어간 지 불과 15초 만에 불길과 연기가 치솟는 장면이 포착됐다. CCTV에 잡히지는 않았지만 A씨는 사무실에서 인화물질을 뿌린 전후로 흉기를 휘두르고 불을 붙인 것으로 추정된다.

변호사 사무실 내 유일한 생존자로 알려진 간부 직원 1명은 출입구가 아닌 창문을 깨고, 화단을 통해 탈출했다.

대구 중구 경북대병원 장례식장. 수성구 법조건물 폭발사고 사망자들의 시신이 안치돼 있다. 대구=백경서 기자

대구 중구 경북대병원 장례식장. 수성구 법조건물 폭발사고 사망자들의 시신이 안치돼 있다. 대구=백경서 기자

경찰에 따르면 국과수와 경찰, 소방당국 등이 지난 9일 1차 합동 감식으로 확보한 연소 잔류물을 감정한 결과 휘발유 성분이 검출됐다. 다음날 2차 합동 감식에서는 인화물질이 담겨있던 것으로 보이는 유리용기 등 4점을 추가로 수거해 유류성분 감정을 국과수에 의뢰했다.

현장에서는 날 길이 11㎝ 흉기 1점이 발견됐다. 이 흉기가 범행에 사용된 도구인지 여부는 조사 중이다. 국과수는 지난 10일에는 사망자 7명에 대한 부검을 진행했다. 대구변호사협회는 이날부터 일주일 동안을 검은 리본을 달고 추모하는 기간으로 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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