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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교수 성추행 재판…검사 "정수리 살살 만져봐라" 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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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서울대 서어서문학과 대학원생 A 씨는 강제추행 혐의로 B 교수를 고소했습니다. 김씨 폭로 이후 이 사건은 B 교수의 파면을 촉구하는 학내 시위로도 번진 바 있고, 실제로 B 교수는 결국 해임됐습니다.

8일에는 법원의 이 사건 첫 결론이 나왔습니다. B 교수는 1심에서 국민참여재판을 신청했는데요. 서울중앙지법 형사29부(김승정 부장판사)는 7일과 8일 이틀간 이 사건 재판을 열었습니다. A 씨와 B 교수의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가운데, 8명의 배심원은 이 공방을 꼼꼼히 지켜봤습니다. 이들은 어떤 결론을 내렸을까요? '법온'에서 정리해봤습니다.

지난 2019년 제자 성추행 혐의로 피소된 서울대학교 서어서문학과 A교수의 연구실에 파면을 요구하는 학생들의 쪽지가 붙어있다. 연합뉴스

지난 2019년 제자 성추행 혐의로 피소된 서울대학교 서어서문학과 A교수의 연구실에 파면을 요구하는 학생들의 쪽지가 붙어있다. 연합뉴스

기분 나쁜 터치? 지압?

▶먼저 피해자 A 씨가 기억하는 장면은 이렇습니다.  

#1. 지난 2015년 참석한 해외 학회. 장거리 버스 안에서 잠이 든 A 씨 정수리를, 뒷좌석에 앉아있던 B 교수가 다섯 손가락 손끝을 이용해 약 30초간 살살 긁듯 만졌습니다.

#2. 지난 2017년 참석한 해외 학회 발표 이후, 바에 나란히 앉은 B 교수와 A 씨. 당시 A 씨가 무릎 위에 화상을 입어 붕대를 차고 있자, 붕대 윗부분을 B 교수가 톡톡 건드렸습니다. 그리고 치마 속 허벅지 안쪽 부위를 손가락으로 만졌습니다.

#3. 이후 바 근처를 산책하던 두 사람. "팔짱을 끼라"는 B 교수의 요구를 A 씨 못 들은 체하자, B 교수가 A 씨 팔을 잡아 억지로 팔짱을 꼈습니다. A씨는 B 교수가 당일 자신의 방에서 라면을 먹자고 권하거나, 자꾸만 독주를 마시자고 했다고도 덧붙였습니다.

(※양측 주장이 첨예하게 엇갈리는 사건임을 고려해, 피해자 측의 양해를 얻어 공소사실을 구체적으로 적습니다.)

▶반면 B 교수의 주장은 좀 다릅니다.

#1. 정수리를 꾹꾹 누르자 고산병 증세가 완화되는 것 같아, 앞자리에 앉은 제자에게도 지압해준 것뿐입니다. 별 반응이 없길래 5초 정도 하다가 그만 멈췄습니다.

#2. 무릎 상처를 걱정해주다 붕대 위를 두드린 것뿐이지 허벅지 안쪽 부위를 만진 적은 없습니다.

#3. 팔짱을 끼라고 말한 사실은 있지만 억지로 팔을 끼운 적은 없고, A 씨가 팔을 넣어 팔짱을 낀 것입니다. A 씨가 이전에 찍은 사진들을 보니 팔짱 끼는 것에는 큰 의미를 두는 것 같지 않아 가벼운 마음으로 말을 했을 뿐입니다.

살살 간질이듯 정수리를 만진 것이냐, 지압이냐. 아주 작은 사실관계에서부터 서로의 입장이 다르지요. 일단 검찰은 사건을 이렇게 정리합니다. "피고인이 피해자의 신체를 만져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는데도, 고의로 몸을 만졌다"는 것입니다.

A 씨가 고산병 증세를 호소하지도 않았고 따로 지압을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굳이 왜 정수리를 만졌느냐는 것이죠. 검사는 배심원들에게 직접 정수리를 살살 만져보라고도 권합니다. "움찔움찔 소름 돋는 느낌"이라고 설명합니다. 우리 법이 강제추행죄의 신체 부위를 따로 정하고 있지 않은 만큼, 범행 상황을 종합적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덧붙였습니다.

검찰은 화상 상처를 걱정해준다며 다리를 만지거나 팔짱을 억지로 끼게 한 것도 성적 수치심을 일으키는 행동이라고 봅니다. 검사는 증인으로 나온 피해자와 함께 법정에서 당시 상황을 재현하며, 불필요한 접촉인 점을 강조했습니다.

"스킨십에 자유로운 학과 분위기?"

B 교수 측은 A 씨가 범행 이후 보인 태도에 대해서도 지적했습니다. A 씨는 허벅지 추행과 팔짱 추행을 당한 사건직후 카카오톡 메시지로 학과 동료들에게 피해 사실을 호소한 바 있는데요. B 교수 측은 "A 씨가 이때 '허벅지 안쪽' 부위 추행을 알리는 것이 '상식적'인데, A 씨가 주변에 '무릎' 부위만 언급했다"고 했습니다. 또 "당시 A 씨가 팔짱을 억지로 끼게 한 사실보다는, '팔짱을 끼라'고 명령한 부분에 한해 기분 나쁜 감정을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고 했습니다.

B 교수 측은 범행 시점 이후에 B 교수와 A 씨가 함께 찍은 사진도 제시하면서, 김씨가 몸을 밀착하거나 웃는 모습으로 사진을 찍었다고 변론했습니다. 또 "서어서문학과 특성상 학과 분위기가 스킨십에 자유로운 부분이 있다"며 B 교수가 이전에 다른 학생들과 어깨동무를 한 사진 등을 제시하기도 했죠.

A 씨는 "교수님 입장에서는 자연스러운 스킨십이지만 학생들 입장에서는 성희롱과 성추행이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잘라 말합니다. "충분히 수치스러웠고, 피해 사실을 허위로 말하거나 과장할 이유가 없다"고 반박했습니다. 검찰도 "대학원에서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 피해자가 주변에 피해 사실을 알리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고려해야 한다"며 "법정에서 보인 피해자의 눈빛과 행동, 재연을 종합해 판단해달라"고 배심원단에 요청했습니다.

"진술 달라지고 코치 받아" vs "피해 호소 일관적"

B 교수 측은 이른바 '조력자 그룹'에 대해서도 강하게 지적합니다. 교포 출신인 A 씨가 서울대 인권센터와 경찰에 신고하는 과정에서 학과 내 다른 구성원들이 도움을 줬는데, 이때 B 교수의 이메일을 해킹하는 등 위법한 방식이 쓰였다는 겁니다. (실제로 이 구성원에 대해서는 대법원에서 유죄가 확정됐습니다) 이런 상황을 고려해봤을 때 '조력자 그룹'이 A 씨를 '코치'하고 피해 사실을 부풀렸을 가능성이 있다는 게 B 교수 측 주장입니다.

그러면서 B 교수 측은 A 씨 진술의 신빙성을 집중적으로 흔들었습니다. "A 씨가 허벅지 안쪽 부위에 대한 추행은 처음부터 일관되게 말하지 않았다", "바에서 B 교수가 오른쪽에 앉았는지 왼쪽에 앉았는지에 대해 진술을 바꿨다", "B 교수가 마치 A 씨가 묵는 호텔을 따라서 예약한 것처럼 과장해 진술했다" 등의 주장입니다.

반면 검사는 배심원들에게 "1년 전 생일에 어떤 옷을 입었는지, 어떤 식당을 갔는지, 오른쪽에 누가 앉아있었는지 기억나느냐"고 반문합니다. 2015년과 2017년에 일어난 일을 2019년에 용기 내 폭로한 만큼, 세밀한 부분은 달라졌을지 몰라도 일관되게 피해를 호소해왔다는 것입니다. 검찰은 또 '조력자 그룹'이 무슨 행동을 했는지 A 씨는 알지 못했고, 구체적인 신고 내용이 왜곡된 것은 없다는 입장입니다. 모두 A 씨가 직접 겪은 내용이라는 겁니다.

고소 경위도 쟁점입니다. A 씨는 미국으로 유학을 간 뒤에도 B 교수가 지속적으로 연락을 해 오는 등 스토킹이 지속돼 신고를 결심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B 교수 측은 A 씨가 게재해야 할 논문이 있는데도 이를 다하지 않아 연락한 것이라고 설명했고, 또 공동 저자로 준비한 논문을 A 씨가 미국에서 단독으로 발표했다는 점도 강조했습니다.

배심원의 선택은

영화 '배심원들' 한 장면. [사진 CGV 아트하우스]

영화 '배심원들' 한 장면. [사진 CGV 아트하우스]

국민참여재판에는 검찰이 자주 쓰는 PPT 화면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코끼리 퍼즐'인데요. 50여개의 조각으로 구성된 이 퍼즐, 하나 하나 흩어져 있을 때는 코끼리인지 도저히 알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20여개를 맞추면 코끼리로 추측되는 회색 물체가 나오죠. 그렇다고 코끼리로 단정할 수는 없는 단계입니다. 45개 정도를 맞춰보면 어떨까요. 이제는 사람들이 코끼리라고 얘기할 수 있을 정도의 형체가 나옵니다.

형사 재판에서는 '합리적인 의심이 없을 정도'로 혐의가 증명되어야 피고인이 유죄라고 봅니다. 그런데 퍼즐 50개가 다 맞아야만 합리적인 의심이 없는 정도라고 보지는 않습니다. 퍼즐 45개를 맞춘 정도도 가능하다는 거죠. 나머지 5개 조각이 없다고 해서 코끼리가 아니라고 의심하는 건 합리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건을 쭉 읽어보신 여러분은 퍼즐 조각이 어느 정도 맞춰졌다고 생각하셨나요. 배심원단은 코끼리의 모양이 갖춰지지 않은 상태로 본 것 같습니다. 8명의 배심원 중 예비 배심원을 제외한 7명의 배심원은 모두 만장일치로 무죄를 평결했습니다. 합리적인 의심 없이 혐의가 증명됐다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지요. 재판부 역시 이 평결을 고려해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재판부는 "유무죄 관련한 증거들이 다수 있었고 증거의 내용이 매우 달라서 고민이 많이 되는 사건이었다" "이 사건 신고와 고소 경위에 대해서도 많은 고민과 검토가 필요했다"고 먼저 설명했습니다. 그러면서 "정수리 부분 추행에 대해 피해자가 불쾌감을 느낀 것은 인정되지만 이를 강제추행죄에서 정한 추행으로 볼 수 없다"고 밝혔습니다. 또 "다리 부분 추행과 팔짱 추행은 피해자 진술이 유일한 증거인데, 진술의 구체적인 내용이 일관되지 않고 번복되고 있는 점과 사건 직후 카카오톡 메시지에 비춰볼 때 피해자 진술만으로는 합리적 의심 없이 증명됐다고 보기 어렵다"고 했습니다.

선고 도중 재판부는 이틀 내내 이른 아침부터 늦은 저녁까지 법정을 지킨 배심원들에게 특별한 감사를 표했습니다. "배심원단이 높은 수준의 법인식을 갖고 있다는 것에 놀랐고 많이 배웠다"며 "법관의 한 사람으로서 진심으로 감사하다"고 인사했습니다.

재판이 마친 뒤 법정을 찾은 B 교수의 가족과 지인들은 서로 포옹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B 교수는 "배심원단이 양 측의 입장을 잘 들어줬고, 공명정대하고 상식에 입각한 판단을 내려주셨다"며 "깊이 감사드린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B 교수가 서울대학교를 상대로 낸 해임 처분 취소 소송, A 씨가 B 교수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은 아직 진행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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