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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폐아 부모 스트레스 참전 군인에 버금, 사회적 대책 절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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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1호 26면

[천근아의 세상 속 아이들] 고통 심한 자폐아 가족

천근아의 세상 속 아이들

천근아의 세상 속 아이들

7~8년 전 어느 날, 연구실에서 밀린 업무를 보고 있었다. 외래 간호사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교수님, 긴급히 환자 진단서 하나 작성해주실 수 있나요?” 간호사의 목소리가 상기돼있었다.

“무슨 일이죠?” 외래 진료가 없는 날 간호사가 전화하는 경우가 거의 없으므로 직감적으로 심각한 사안이라고 느꼈다. 나는 즉각 연구실을 나서 외래 쪽으로 향하며 통화를 이어갔다.

“3년 전부터 교수님께 진료 받아오던 김민수(가명) 환자의 어머님이 갑자기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다고 하네요. 근데 아버님께서 아이 장애 진단서가 급히 필요하다며 예약 없이 병원에 오셨습니다. 아마 경찰서에 제출하시려는 것 같아요.” 간호사는 진정하려고 애쓰며 말했다. 진료실에 도착한 나는 전자의무기록시스템에 접속했다. 민수는 자폐성 장애로 특수학교에 다니고 있는 8살 남자아이였다. 2년 전부터 자신의 손등을 물고 턱 끝을 반복적으로 때리는 자해 증상이 심해져서 약물치료를 시작했던 아이였다. 최근 기록의 맨 마지막 문단에는 ‘환모가 우울증으로 인근 개인병원에서 정신과 치료와 약물복용 시작함’이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외래 내원 횟수가 많지는 않았지만 기록을 보면서 아이의 행동과 모습이 선명하게 기억났다. 낯선 진료실을 뛰쳐나가려던 아이를 제지하자 엄마의 얼굴을 때리고 소리를 지르던 민수의 행동과,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해하던 지친 엄마의 모습이 동시에 떠올랐다. 참담한 기분에 가슴이 조여들었다.

팬데믹 탓 복지관 중단, 돌봄 부담 늘어

며칠 전 발달장애 아이를 키우던 40대 엄마가 6살 아들과 함께 극단적인 선택을 한 사건이 발생했다. 장애를 가진 자녀와 그 가족이 세상을 등지는 비극이 되풀이되고 있다. 올해 뉴스 보도를 통해 알려진 사건만 두 번째다. 지난 3년간 코로나19 상황이 장기화하면서 유사한 사건이 끊이지 않고 있다. 총 20건 가까이 된다. 이는 팬데믹으로 인해 복지관과 치료실 운영이 중단되고 가정 내 생활이 장기화하면서 발달장애인 가족들의 돌봄 부담이 수면 위로 심각하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현재 정부에서 자폐성 장애나 발달장애 환자를 위해 지원하는 활동 보조사나 주간활동 지원은 하루 최대 5~6시간 남짓이다. 나머지는 모두 가족의 몫이다. 내가 진료하는 자폐와 발달장애 아이 중에도 중증도가 매우 높은데도 불구하고 제한적인 특수학교 공급으로 인해 대상자 선정에서 탈락한 사례가 드물지 않다. 게다가 정부에서 제공하는 발달장애 지원이 턱없이 부족해 부모가 전적으로 아이를 돌보느라 일을 하지 못해 생계가 어려워진 가정도 많다. 최근 국가인권위원회가 발표한 ‘발달장애인 부모 실태조사’에 따르면, 긴급 돌봄 서비스를 받지 못했다고 응답한 비율은 60.3%로 나타났다. 자녀 돌봄을 위해 생업을 포기한 부모도 20.5%나 있었다. 이처럼 정부의 부족한 지원방안으로 인해 발달장애 부모는 생계보다 자녀 돌봄에만 전념해야 하는 상황이다.

얼마 전 ‘대한소아청소년정신의학회’에서는 반복되는 비극적 사건을 막기 위해 국가와 사회의 ‘발달장애 24시간 지원 체계’에 대한 구체적이고 실질적 방안을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한 바 있다. 국가가 발달장애 가정이 처한 현실을 제대로 이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맞춤형 지원과 발달장애 부모들을 위한 심리-정서적 지원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고 있다.

‘자폐증 자녀를 둔 엄마의 스트레스는 참전 군인이나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에 버금간다.’

이는 2010년도 위스콘신-메디슨 대학의 셀처(Seltzer) 연구팀의 논문에서 인용한 문장이다. 자녀를 양육하면서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부모는 없다. 그러나 자폐성 장애를 비롯한 발달장애 자녀를 둔 부모가 겪는 스트레스는 끝이 안 보이는 지속적이고 만성적인 것으로서 심각한 고립감과 죄책감, 절망감을 야기한다. 발달장애의 중증도가 심각할수록 부모와 가족이 받는 스트레스의 강도도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 2013년 한 연구팀은 발달장애 중에서도 자폐성 장애 자녀를 양육하는 것이 지적 장애, 다운 증후군, 뇌성 마비를 지닌 자녀를 양육하는 것보다 스트레스 수준이 더 높다는 연구결과를 보고했다. 5년 전 모성 스트레스와 자폐증 자녀 양육 간의 연관성을 분석한 연구가 있었다. 그 결과 자폐증 부모가 자녀의 문제행동을 경험한 후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PTSD) 증상을 경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연구에 참여했던 부모들은 자녀가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다치지 않게 하려고 자녀를 물리적으로 제지하는 것이 가장 큰 스트레스라고 말했다. 아울러 자녀가 부모로부터 갑자기 달아나서 없어지거나 사고를 당하는 것과 같이 장애 자녀의 안전에 대한 두려움 또한 큰 스트레스 중 하나였다. 물론 자폐성 장애나 발달장애 자녀를 둔 모든 부모가 동일한 스트레스를 경험하는 것은 아니다. 자폐성 장애의 경우 사회적 의사소통의 어려움이 심각할 경우에는 비록 자해행동과 같은 심각한 문제행동이 없다 하더라도 그 자체만으로도 부모와 가족은 큰 스트레스를 받을 수 있다.

발달장애의 형제, 자매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지원도 절실하다. 몇 달 전 외래에 자폐성 장애 오빠와 함께 내원한 5살 여동생의 모습도 생생하다. 오빠가 지난 방문에 비해 언어 표현과 일상 자조 기술이 꽤 향상한 것에 대해 부모가 뿌듯해하면서 나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때 옆에 조용히 앉아있던 여동생이 작은 목소리로 ‘난 저런 거 예전부터 다 잘했는데...’라고 혼잣말로 되뇌는 것이었다. 나는 잠시 여동생과 이야기를 나눴다. 여동생은 오빠가 사소한 것들만 잘해도 어른들로부터 칭찬받는 것이 이해가 안 된다고 말했다. 또한 자신은 오빠보다 모든 것을 훨씬 더 잘하는데도 상대적으로 칭찬을 충분히 받지 못하는 것에 대한 섭섭한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했다. 나는 여동생에게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이야기해준 것이 고맙다고 칭찬하며 동물 스티커 2장을 주었다. 여동생 표정이 환해졌다. 부모 입장에서는 발달장애 자녀의 돌봄에 전력을 다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비장애 형제, 자매들이 겪는 소외감, 피해의식, 질투, 죄책감 그리고 두려움 등의 다양하고 혼란스러운 감정들에 대해서 공감하고 이해할 필요가 있다.

비장애 형제·자매 공정하게 대우해야

천근아의 세상 속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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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달장애 자녀에게 비장애 형제, 자매가 있는 경우에 자녀들이 공정하게 대우받고 있다고 느끼게 하는 것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즉, 명확한 가족 규칙을 설정해서 일관되게 적용한다. 특히, 자녀의 올바른 행동에 대해 누구 할 것 없이 동일한 정도로 칭찬하고 격려해야 한다. 자폐증 자녀가 형제, 자매에게 공격적이거나 상처를 주는 행동에 대해서는 절대로 허용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예컨대, “오빠가 장애가 있으니 동생인 네가 이해하라”는 식으로 부모가 장애 자녀의 문제행동에 대해 단호함 없이 미온적으로 대처할 경우 그 문제행동은 오히려 더 늘어나고 비장애 형제의 두려움과 좌절은 더욱 깊어질 것이다. 비장애 자녀가 발달장애를 지닌 아이의 병에 대해 제대로 배우고 적응하는 과정에서 복합적인 정서 반응을 보일 때, 부모는 아이의 그러한 감정을 이해하고 무비판적으로 인정해 주는 것이 좋다. 예를 들어, “오빠가 내 장난감을 말없이 휙 가져가 버리는게 너무 싫어”라고 말할 경우 부모는 “그래, 네가 정말 짜증났겠구나”라고 대응하는 것이 좋다. 그리고 “네가 아까 어떤 기분이 들었는지 계속 말해보렴”이라며 아이가 충분히 표현할 기회를 줘야 한다. 함께 그림을 그리거나 놀이를 통해 비장애 자녀가 느끼는 서러움이나 좌절감이 지극히 정상적인 것임을 이해하도록 도와야 한다.

현재 16세가 된 민수는 아빠, 할머니와 함께 6~7개월에 한 번씩 내원하며, 특수학교에 잘 다니고 있다. 문제행동도 많이 호전되어 약도 많이 줄였다. 얼마 전에는 복지관 선생님들과 함께 만들었다면서 미니 화분을 선물로 가져왔다. “선.생.님, 스.승.의.날. 축하합니다.” 민수는 사전에 연습한 것 같은 어색한 말투였지만 제법 또박또박 말했다. “멋진 선물이네. 민수야 고맙다”라고 내가 화답했다.

※ 개인 정보 보호를 위해 등장인물을 가명으로 처리했고, 전체 흐름을 왜곡하지 않는 범위에서 일부 내용을 각색했음을 알려드립니다.

천근아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소아정신과 교수.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소아정신과 교수. 연세대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석·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세브란스병원 소아정신 과장으로 재직 중이다. 2008년 영국 국제인명센터(IBC)의 ‘세계 100대 의학자’로 선정. 서울시교육청 자문위원, 가정법률상담소 교육위원, 법무부 여성아동정책심의위원으로 활동했다. 현재 대한소아청소년정신의학회 홍보이사로 활동중이다. 저서로는 『아이는 언제나 옳다』 『엄마 나는 똑똑해지고 있어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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