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중앙시평

경제안보, 과학기술혁신의 실행력이 관건

중앙일보

입력 2022.05.23 0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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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김명자 서울국제포럼 회장·한국과총 명예회장·전 환경부장관

김명자 서울국제포럼 회장·한국과총 명예회장·전 환경부장관

윤석열 대통령 취임 열흘 만에 한미 정상이 만났다. 기술동맹이 추가됐다. 대통령 취임식에는 2021년 노벨화학상 수상자 데이비드 맥밀런 프린스턴대 교수와 2013년 노벨생리의학상 수상자 랜디 셰크먼 버클리대 교수가 참석했다. 대통령 취임사는 과학기술혁신을 국정기조 수준으로 강조했다. 우리 헌법에 과학기술이 경제발전의 종속 개념으로 서술된 것을 상기하면 큰 변화다.

과학기술은 1962년 제5차 개정 헌법의 ‘경제’ 장(章)에 포함된 후, 1987년 개정으로 제9장 127조 1항에서 “국가는 과학기술의 혁신과 정보 및 인력 개발을 통하여 국민경제의 발전에 노력하여야 한다”로 정리됐다. 2018년 개헌 논의 때 한국과총은 과학기술의 독립적 가치를 명시해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 기후·국방·보건·환경·에너지를 비롯해 삶의 질과 사회적 이슈 해결에 과학기술혁신이 핵심이 된 세상에서 시대변화를 반영해야 한다는 취지였다.

과학기술혁신, 국가경쟁력의 근간
산업혁명의 동인은 기업가정신
우리도 대체불가 기술 확보하고
경제안보 위해 규제 혁신해야

근대사는 과학기술혁신이 국가경쟁력의 근간이자 지정학적 질서의 변수임을 웅변하고 있다. 산업혁명 선도국이 세계사의 주역이 되고 그 과정에서 혁신은 불가결의 요소였다. 1차 산업혁명(1760~1830)의 기술적 동인은 석탄·증기기관·직물산업·코크스제철법·철도였고, 사회적 동인은 자유시장경제에서 미래를 위해 당장의 위험을 무릅쓰는 기업가정신이었다. 그런데 1차 산업혁명은 국토면적이 두배이고 과학강국인 프랑스가 아니라 영국에서 일어났다. 프랑스처럼 강력한 교회나 국가의 간섭이 없던 영국에서 혁신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이후 산업화로 무장한 영국은 ‘역사상 가장 불명예스러운’ 아편전쟁을 일으켜 중국(청나라)에 씻지 못할 치욕을 입혔다. 그 기억이 살아있는 한 중국은 기술패권에 사활을 걸 수밖에 없을 것이다.

2차 산업혁명(1870~1930)의 본고장은 미국이었다. 철강·철도·정유·자동차·전기·통신에서 독점적 대기업이 약진했다. 그 무렵 영국은 1865년 자동차 적색기법으로 신기술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마차·기차 산업 보호를 위해 증기자동차의 시속을 마차 속도(3.2㎞)로 제한한 데다 자동차 1대당 운전사·화부(火夫)·기수(旗手)의 3명을 배정했다. 기수는 낮에는 붉은 깃발, 밤에는 붉은 등을 들고 자동차에 앞서서 걸어갔다.

1910년 영국의 노먼 에인절은 『위대한 환상』(The Great Illusion)에서 2차 산업혁명으로 세계경제의 상호의존도가 높아져서 전쟁으로 얻는 것은 없고 잃는 것만 커졌다, 그러니 전쟁이 일어날 이유가 없어졌다고 설파했다. 그런데 이 베스트셀러 초판 4년 뒤 사상 최초의 세계대전이 터진다. 다시 2차 산업혁명의 절정인 1929년 월가를 덮친 증시폭락은 세계적 대공황으로 번진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경기를 회복하고 최고의 기술강국이 된다.

사상 최대 규모의 산학연군관 복합체가 이끈 맨해튼 프로젝트는 ‘기술과 과학행정의 곡예’ 끝에 원자폭탄을 개발했다. 1945년 8월 원폭 투하로 일본은 항복했으나, “우리는 프랑켄슈타인을 창조했다”(미 NBC 라디오). 1944년 11월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원자폭탄 등 무기개발 담당의 과학연구개발국(OSRD) 국장 버니바 부시(MIT 부총장)에게 전후(戰後) 과학진흥에 관한 질의 서한을 보냈다. 전시(戰時) 과학연구 성과의 이용, 질병 퇴치, 연구활동 지원, 과학인재 양성의 네 가지 답을 달라는 내용이었다.

부시는 4개 위원회를 가동해 1945년 7월 ‘과학-끝없는 프론티어(Science The Endless Frontier)’를 펴냈다. 미국 역사상 최초이자 최후의 4선 대통령 루스벨트가 서거한지 석달 뒤였다. 과학의 진보로 좋은 일자리, 국가안보, 보건의료, 공공복리와 삶의 질 향상에 기여할 수 있는 정책 제안이 담긴 이 보고서는 지금도 불멸의 전설로 남아있다.

자원빈국으로서 한국전의 폐허를 딛고, 1953년 대비 60년 만에 GDP 3만배 상승을 기록하고 드디어 선진국 반열에 오른 대한민국. 그 기적적 성장과 사회발전은 인재 기반의 과학기술력과 산업경쟁력이 없었더라면 가능하지 않았다. 치열한 기술패권 경쟁과 글로벌 공급사슬 붕괴와 재편, 4차 산업혁명 등 위기와 기회가 혼재하는 초불확실성 시대, 과학기술혁신을 통한 경제안보는 국가 생존과 위상을 좌우하는 변수가 됐다.

과학기술은 만능이 아니며 역기능도 있다. 그러나 이른바 ‘팍스 테크니카’ 시대, 기술안보 기반의 경제안보는 최고의 안전보장이 아닐 수 없다. 경제안보 거버넌스는 국정 운영의 우선순위 재조정과 신속-과감한 의사결정, 통합적 대응이 요체다. 비용 대비 효과 측면에서 규제혁신은 필연이다. 재정 투입과 인력의 절대규모를 선진 기술강국 수준으로 키울 수 없다는 한계를 인정한다면, 선택지는 ‘갈라파고스섬’이라는 겹겹 규제의 통 큰 혁신으로 연구개발과 산업활동의 기를 살리는 길이다. 대한민국의 숙명적인 지정학적 조건을 극복할 수 있는 길도 전략기술 분야에서 당대의 대체불가 기술을 확보하는 기술정치학적 전략 이외에는 묘수가 없다. 이유 불문하고 여야 협치로 실행력을 발휘해 복합위기를 극복해야 할 때다.

김명자 서울국제포럼 회장·한국과총 명예회장·전 환경부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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