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하산 인사 오명 씻으려, 밤낮 없이 영화인들 만나

중앙선데이

입력 2022.05.21 00:02

업데이트 2022.05.21 0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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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9호 22면

[김동호 남기고 싶은 이야기] 타이거 사람들 〈8〉 영진공 사장 연임

원로영화인 초청 오찬 행사가 1990년 12월 20일 한국의 집에서 열렸다. 앞줄 왼쪽부터 이창근 감독, 김석민 작가, 배우 황해, 노경희, 김동호 영화진흥공사 사장, 배우 장동휘. [사진 김동호]

원로영화인 초청 오찬 행사가 1990년 12월 20일 한국의 집에서 열렸다. 앞줄 왼쪽부터 이창근 감독, 김석민 작가, 배우 황해, 노경희, 김동호 영화진흥공사 사장, 배우 장동휘. [사진 김동호]

나는 1980년 8월부터 88년 4월까지 8년간 문화공보부 기획관리실장을 지냈다. 이광표·이진희·이원홍·이웅희·정한모 등 다섯 장관을 모셨다. 문화예술진흥원장을 지낸 시인 정한모 장관 외에는 모두 언론사 사장 출신으로, 개성이 강한 분이었다.

차관도 김은호·허문도·박현태·김윤환·최창윤 등 다섯 분을 모셨다. 김은호 차관을 제외하곤 모두 국회의원 등 요직에 있다가 차관을 지낸 뒤 장관으로 승진한 ‘장관급 차관’이다. 이분들을 모시고 나는 최장수 기획관리실장의 기록을 세웠다.

88년 2월 25일 노태우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최병렬 장관과 강용식 차관이 부임했다. 나는 4월 4일 때마침 임기가 끝난 영화진흥공사(이하 ‘공사’) 사장으로 발령받았다. 28년의 공직생활을 마감하고 영화계로 발을 들여놓은 첫날이자 인생 항로를 바꾼 날이다.

영화감독협회(회장 조문진)에서 반대성명이 나왔다. 영화인이 아닌 퇴직 관료를 또다시 임명한 ‘낙하산’ 인사라는 것이었다. 취임식이 끝나고 자주 다니는 한남동 카페 ‘가을’에 갔더니 영화제작자 김원두 사장이 “왜 영화진흥공사에 왔느냐? 당장 사표 내라”고 윽박질렀다. 감독들을 초대한 오찬자리에서 두 분이 서로 언쟁하더니 밥상을 엎고 나가 버렸다. 정신이 바짝 들었다. ‘영화판에서 살아남자면 나도 영화인이 될 수밖에 없다’고 다짐했다.

이날 김동호 사장(앞 왼쪽)이 배우 전택이, 한형모 감독과 악수하고 있다. [사진 김동호]

이날 김동호 사장(앞 왼쪽)이 배우 전택이, 한형모 감독과 악수하고 있다. [사진 김동호]

영화계가 반대할 만도 했다. 73년에 공사가 창설된 뒤로 나보다 앞서 다섯 분의 사장이 거쳐 갔다. 문화공보부 예술국장을 지낸 초대 김재연 사장을 제외하고 2대 노영서, 3대 장근환, 4대 이진근, 모두 육군본부 정훈감 출신의 예비역 장성이었다. 내 전임 정탁 사장도 국방부 정훈감을 지낸 예비역 소장이었다.

내가 비록 주무부처에서 근무했다 하더라도, 영화인이 아니어서 반대했던 것이다. 나는 취임한 다음 날부터 밤낮을 가리지 않고 영화인들을 만났다.

4월 6일 오전 10시에 한국영화아카데미 원장 김소동 감독과 전임교수인 최하원 감독을 만났고, 낮 12시에는 이창근·김소동·김기영·임병호·최금동·황문평 등 원로 영화인들과 오찬을 했다. 4월 8일에는 조문진·임권택·이상언·고영남·양종해 등 영화감독과 유동훈·유열 등 시나리오 작가를, 4월 11일엔 유현목·김기덕·최하원·이승구 감독을 각각 점심에 초대했다. 13일에는 제작자인 황기성·이지용·이태원·강대선·정진우·한갑진 사장을, 14일엔 곽정환·도동환·신성일·박태환·김재웅 사장과 각각 오찬을 함께했다.

‘천상의 별’이 된 강수연 명복 빌어

이어령 문화부 장관(왼쪽)에게 업무보고하는 김동호 사장, 91년 2월 2일.

이어령 문화부 장관(왼쪽)에게 업무보고하는 김동호 사장, 91년 2월 2일.

15일에는 호현찬·안병섭·김종원·이영일·허창·김진한 평론가를, 18일에는 노경희·윤양자·정일성·이성춘·김남진·김강일 등 원로 배우와 촬영 감독을 각각 오찬에 초대해 의견을 들었다. 이제는 이 가운데 많은 분이 타계했지만, 기억이 새롭다.

오찬을 제외한 시간에는 영화단체를 돌면서 현안을 논의했다. 영화 기자들도 개별적으로 만나 의견을 들었다. 4월 19일엔 언론사 논설위원단을 오찬에 초대했다.

이렇게 영화계 의견을 바탕으로 영화진흥계획을 마련한 뒤, 5월 16일 정한모 문화공보부 장관에게 보고하고 시행에 옮겼다. 소재 및 시나리오 공모사업, 영화평론지 창간 지원, 소형영화 활동 지원, 필름보관소 독립법인화(현재 영상자료원), 대종상영화제의 영화인협회 이관 등을 당시 새롭게 시행했다.

그러면서 원로영화인과 단체장뿐 아니라 젊은 감독들과도 자주 어울렸다. 90년 1월 19일 신승수·장길수·장선우· 박광수·유진선·유영진·진유영·박종원·곽재용 감독을 초대해서 저녁을 샀다. 2월 1일엔 이세민·강우석·김정진·안재선·정찬우·이미래 감독과 저녁을 함께했다. 2월 24일엔 이른바 ‘15인회’ 감독들, 박철수·장선우·김정현·박광수·이장호·정지영·이명세·손경식·김유진·강우석 감독들을 저녁에 초대했다. 이들은 나중에 ‘오영감(오늘의 감독)’으로도 불렸다.

그뿐만 아니라 영화계의 크고 작은 행사에 모두 나갔고, 경조사는 원근과 친소를 가리지 않고 참석했다. 재임 4년간 이렇듯 밤낮으로 영화인들과 어울리면서 나는 ‘준영화인’이 되어 갔다. 이런 과정에서 ‘한국영화의 해외진출’과 ‘종합촬영소의 건립’이 가장 중요한 과제라고 판단해, 임기 중에 이 두 과제에 집중했다.

임권택 감독의 ‘아제아제바라아제’로 89년 모스크바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배우 강수연(왼쪽)과 김동호 영진공 사장. [사진 김동호]

임권택 감독의 ‘아제아제바라아제’로 89년 모스크바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배우 강수연(왼쪽)과 김동호 영진공 사장. [사진 김동호]

한국영화를 해외에 알리기 위해 몬트리올·모스크바 등 주요 국제영화제에 대표단을 구성해 참가했다. 몬트리올영화제에서는 신혜수가 여우주연상을, 모스크바영화제에서는 강수연이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강수연은 87년 베니스에 이어 세계 4대영화제로 인정받고 있던 모스크바영화제에서 연달아 여우주연상을 수상함으로써 한국영화사상 최초로 ‘월드스타’가 됐다. 그 후 33년간 강수연과 나는 부녀처럼, 남매처럼, 친구처럼 격의 없이 지내왔다. 21세의 너무 젊은 나이에 왕관을 쓴 것이 ‘멍에’였을까. 강수연은 ‘월드스타’의 품위를 지키기 위해 절제하면서도 강인하게 살아왔다. 돌아가신 부모와 큰 오빠를 모시고 여동생을 돌보면서 억센 가장으로 힘들게 살아왔다. 강수연은 지난 5일 뇌출혈에 의한 ‘심정지’ 상태로 병원 응급실로 실려가 7일 55세의 젊은 나이로 끝내 타계했다. 나는 ‘영화인장’의 장례위원장을 맡아 그를 스타로 만든 임권택 감독과 빈소를 지키면서 ‘천상의 별’이 된 고인을 애도했다.

이와 함께 당시 한국과 국교를 수립한 소련·헝가리·루마니아와 우즈베키스탄·카자흐스탄에 ‘한국영화주간’행사를 마련해 순회 상영하기도 했다.

해외영화제에서 수상하면 제작사에 보상금을 지급하고, 관련 영화인에게 훈·포장을 수여하는 것을 제도화했다.

영화진흥공사에 부임했을 무렵 공사는 존폐위기에 처해 있었다. 외화수입의 대가로 영화제작사가 납부하는 영화진흥기금이 공사의 유일한 수입원이었다. 당시 영화제작과 수입은 20개 영화사에 국한돼 있었다. 외국영화 수입은 각 사에 1편씩 허용하되 편당(수입쿼터) 1억원의 영화진흥기금을 납부하게 했다. 대종상에서 수상한 작품에 대해선 부상으로 외화수입 쿼터 1편씩을 부상으로 주고, 1억 5000만원의 진흥기금을 거뒀다.

그런데 영화법 개정(85년 12월 31일)으로 86년 7월 1일부터 영화의 제작 및 수입이 자유화되면서 영화진흥기금이 사실상 폐지됐다. 그전까지 이렇게 갹출한 진흥기금이 연간 30억원 정도였는데 외국영화 수입이 개방되면서 진흥기금을 거둘 수 없게 된 것이다.

공사 세입구조 전면 개편, 존폐위기 극복

공사가 살길은 국고보조기관으로 전환하는 것뿐이었다. 문화공보부와 예산 당국(경제기획원)을 찾아다니며 설득했고, 그 결과 89년 신규로 25억원, 90년엔 56억원의 정부예산을 각각 확보할 수 있었다. 극장모금으로 조성하던 문화예술진흥기금 중 공사에 대한 지원금을 종전의 10억원에서 88년 25억원, 89년 40억원, 90년 50억원으로 각각 늘려나갔다. 이처럼 공사의 세입구조를 전면 개편함으로써 존폐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사업도 크게 확장할 수 있었다.

나는 3년 임기가 끝나고 91년 4월 3년 더 연임됐다. 연임된 뒤 8개월쯤 지난 91년 12월 20일 개각으로 이수정 대통령 공보수석비서관이 문화부 장관으로 부임했다. 이수정 장관은 한국일보 기자 출신으로 71년 6월 취임한 윤주영 문화공보부 장관의 비서관으로 정부에 몸을 담았다. 그 뒤 주영국 공보관, 주네덜란드 공보관과 해외공보관의 기획 및 문화부장을 거쳐 공보국장(79년 12월 20일~80년 3월 31일)을 두루 지냈다. 함께 근무했기에 서로 잘 아는 사이였다.

92년 1월 21일 오전 10시 30분 영화진흥공사에 대한 업무보고가 끝난 뒤인 낮 12시에 근처 식당으로 옮겨 두 시간 가까이 장관과 오찬을 함께 했다. 장관께서는 전관 개관을 1년 앞둔 ‘예술의 전당’의 운영에 관해 내 의견을 들었다. 한 달쯤 지난 2월 25일 ‘이사장’ 중심의 운영체제에서 ‘사장’ 중심의 책임 경영체제로 바뀐 예술의전당 초대 사장으로 부임했다.

취임한 뒤 부서별로 저녁을 사면서 직원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였다. 문화계 인사들의 조언을 받아 전관 개관 뒤의 예술의전당 운영방안을 마련했다. 장관 보고를 거쳐 4월 20일 정원식 국무총리에게 보고하게 됐다. 이날 오전 이수정 장관이 전화해 차관으로 함께 일하자고 했고, 그날 오후 문화부 차관으로 발령받았다. 예술의전당으로 간 지 두 달이 채 안 돼 차관으로 문화부에 복귀한 것이다. 공직자가 옷을 벗고 나갔다가 다시 들어오는 예는 흔치 않다. 동아일보에 ‘꺼진 불도 다시 보자’는 제목의 기사가 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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