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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주정완의 시선

더 내고 덜 받는 연금개혁, 마지막 기회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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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주정완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주정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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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정부가 임기를 시작하면서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젖혔다. 지난 16일 윤 대통령이 국회 시정연설에서 선언한 연금개혁이다. 전임 정부가 무책임하게 미뤄둔 숙제를 새 정부가 떠맡은 셈이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다. 윤 대통령으로선 개혁의 과정에서 터져 나올 저항과 반발이 부담스럽겠지만 반드시 뚫고 가야만 하는 길이다. 새 정부의 연금개혁이 ‘희망의 상자’가 되느냐, 그렇지 않으냐에 한국 사회의 미래가 달렸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마침 연금개혁의 타이밍은 괜찮은 편이다. 다음달 1일 지방선거가 끝나면 내후년 4월 국회의원 총선까지는 2년 가까이 전국 단위의 선거가 없다. 당장 눈앞의 표에 연연하지 않고 소신을 갖고 개혁 과제를 추진할 수 있는 적기다. 지난 대선 TV토론에서 주요 정당 후보들이 예외 없이 연금개혁의 당위성에 동의한 것도 개혁의 동력으로 작용할 수 있겠다.

선거 없는 약 2년 개혁 골든타임
24년째 동결한 보험료율 올리고
물가 연동한 조절장치 검토해야

연금개혁의 큰 방향은 명확하다. 더 내고 덜 받는 방식의 구조 개편이다. 이 과정에서 다양한 이해 관계자들의 양보와 타협이 필수다. 연금개혁으로 다소 손해를 보더라도 대승적인 차원에서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하다. 어느 쪽이든 조금도 손해 보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린다면 사회 전체의 미래가 위태로워질 수 있다.

먼저 더 내는 부분부터 얘기해 보자. 무엇보다 ‘보험료율 9%의 벽’을 반드시 깨야 한다. 현재 국민연금 가입자는 소득의 9%를 연금 보험료로 내고 있다. 직장 가입자라면 회사가 절반(4.5%), 근로자가 절반(4.5%)을 나눠서 부담한다. 원래 국민연금은 도입 후 5년마다 보험료율을 인상하도록 설계했다. 그런데 1998년 보험료율을 9%로 올린 이후 올해로 24년이나 동결한 상태다.

보험료율 9%는 넘어서는 절대 안 되는 마지노선이 아니다. 연금 보험료율을 10% 이상인 두 자릿수로 하지 않으려는, 그래서 연금 가입자의 반발을 피하려는 정부와 정치권의 무책임에 불과하다. 한꺼번에 큰 폭으로 보험료율을 올리기 어렵다면 일정한 간격을 두고 단계적인 인상이라도 추진했어야 했다. 많이 늦었지만 이제라도 보험료율의 합리적인 인상안에 사회적 합의를 끌어내야 한다.

다음으로 덜 받는 부분이다. 보험료율 인상보다 훨씬 어려운 사안이다. 이미 연금을 받고 있거나 조만간 받아갈 기성세대가 미래를 생각하는 마음으로 기득권을 일부 양보해야 한다. 우리보다 앞서 연금 고갈의 문제를 겪은 일본의 사례를 살펴보자. 일본은 2004년 ‘매크로 경제 슬라이드’라고 부르는 자동조절장치를 도입해 운영하고 있다. 용어는 낯설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일리가 있는 개념이다. 연금 수급자의 통장에 찍히는 금액(명목 지급액)은 줄지 않게 하면서 실질적인 연금 지급액을 깎는 구조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예컨대 지난해 월 100만원을 받았고 물가 상승률은 3%라고 가정하자. 그러면 올해는 월 103만원을 받아야 실질적인 돈 가치가 같아진다. 이때 102만원을 받는다면 어떨까. 물가 상승률을 고려한 실질 돈 가치는 낮아진다. 하지만 연금 수급자의 입장에서 명목 지급액은 줄지 않고 다소 올라간다. 이런 식으로 연금 수급자의 불만을 덜면서 장기적으로 연금 재정의 안정을 추구할 수 있다. 적게 내고 많이 받는 연금의 기형적인 설계를 원래보다 조금 덜 받는 방식으로 조정하는 것이다.

사실 정치인 입장에서 연금개혁은 유권자의 표를 얻는 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상식적으로 연금 지급액을 깎는 데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렇다고 개혁의 혜택을 볼 미래 세대가 광범위한 지지를 보내는 것도 아니다. 이 중에는 어려서 투표권이 없거나 아직 세상에 태어나지도 않은 이들도 많다. 이런 미래 세대가 개혁의 효과를 피부로 느끼는 건 먼 나중의 일이다.

그래도 연금개혁을 서둘러야 하는 이유는 차고 넘친다. 연금 보험료를 내는 젊은 세대는 갈수록 줄어들고 보험금을 받아갈 노인 세대는 빠르게 늘어난다. 한국의 인구 고령화 속도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 국회 예산정책처가 2020년 7월 펴낸 보고서를 보자. 국민연금 지출이 수입보다 많아져 적자로 돌아서는 시점은 2039년, 국민연금이 한 푼도 남지 않고 고갈되는 시점은 2055년으로 전망했다. 통계청의 인구 추계를 기초로 각종 변수를 종합해 계산한 결과다. 그런데 현실은 2년 전 계산보다도 비관적이다. 출산율은 더 낮아지고 고령 인구 증가 속도는 더 빨라졌다. ‘냄비 속 개구리’처럼 당장 절실히 피부로 느끼지 못한다고 개혁을 회피하면 연금 재정의 파탄은 시간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