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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안동현의 이코노믹스

악몽 같은 스태그플레이션이 다가온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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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지구촌 인플레이션 충격

안동현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안동현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물가가 맹위를 떨치고 있다. 식사 한 끼 마음 편하게 하기가 무섭다. 그나마 저렴한 가격으로 학생들이 끼니를 해결하던 대학가 식당이나 카페마저도 가격 인상으로 우울한 분위기다. 장바구니 물가 역시 마찬가지다. 지난달 25일 한국소비자단체협의회 발표에 따르면 전년 동기와 비교해 밀가루와 식용유 가격이 10% 이상 상승했고, 달걀 한 판의 가격이 7000원대까지 올라섰다. 유류세 인하에도 휘발유와 경유 가격은 리터 당 2000원에 육박한다. 마침내 4월 소비자 물가상승률이 4.8%로, 2008년 금융위기 이후 162개월 만에 최고치를 찍었다.

생필품·유가 등 전방위 물가 앙등
1970년대 말 살인적 현상 되풀이

스리랑카 등 개도국에 피해 집중
IMF, 연내 12개국 채무불능 예상

내년 초반까지 상승세 이어질 듯
윤석열 정부, 비상계획 가동해야

개발도상국은 초토화 상태

현재 진행되고 있는 인플레이션은 가히 살인적이다. 미국의 3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무려 8.5%다. 악몽과 같던 1970년대 말에서 80년대 초의 스태그플레이션 이후 최고 수치다. 미국만이 문제가 아니다. 지구촌 곳곳이 인플레이션에 몸살을 앓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직격탄을 맞은 유로존은 7.5%다. 아시아 역시 예외가 아니다. 요즘 잘 나가는 대만의 경우 3.27% 정도로 선방하고 있고 30년간 디플레이션의 늪에 빠져 있는 일본의 1.2%는 예외적일 뿐이다. 대부분의 아시아 국가들이 4~13%선에서 허덕인다.

개발도상국은 이미 초토화되고 있다. 특히 경제 실정(失政)이 겹친 나라들은 디폴트 위험에 처해 있다. 스리랑카가 첫 번째 희생양이다. 지난 3월 18.7%를 기록하는 등 석 달 연속 10% 중·후반대의 물가난을 겪더니 마침내 510억 달러에 달하는 대외부채 상환을 유예하면서 단기 디폴트를 선언했다. 이외 잠비아·에콰도르·레바논 등이 이미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 요청을 신청한 상태이고, 파키스탄·튀니지·이라크·이집트·가나·페루·에티오피아 등 초(超)인플레이션을 겪고 있는 상당수 개도국이 달러 가치 폭등에 따른 디폴트 위험에 처해 있다. IMF는 저소득 국가 73개 중 과반이 넘는 41개국이 심각한 외화 부채 위험에 노출돼 있고, 이중 적어도 12개국은 연내 디폴트를 선언할 것으로 예상했다.

고통의 예고편에 불과할 수도

1991년 저축부대조합의 연쇄 부도로 미국이 경기침체에 빠지자 미 연방준비제도(연준, Fed)는 기준금리를 8.5%에서 3%까지 낮춰 대응했다. 경기가 회복해 연준이 94년 5.5%로 금리를 인상하자 95년 멕시코가 무너지는 ‘페소 위기’가 발발했다. 이 여파로 남미의 대부분 국가가 위기에 처했고 이러한 외환위기의 불씨는 결국 97년 아시아 외환위기로 번져 우리나라 역시 IMF에서 구제금융을 받는 치욕을 겪었다. 그 악몽의 추억이 다시 도래하고 있다. 이번 달부터 본격화되는 미 연준과 인플레이션 간 치열하고 지난한 전투 속에 많은 신흥국이 유탄에 쓰러질 것으로 우려된다.

문제는 이러한 인플레이션이 앞으로 다가올 고통의 예고편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이론적으로 생각하면 생산자물가지수(PPI)와 소비자물가지수(CPI)는 선행-후행(lead-lag) 관계를 갖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기업의 생산 활동에 필요한 원자재 등의 가격이 오르면 생산자 물가가 먼저 오르지만, 가격의 경직성으로 인해 제품 가격에 즉각적으로 이전되지 않는다. 그러나 생산자 물가는 결국 기업이 해당 상품을 생산하는 한계비용과 유사하기 때문에 비용의 증가가 추세적일 경우 결국 소비자 물가에 전가될 수밖에 없다.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현재 우리나라의 생산자 물가를 보면, 올해 3월 기준 116.46(2015년=100)으로 전년 동월 대비 8.8% 상승했으며 2020년 12월 이후 16개월 연속 상승 추세다. 〈그림 1〉은 1960년대부터 우리나라의 소비자 물가 상승률과 생산자 물가 상승률을 나타낸 것인데, 이를 보면 두 물가 상승률이 거의 유사하게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다. 상관계수로도 전체 샘플 기간에서 0.88로 매우 높은 수치다. 한편 최근의 상황을 보면 생산자 물가가 최근 10년간 가장 가파르게 상승하는 상황에서 소비자 물가의 상승률은 아직 이에 미치지 못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반면에 3월 기준 미국의 생산자물가지수 상승률은 11.2%로, 같은 기간 소비자물가지수 상승률 8.5%가 이에 근접한 수치였음을 생각하면 한국 경우 소비자 물가 상승이 아직 생산자 물가 상승률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고 있을 개연성이 있다. 미 노동부가 발표한 것처럼 에너지 가격 상승이 생산자 물가 상승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는 점에서 미루어 보면 한국의 경우 생산자 물가는 국제적인 수준의 충격(shock)이 이미 반영됐지만, 소비자 물가 측면에서 원가 상승의 여파가 완전히 반영되지 않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인플레이션 오면 수년간 지속

또 한 가지 명심할 것은 인플레이션의 주요 특징 중 하나가 ‘지속성’이라는 점이다. 실제로 학계에서 인플레이션의 시계열적 특성인 ‘정상성(stationarity)’에 관한 실증 분석한 결과를 보면 지속성이 매우 높다. 쉽게 말해 지난달 인플레이션이 5%라면 다음 달 인플레이션도 5% 내외가 될 확률이 매우 높다. 따라서 한번 초인플레이션이 발생하면 정상화되는 데 상당한 시간이 소요된다. 과거 볼커(Paul Volcker) 연준 의장이 주도했던 통화 긴축은 스태그플레이션을 잡는 데 1979년부터 1983년까지 4년의 세월이 소요됐고, 그 기간 -2% 내외의 경기침체를 두 번 겪는 더블 딥(double dip)을 경험해야 했다.

볼커는 1979년 8월 2차 유가 파동으로 물가상승률이 두 자릿수를 기록한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서 등판해 기준금리를 10%에서 10월까지 여섯 차례에 걸쳐 15.5%로 무려 5.5% 포인트 올리면서 인플레이션에 대해 확실한 선전포고를 했다. 이후 레이건 대통령이 집권한 1981년 3월에는 기준금리를 20%까지 끌어올리며 결국 두 자릿수대의 인플레이션을 1983년에는 3% 초반까지 끌어내리는 데 성공했다.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그림 2〉는 볼커 의장 취임 전후로 미국의 기준금리와 인플레이션의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자산 가격이 폭락하고 실업률이 10% 이상으로 폭증하는 등 미국 국민의 볼커에 대한 원망은 극에 달했다. 연준 빌딩을 둘러싼 시위와 위협에 볼커는 권총을 지니고 다닐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그만큼 한번 발생한 초인플레이션을 잡는 데 오랜 시간이 소요된다.

Fed, 가파른 정책금리 인상 예고

따라서 지난해 5월부터 본격화된 인플레이션이 정점을 찍고 하락해 대부분의 선진국에서 2%로 설정한 정상적인 수치로 내려가려면 우크라이나 전쟁과 같은 돌발 변수가 사라지는 낙관적인 상황이 오더라도, 최소 1년은 소요될 것으로 전망된다.

물론 시장은 그리 낙관적이지 않다. 지난 5월 4일 연준은 22년 만에 정책금리를 0.5%포인트 인상했다. 앞서 3월 미 연준 위원들은 기준 금리가 올해 말까지 2%, 내년 말까지 3%에 도달할 것으로 예상했다. 선물시장(federal fund futures)은 더 비관적인데 정책금리를 연말까지 2.75%, 내년 상반기까지 3.25%까지 상승할 것으로 예상한다. 이에 따르면 인플레이션 정점은 내년 초쯤으로 예상된다.

하반기 경기반등 vs 내년이 더 심각

미국의 1분기 경제성장률은 시장의 1.1%의 예측치와 달리 -1.4%로 ‘깜짝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다. 이에 대한 시장의 해석은 ‘신호 (signal)’란 설과 ‘잡음 (noise)’이란 설, 두 가지로 나뉜다.

먼저 잡음이라는 설은 마이너스 성장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군비지출이 8.5% 감소한 것과 사상 최대 무역수지 적자가 주요 원인이다.

군비지출은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지원이 본격화되는 만큼 회복할 것이고 무역수지 적자 원인 역시 기업들의 재고물량 확보 차원에서 이루어진 만큼 오히려 하반기엔 반등을 일으킬 것이라는 설명이 가능하다.

반면에 신호라고 주장하는 측에서는 미국의 경제 체질에 분명 이상 신호가 주어진 것이라고 주장한다. 골드만 삭스는 내년 상반기에 경기침체가 올 가능성을 35%로 보고 있고, 도이치뱅크의 경우 내년과 내후년 ‘심각한 침체’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고 경고했다. 윤석열 정부 역시 최악의 시나리오를 가정하고 비상계획을 가동해야 한다.

안동현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