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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약탈적 저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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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이경희 기자 중앙일보 P디렉터
이경희 이노베이션랩장

이경희 이노베이션랩장

‘약탈적(predatory) 저널’이란 돈만 내면 심사 과정 없이 논문을 게재해줘 연구 생태계를 어지럽히는 학술지를 가리킨다. 그런 저널에 논문을 실었다는 것만으로도 연구자는 명성에 타격을 입는다. 일단 출판된 논문은 다시 정상적인 학술지에 투고할 수도 없다. 결과적으로 투고자의 돈과 시간·명성을 약탈해간다. 한국연구재단의 ‘약탈적 학술지와 학회 예방 가이드’에 따르면 엉터리 학술지인 줄 모르고 속아서 투고하는 순진한 피해자도 있지만 알면서 악용하는 이들도 있다. 승진·채용 등에 필요한 논문 성과를 채우거나, 학계 검증을 통과하기 어려운 불합리한 이론 등을 정당화하기 위해 약탈적 저널에 투고하는 것이다. 이를 활용하는 고교생도 있다.

 강태영 언더스코어 대표와 강동현(미국 시카고대 박사과정)씨는 2001~2021년 해외학술지에 등재된 213개 주요 고등학교(국제학교 제외) 학생 논문 558건을 찾아냈는데, 그중 72건이 의심스럽거나 약탈적인 학술지에 실렸다고 한다. 이런 경우는 대학 입시에 논문 활용 금지를 강화해나간 교육부 정책과 관계없이 증가세를 나타냈다. 가령 2020년에 나온 논문 16건 중 6건이 엉터리 저널에 실렸다. 뉴스타파 보도에 따르면 국제학교 재학 중인 한동훈 법무부 장관 후보자의 딸이 논문을 출판한 곳도 모두 약탈적 학술지다.

 교육부는 전국 대학이 조사한 2007~2018년 미성년 공저자 논문은 총 1033건이고, 그중 미성년자 82명이 부당 저자로 확인됐다고 지난달 밝혔다. 국내 대입에 논문을 활용한 10명 중 5명이 입학 취소됐다. 외국대학에 진학한 부당 저자 36명에 대해서는 별다른 조치가 없었다.

교육부 보도자료 캡처

교육부 보도자료 캡처

 아빠·엄마 찬스로 국내 연구진의 논문에 이름을 올리거나 약탈적 저널에 투고하는 일 모두 이제는 국내 대학보다 해외 대학을 노린 비윤리적 행위일 가능성이 높다. 해외 대입용 금수저 스펙 만들기는 마치 딴 세상일처럼 보인다. 그러나 미씨USA 등 재미 한인 커뮤니티는 한 후보자 딸의 이슈로 들썩이는 듯하다. 한국 고교생들이 가짜 스펙으로 미국 대학을 속이는 바람에 정직하게 입시를 준비한 아이들도 동급으로 묶일까 봐서다. 비윤리적이어야 좋은 대학 가고 사회지도층 된다고 가르치는 나라가 국제 사회의 신뢰인들 얻을 수 있을까.

참고자료

[두 번째 보고서] 논문을 쓰는 고등학생들에 대해 조금 더 알아봅시다(강태영, 강동현)
'약탈적 학술지와 학회 예방 가이드'(한국연구재단)

고등학생 이하 미성년 공저자 연구물 검증 결과(교육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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