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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의 향기

극장에서 영화를 본다는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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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노가영 트렌드북 작가

노가영 트렌드북 작가

서울로 올라와 대학을 다니면서 가장 신기했던 건 지하철이 아니라 멀티플렉스였다. 강변역에 내려 테크노마트 10층에 발을 딛던 순간의 콩닥콩닥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대학 졸업 후 주가가 꺾일 기미를 보이지 않던 게임사에도 합격했지만, 망설임 없이 극장을 선택했다.

매주 수십 편의 영화를 공짜로 보고 내가 선택한 영화를 관객들이 관람하는 것, 이보다 큰 낭만이 어디 있을까 싶었다. 이후 물 만난 물고기마냥 평일 주말을 가리지 않고 극장쟁이가 됐고, 주말이면 신규 오픈하는 극장을 찾아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녔다. 매주 스크린이 늘어나도 객석 점유율은 차오르고 그렇게 한국의 영화 관객 수는 2013년 2억 명을 돌파했다. 할리우드 관계자가 인구 5000만 명의 땅에서 ‘겨울왕국’이 1000만 명을 두 번 달성한 것에 대해 신기한 국가라고 했을 정도다. 말 그대로 멀티플렉스의 화양연화(花樣年華) 시절이었다.

팬데믹에 ‘안 가도 되는 곳’ 인식

극장은 연대와 공감의 귀한 공간

온라인 플랫폼을 뛰어넘는 경험

하지만 이제 극장은 한물간 공간이 됐다. 산업적으로는 60~70%의 관객 손실이 있었으며 연초까지 ‘스파이더맨:노 웨이 홈’의 대흥행으로 분위기를 끌어올렸으나 코로나19 오미크론 변이 확산으로 주춤하다. 극장 관람에는 콘텐트 외에도 ‘관계 지향’이라는 목적도 있다. 엄마가 “주말에 ‘해적’ 보러 갈까”라고 말하면 아빠와 딸은 극장 근처의 맛집을 검색하는 식이다. 이런 영화 외적인 요인들이 팬데믹 시대에 극장을 ‘굳이 안 가도 되는 곳’으로 전락시켰을 거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필자는 다시 이 지점들이 극장을 회복하는 요인이 될 것으로 판단한다. 인간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사회를 이루며 살아가는 고등동물이다. 대면 활동이 불가했던 팬데믹 기간 우리는 디지털 안에서 이를 해소하려고 파편화한 커뮤니티에서 연대하거나 ‘밈(Meme)’으로 공감대를 쌓았다. 반면 극장에서 영화를 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지인들과 같은 콘텐트를 같은 시간대에 본다는 것이다. “넷플릭스에서 ‘지금 우리 학교는’ 봤니” 와는 사뭇 다르다. 친구와 ‘듄’을 관람하고 SF 원작과 압도적인 영화음악에 대해 티키타카 하는 들숨 날숨의 호흡이 있다.

오미크론이 한창이던 연초 지방에 다녀오던 길이었다. 용산역 택시 승강장에서 아이파크몰을 바라보는데 울컥 올라왔다. 수백 개 긴 계단에 손을 꼭 잡은 젊은 연인들이 빼곡히 앉아있는 풍경을 보며 ‘우리 젊은이들이 어디에서 청춘을 보내고 있나’라는 안타까움에 마음이 복잡했다. 파리 몽마르트르 계단의 운치가 아닌 방역에 갇혀 갈 길을 잃은 청춘에 대해 애잔함이다.

극장이 영화 매출의 70%를 책임져 온 큰 형님 자리는 뺏겼음에도 ‘관계 지향’과 ‘나들이’라는 묘미가 더해진 명확한 대체재가 없는 ‘공간형 채널’이라는 점은 되짚어 봐야 한다. 이 지점이 극장영화가 Film, Cinema, Movie, Motion Picture 중에서도 촬영 기법과 공간성이 내포된 Film이나 Cinema로 불리는 이유다.

할리우드 영화 공급이 정상화되고 있다. 거리두기 지침이 속속 해제됨에 따라 한국의 대작들도 상반기에 순차적으로 공급되면 우리는 극장에 다시 가게 될 것이다. ‘넥스트 노멀 시대’에 진입하더라도 말이다.

코로나 치료제가 보급되더라도 구석구석의 트렌드 변화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이다. 1990년대에 2차 시장이 커진 미국과 달리 한국은 영화 매출을 오롯이 극장에 의존하던 기형적 구조였다. 이 같은 올드 스쿨이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와 커머스 제휴에다 공간 플랫폼으로 변신까지 치열한 목표를 실현해가고 있다. 호우시절(好雨時節)이란 말처럼 좋은 비는 때를 알고 내린다고 했던가. 코로나 사태로 극장업이 2년 이상 전무후무한 보릿고개를 보내고 있지만, 이것이 때맞춰 내리는 단비 역할을 하길 바란다. 지금 극장업은 ‘멀티플렉스 2.0’ 시대로 가기 위한 텃밭을 다져야 한다.

“사람들이 극장에 다시 가게 될까”라는 실없는 필자의 질문에 정보기술(IT) 최전방에 있는 후배들은 이구동성 “예스”라고 답했지만, 이유는 제각각이다. “코로나가 아니라 볼 영화가 없어서 안 간 건데요” “퇴근 후 맡는 팝콘 냄새는 힐링이죠” “선배가 마블 코믹스 세대라면 우린 마블 극장판이랑 같이 컸어요”.

하나같이 영화를 Cinema로 해석한 답변들이다. 압도적인 규모의 ‘코돌비’나 ‘용아맥’에서 삼삼오오 ‘미션임파서블7’이나 ‘아바타2’를 관람하려는 수요는 앞으로도 여전할 것이다. 따지고 보면 옆 테이블의 대화까지 들리는 커피숍이나 식당보다 극장이 훨씬 안전하다는 것을 우린 안다. 5월에 기대작도 많다. 노 마스크 시대가 온다고 한다. 우리 이제 극장 나들이 가자.

노가영 트렌드북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