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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의 향기

“누구냐, 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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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최명원 성균관대학교 독어독문학과 교수

최명원 성균관대학교 독어독문학과 교수

“누구냐, 넌?” 영화 ‘올드 보이’에서 유명해진 대사 한마디다. 하지만 이보다 더 심오한 질문은 “나는 누구인가?”이다. 소크라테스가 당대에 가장 우월한 지식인으로 손꼽힐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스스로 모르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현자였기 때문이다. 그래서인가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은 입 밖으로 내기는 쉬워도 그 뜻을 헤아리기는 너무도 어렵다.

언어와 관련된 강의를 하면서 학생들에게 이래저래 마주하게 되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상황을 떠올려 보라고 할 때가 있다. 그 대화에서 자신들의 언어가 어떤 다양성으로 표현되는지 살펴보라는 요구와 함께.

영화 ‘올드 보이’의 유명한 대사
상황·상대에 따라 달라지는 나
각자의 삶 속에 담긴 수많은 모습

우연히 친하게 지내던 후배 교수의 전화 통화를 엿듣게 되었다. 물론 의도적인 것은 아니었는데, 대화 중 걸려온 전화를 받게 된 후배 교수의 말소리가 한순간 달라지고 있었다. 평소 부드럽고 사근사근하던 그의 말투는 갑자기 근엄하고도 묵직한 목소리가 되어 권위와 어른스러움을 한껏 드러냈다. 전화기 너머의 통화 상대는 바로 그의 동생이었다. 맏이로 자라 언니며 누나이기도 한 그가 보여준 순간적인 변화는 내게 당혹감으로 다가왔다. 맏이의 권위를 행사해보지 못한 나는 그의 말투와 음색의 변화에 주눅이 들 만큼 쪼그라들었다. 내가 몇 년 선배임에도 그 후배가 내 언니 같았다.

음성통화에서는 상대방의 모습을 볼 수 없음에도 상관의 전화를 받는 하급자의 태도가 안쓰럽다. 폴더 폰 마냥 연신 허리를 구부리며 “예. 예. 예”를 연발한다. 그러던 그 또한 통화를 마치는 순간 낯빛을 바꾸면서 주변의 하급자들을 향해 “자! 자자~”를 외치는 또 다른 상급자의 모습으로 급변한다. 드라마에서 자주 보게 되는 장면 이야기다.

우리 모두는 얼마나 많은 모습을 각자의 삶 속에 녹여내고 있을까. 단박에 맏이의 역할로 바뀌는 후배 교수처럼, 나 또한 어떤 상황에서 누구와 상대하고 있는가에 따라서 태도와 목소리를 달리한다. 교정에서 마주치는 대학생들도 이들의 대화 상대가 교수, 선후배, 동급생 학우인지, 또 이들이 동성 혹은 이성인지, 연인 관계인지에 따라서 말투와 음색이 완전히 달라진다. 애정 표현을 위해서는 연인들뿐만이 아니라 다 큰 자식들도 아기들이 내는 ‘혀 짧은 소리’를 마다치 않는다. 멀쩡하던 혀가 갑자기 짧아지면서 사랑스러움과 귀여움이 한껏 묻어난다. 이런 말투는 상대방의 보호본능을 자극하기도 하고, 어리광스러운 애교를 담아 원하는 바를 얻어내는 효과도 있다.

나이가 들며 성장하는 것은 삶의 주변 또한 넓어지고 다채로워지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다. 다양한 환경에서 새로운 관계들이 만들어지고, 그때그때 상황에 걸맞은 태도와 말투를 자연스레 익히게 된다. 또 이렇게 성장하는 동안 우리 몸을 이루는 세포들은 끊임없는 사멸과 생성을 반복한다고 했다. 애벌레에서 나비로의 탈바꿈이나, 제 허물을 한 꺼풀 온전히 벗어내는 뱀의 탈피는 아니더라도, 나 또한 태어날 적 가지고 있던 세포들은 지금쯤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을 텐데. 긴 시간 야금야금 갈아치운 세포들로 어느 날엔가 완전히 새로워졌을 나는 여전히 같은 나일까?

대학 시절 강의실에서 들었던 “과거의 너와 지금의 네가 같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래?”라는 질문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답을 찾고 있다. 기억 속에 답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래서인가 기억을 잃는 것은 내가 누군지도 모르게 되는 것이라 했다. 올챙이가 어느 날 개구리가 되듯이 하루 만에도 조금씩 달라지고 있을 나는, 기억에 기대어서 그때와 지금 그리고 미래에도 같은 나일 수 있을까.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곱씹어 보는 동안, 요사이 유행한다는 꼰대의 육하원칙이 씁쓸한 여운을 남긴다. 글쓰기의 기본이라는 육하원칙의 첫 번째인 ‘누가’는 꼰대에게 “내가 누군지 알아?”란다. 사람들이 알아주기 원하는 ‘이런 사람’에 그는 자신의 어떤 모습을 투영시키려는 것일까. 맥락은 완전히 다르지만, 드라마 ‘이태원 클라쓰’에서 손꼽히는 대사 하나가 어쩌면 반전의 답이 될지도. “네가 너인 것을 다른 사람에게 납득시킬 필요 없어.”

누구나 단 한 가지의 모습만으로 하루를, 일생을 살지는 않는다. 하덕규의 시 ‘가시나무’ 첫 소절은 이렇게 시작한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마주하는 상황과 사람들에 따라 망설임 없이 태도와 목소리를 바꿀 수 있는 나에게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어렵기만 하다. 차라리 누군가 나에게 “누구냐, 넌?”이라고 물어주면 답을 찾기 훨씬 쉬울 것 같다. 뭐든 그가 원하는 답만 찾아 하면 되니까.

최명원 성균관대학교 독어독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