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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주정완의 시선

부동산 공시가격 그대로 둘 것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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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주정완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주정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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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합리한 부동산 공시가격이 안타까운 비극으로 이어졌다. 최근 서울 종로구 창신동에서 80대 노모와 50대 아들이 생활고에 시달리다 숨진 지 한 달여 만에 발견된 사건이다. 이들은 지은 지 80년이 넘어 허물어져 가는 한옥을 갖고 있다는 이유로 기초생활보장 대상에서 탈락했다. 현행 복지 제도에선 실제로는 소득이 전혀 없는 사람이라도 집이 있으면 일정한 소득이 있는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이때 기준으로 삼는 집값은 정부나 지방자치단체가 산정하는 공시가격이다. 정부는 아무리 어렵게 사는 사람이라도 주택 공시가격이 기준을 초과하면 생계비나 의료비 등을 한 푼도 지원하지 않는다. 정수연 한국감정평가학회장(제주대 경제학 교수)은 "(창신동 모자의) 기초생활보장 탈락은 공시가격의 급격한 상승에 따른 것"이라고 말했다. 정 교수의 분석에 따르면 이들이 살던 집의 공시가격은 2013년부터 지난해까지 8년간 26.6% 올랐다. 33㎡(약 10평) 남짓한 좁은 집에서 근근이 버텨왔지만 공시가격 인상으로 '가난의 조건'을 맞추지 못했다는 얘기다.
 더 큰 문제는 이렇게 중요한 역할을 하는 공시가격이 엉터리로 산정됐다는 점이다. 지난 27일 한국감정평가학회 세미나에 따르면 이들의 집에서 땅값과 건물값을 더한 공시가격은 지난해 1억7000만원이었다. 그런데 땅값만 따로 떼어낸 공시지가(1억9647만원)는 오히려 더 비쌌다. 만일 오래된 건물의 가치를 0원으로 평가하더라도 도저히 불가능한 계산법이다. 정 교수는 다른 지역의 공시가격에서도 황당한 오류가 적지 않게 나타났다고 설명했다. 그는 "권한과 책임이 이원화된 구조"를 공시가격 오류의 근본 원인으로 꼽았다. 그러면서 "이런 구조에선 누구도 공시가격 오류를 바로잡고자 하는 유인이 없다. 오히려 공시가격 오류의 은폐에 가담할 유인만 커진다"고 지적했다.
 정부가 매년 발표하는 부동산 공시가격은 국민 생활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부동산 보유세만의 문제가 아니다. 공시가격을 기준으로 삼는 행정 분야는 67개나 된다. 그중에는 기초연금 수급 자격 심사와 지역 건강보험료 책정, 기초생활보장 대상자 선정 등도 있다. 투기 목적과는 무관하게 같은 집에서 오래 살았더라도 공시가격이 오르면 어떤 식으로든 불이익을 받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역대 정부는 이런 공시가격을 잘못 건드리면 폭발력이 크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공시가격 인상 속도가 너무 빠르지 않게 조절하거나 완충장치(공정시장가액비율)를 뒀던 이유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는 달랐다. 각종 규제를 남발하며 부동산 시장을 들쑤시더니 공시가격까지 집값을 잡는 수단으로 동원했다. 김현미 장관 시절인 2020년 11월 국토교통부가 발표한 '부동산 공시가격 현실화 계획'이다. 여기서 현실화는 인상이란 뜻이다. 아파트·단독주택을 가리지 않고 모든 유형의 주택에서 시세의 90%가 될 때까지 공시가격을 단계적으로 올려 나가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이에 따르면 주택의 시세가 전혀 오르지 않더라도 공시가격은 매년 꾸준히 올라갈 수밖에 없다.
 정부는 공시가격과 시세의 괴리가 크다는 걸 공시가격 인상의 명분으로 내세웠다. 겉으로는 그럴듯하지만 실제 현장에 나가보면 얘기가 전혀 달라진다. 주택 시세를 제대로 파악하는 건 생각보다 훨씬 난해한 작업이다. 대단지 아파트만 생각한다면 그나마 실거래 사례를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소규모 단지나 빌라·연립주택에선 1년 내내 거래가 한 건도 없는 경우가 적지 않다. 단독주택 중에선 수십년간 집을 팔지 않고 사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런데도 정부가 공시가격 인상이란 정책 목표를 세웠다면 우선 납세자가 납득할 만한 시세 산정 작업부터 해야 했다. 결코 하루 이틀에 되는 일이 아니다. 충분한 사회적 논의와 검토, 치밀한 사전 준비, 조사 요원들의 전문성과 책임감 확보가 필수적이다. 지금처럼 정부가 일방적으로 공시가격을 발표하고 산정 근거조차 제대로 밝히지 않는 건 옳지 않다.
 공시가격 논란이 커지자 정부는 1주택자에겐 올해가 아닌 지난해 공시가격으로 보유세를 매기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병 주고 약 주는 셈인데 대형마트 등에서 고객을 유인하기 위해 흔히 쓰는 수법이 떠오른다. 같은 상품에 두 개의 가격표를 붙여 놓고 비싼 가격표에는 X표를 쳐서 가격을 내린 것처럼 보이는 식이다. 유통업체들은 마케팅 기법이라고 하겠지만 정부가 세금을 갖고 이런 식으로 납세자를 기만하면 안 된다. 새 정부에서 공시가격 제도의 대수술이 시급한 이유다.

생활보호 대상 탈락 창신동 모자 #엉터리 가격 산정에 억울한 죽음 #무리한 인상 계획 전면 재검토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