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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박정호의 시시각각

‘저주토끼’의 희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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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박정호 기자 중앙일보 수석논설위원
소설집 '저주토끼'로 영국 최고 권위의 문학상인 부커상 최종 후보에 오른 정보라(오른쪽) 작가와 번역가 안톤 허.[연합뉴스]

소설집 '저주토끼'로 영국 최고 권위의 문학상인 부커상 최종 후보에 오른 정보라(오른쪽) 작가와 번역가 안톤 허.[연합뉴스]

“백년지대계가 자막에 달려 있다. 나는 진지하다.” 지난해 10월 학술저널 ‘대학: 담론과 쟁점’에 실린 ‘팬데믹 시대의 자막’의 마지막 문장이다. 백년지대계는 물론 교육이다. 그런데 대학교육이 자막에 달려 있다고? 할리우드 진입 장벽을 허문 ‘기생충’의 영어 자막쯤 된다는 걸까.

영국 부커상 후보에 오른 정보라
차별과 소외의 세상 환상적 묘사
“조금씩이라도 함께 나아갑시다”

 사연은 이렇다. 대학에서 러시아 문학을 가르치는 필자는 2020년 1학기에 죽을 고생을 했다. 팬데믹으로 ‘비대면 화상수업’을 처음 하면서 강의 자료를 만들었는데, 엄청난 시간을 들여 대본도 작성했다. 대본 쓰고, 녹음·편집하고 동영상을 만들었다. 소리를 잘 듣지 못하는 장애 학생, 한국말에 서툰 러시아·고려인 학생을 위해서였다.
 반응은 좋았다. 하지만 그는 그로기가 됐다. 매번 새벽 3~4시까지 준비해야 했다. “뇌일혈로 죽을 것 같은” 정도였다. 결국 2학기부터 대본 작업을 중단했다. 음성을 텍스트로 변환해 주는 프로그램 같은 기술 지원이 없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무료 프로그램을 써보긴 했지만 러시아 단어를 모두 틀리게 전환해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2년이 흐른 지금도 달라진 게 없다. 그는 “누가 쓸 만한 음성-텍스트 변환 프로그램을 교육부 차원에서 지원해 줬으면 좋겠다”며 글을 맺었다. 학생에게 더 나은 교육 환경을 제공하는 건 대학의 책무이지 않은가. 그는 올해 2월 강단에서 내려왔다. 투병 중인 남편을 돌봐야 하는 개인 사정도 있었지만 학내 소수자를 배려하지 않는 대학 시스템에 대한 실망도 컸다. 그와 통화를 했다.
 “한 학과, 한 학교의 문제가 아닙니다. 대학 전체가 교육할 생각이 있는지 모르겠어요. 다른 학교에 대안이 있었더라면 따라 했을 겁니다. 하지만 모두 걱정만 하고 움직이지 않았어요. 벌써 2년이 흘렀습니다. 해결할 마음이 전혀 없는 것 아닌가요.”
 그는 정보라 작가다. 최근 단편집 『저주토끼』로 세계 3대 문학상이라는 영국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 후보에 올라 한창 주목을 받고 있다. 정 작가는 미국에서 동유럽 지역학과 슬라브 문학으로 석·박사 학위를 딴 학자 출신이다. 강의와 창작, 두 마리 토끼를 쫓던 그는 앞으론 창작과 번역에 집중할 계획이다.
 정 작가는 SF소설을 쓴다. 호러와 판타지를 넘나들며 욕망이란 무한열차에 올라탄 이 시대의 초상화를 그려낸다. 구멍 뚫린 대학 현장을 꼬집은 앞의 글처럼 타인을 무시하고, 차별하고, 억누르고, 잡아먹으려는 현대인의 볼썽사나운 행태를 때로는 공포스럽게, 때로는 익살스럽게 펼쳐 보인다. 최근 한국문학의 또 다른 성장판으로 떠오른 SF소설의 약진이다.
 2017년 나온  『저주토끼』와 지난해 출간된  『그녀를 만나다』를 읽었다. 작가는 가난·여성·장애·소수자·외계인·전염병·로봇 등을 소재로 차별과 소외를 주로 얘기한다. 처음엔 황당무계해 보이지만 갈수록 “그래, 그럴 수 있지” 공감하게 된다. 초현실적인 상상이 지극히 현실적인 경고로 다가온다. 예컨대 변기 속에서 흉측한 머리가 튀어나오는 ‘머리’는 지금껏 우리가 먹고, 마시고, 쓰고, 버린 것들의 대반격에 가깝고, ‘그녀를 만나다’는 평균수명 120세 시대를 배경으로 지난해 3월 타계한 성소수자 변희수 하사를 기억한다.
 작가의 고백처럼 소설들은 쓸쓸하고 외롭다. 하지만 그는 말한다. “더 좋은 세상을 위해 아주 조금씩이라고 함께 나아가자.” 그에게 물었다. “엉망진창 현실정치도 한번 다뤄보시라.” 대답이 명쾌하다. “전혀 그럴 생각 없습니다.”
그럼에도 ‘머리’가 머리에 맴돈다. 평소 소통 불능에 헤매면서도 위성정당·검수완박 같은 공동 이해 앞에선 담합하는 정치권은 우리가 지금껏 먹고 버린 배설물, 우리가 키운 괴물이 아닐까 싶다. 그 괴물은 언제까지 살아남을까. 소설 ‘영생불사연구소’가 섬뜩하다. 1912년 ‘나라는 망해도 우리만은 영생불사’를 내걸고 발족한 수상한 연구소는 지금도 활동 중이다. 수석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