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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분위기가 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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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정호
남정호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남정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남정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가와무라 다케오(河村建夫) 일한친선협회 회장. 30년간 중의원으로 활약했던 가와무라 회장은 관방장관까지 지낸 대표적인 지한파 거물 정치인이다. 그런 그가 지난 12일 장제원 대통령 당선인 비서실장을 만나 의미심장한 말을 꺼냈다. 강제징용 배상 등 꼬일 대로 꼬인 양국 현안과 관련해 “한국에만 맡기지 않고 일본 측도 할  수 있는 것을 하겠다”고.

언뜻 상투적인 레토릭으로 들릴 수 있다. 하지만 그간의 맥락을 알면 느낌이 완전히 달라진다. 2018년 10월 대법원 강제징용 배상 판결 이후 “한·일 관계를 개선하자”고 한국이 다가가면 일본 정부 반응은 한결같았다. “일본이 받아들일 수 있는 해결책을 한국 측에서 제시하라”는 거였다. 모두 한국 책임이니 그쪽에서 전적으로 알아서 풀라는 뜻이다. 이랬던 일본이 자기들도 뭔가를 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으니 여간 큰 변화가 아니다. 게다가 그는 “우리가 원하는 대선후보가 됐다”는 덕담도 했다고 한다.

“일본 측도 할 수 있는 것 하겠다”
기시다 방한 불발돼도 화해 나서야
사안마다 다른 전략적 접근 필요

이런 가운데 윤석열 당선인의 특사 격인 한일정책협의단이 24일부터 일본을 찾는다. 협의단은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총리, 하야시 요시마사(林芳正) 외무상 등 정·관계 인사를 만나 한·일 관계 개선과 북핵 문제 등을 논의한다. 여러 의제가 논의되겠지만, 최대 관심사는 기시다 총리의 윤 당선인 취임식 참석 여부. 과거 노태우·노무현·이명박 대통령 취임식 때 일 총리가 왔던 터라 평소라면 긍정적으로 검토될 사안이다. 하지만 수년간의 강제징용 및 위안부 논란에다 최근 일본 외교청서에 독도 영유권 주장이 실려 기시다 총리의 참석은 쉽지 않다. 특히 7월 참의원 선거를 앞두고 그가 강성 우파의 반대를 무릅쓸 공산은 적다.

하지만 기시다 방한이 무산된다고 포기할 일은 아니다. 한·일 관계 개선은 현 한국 외교의 최대 과제인 까닭이다. 실제로 한국이 국제무대에서 활발히 뛰려면 일본의 도움이 요긴하다. 미국·일본·호주·인도 간 안보협의체인 쿼드(Quad) 가입이 단적인 예다. 핵심 회원국인 일본의 도움 없이는 쉽지 않다. 아울러 북핵 위협으로 한·미·일 3각 협력의 중요성이 갈수록 커지는 터라 악화한 대일 관계는 큰 골칫거리다. 더욱이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신냉전이 본격화한 상황 아닌가.

물론 한·일 간 악재는 한둘이 아니다. 강제징용, 위안부, 역사 교과서 등 과거사 논란에 독도 분쟁까지 다양하다. 그간의 전략적 실수는 사안에 대한 구별 없이 무조건 일본 측을 압박해 양보를 얻어내려 했다는 거다.

그러나 이런 압박 전략은 부작용만 키운다. 한 전(前) 주일 대사가 들려준 독도 문제 해결책은 꽤 현실적이었다. 그는 “무대응이 최선책”이라며 “물론 일 외무성은 매년 ‘다케시마(독도)는 자국 영토’라는 성명을 낼 것”이라고 했다. 그래야 향후 영토 분쟁 재판 등에서 소유권을 주장할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수십 년간 잠잠하면 언젠가 일본 정부도 독도 영유권 주장을 그칠 날이 올 것”이라고 장담했다. 실무자 부주의든, 더는 내 봐야 실익이 없다고 판단하든 말이다. 이렇듯 영토 분쟁을 ‘망각의 강물’에 띄워 보내면 독도는 자연히 한국 땅으로 굳어진다는 게 그의 논리였다.

위안부 문제는 다르다. 인류 보편의 관심사인 인권 문제라 일본 측에서 왜곡하려 들면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 반면에 강제징용의 경우는 양국 간 막후 협상이 필요하다. 요컨대 사안마다 다르게 접근하는 전략적 사고가 절실하다는 얘기다.

이제 윤석열호는 한·일 관계 복원이란 힘겨운 항해를 시작해야 할 처지다. 대일 외교에선 ‘네마와시(根回し)’라 불리는 사전 조율이 절대적이다. 그럼에도 문재인 정부는 막후 협상을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일본 외교를 내팽개쳐 온 셈이다. 그러니 윤 정부는 전문가들에게 재량권을 주고 다양한 채널로 기시다 정권과의 막후 협상에 애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빈사 상태의 한·일 관계는 영영 회복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