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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제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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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한영익 기자 중앙일보 기자
한영익 정치에디터

한영익 정치에디터

제명(除名)은 구성원 명단에서 이름을 빼 자격을 박탈하는 행위다. 학교에서는 퇴학, 직장·종교에선 해고·파문에 준하는 심각한 징계다.

제명이란 단어가 잊을만하면 등장하는 건 스포츠계다. 고환암을 극복하고 ‘투르 드 프랑스’를 7연패했던 랜스 암스트롱은 2012년 금지 약물을 상습 복용했다는 사실이 적발돼 국제사이클연맹(UCI)에서 영구제명됐다. 한국에선 국가대표까지 지낸 최성국(축구)·강동희(농구)가 승부 조작에 연루돼 협회에서 영구제명된 기록이 있다.

제명에 준하는 종교적 파문 사례로 유명한 건 일명 ‘카노사의 굴욕’이다. 1077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4세는 주교 서임권을 황권 아래에 두려다 교황 그레고리오 7세에게 파문당해 카노사성 앞에서 처분을 취소해달라고 싹싹 빌었다. 그는 결국 파문을 철회 받았다.

김영삼 전 대통령(YS)은 1979년 민주공화당, 유신정우회 소속 국회의원들에 의해 의원직에서 제명당했다. “미국이 공개적이고 직접적인 압력을 통해 박정희 대통령을 제어해줄 것”을 요구한 뉴욕타임스 인터뷰가 구실이 됐다. 의원직 제명 뒤 YS는 “영원히 살기 위해 일순간 죽는 길을 택하겠다”고 했고, 여파는 부마민주항쟁으로까지 번졌다.

제명이 정략적으로 악용된 경우도 있었다. 2020년 총선을 앞두고 거대 양당은 비례위성정당의 기호 순번을 끌어올리기 위해 의원들을 파견 보냈다. 국민의힘(당시 미래통합당)은 조훈현 의원 등 8명을, 민주당은 정은혜 의원 등 3명을 각각 당에서 제명했다. 이들이 비례대표로 탈당하면 의원직을 잃기 때문에 고안해 낸 일종의 편법이었다.

비슷한 이유로 같은 해 바른미래당 분당 사태 때는 비당권파 의원들이 단독으로 의원총회를 열고 비례대표 9명을 셀프제명하는 일도 있었다. 당시 제명된 한 의원은 라디오에서 “드디어 제명됐다. 대망의 제명을 달성했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권은희 국민의당 원내대표가 제명을 공개 요구하고 있다. “기득권 양당과의 합당을 수용하기 어렵다”는 이유다. 그 역시 제명당하면 의원직을 지킨다. 당의 노선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탈당하는 게 순리라는 주장을 하는 이는 찾아보기도 어렵다. 정치권의 상습적인 편법 제명 앞에 모두가 무뎌진 걸까. 이런 풍경을 언제까지 지켜봐야 할지 한숨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