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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임금명세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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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이경희 기자 중앙일보 P디렉터
이경희 이노베이션랩장

이경희 이노베이션랩장

조선시대 관료는 국가에 봉사한 대가로 녹봉(祿俸)을 받았다. 녹봉의 품목은 쌀·보리·콩·포목 등이었다. 『조선경국전』에 따르면 “1품부터 9품까지 18과로 나누어 내리되, 삼사(三司)에서 녹패를 분급해 광흥창에서 지급하도록 한다”고 돼 있었다. 녹패는 녹봉 지급증서다. 녹패에는 발급 날짜와 몇품 몇과에 해당하는지 녹과(祿科·녹봉등급)를 적었다. 하단에는 지급한 녹봉의 양, 광흥창 및 감찰의 수결(서명)을 남겼다.

그러나 정조 이전까지 광흥창은 녹봉 지급 대상자 명단도 확보하지 못했다. 이를 악용해 녹패를 위조하는 등의 방법으로 녹봉을 착복하는 사례가 많았다. 정조 17년(1793년) 녹봉 지급 규정을 개정한 이후 이를 보완하기 위해 녹표(지급증)를 추가 도입한 것으로 추정된다. 녹표에는 녹과에 근거해 받을 곡식의 양까지 정확히 적었다. 녹패와 녹표는 오늘날의 연봉계약서와 임금명세서 겸 출세의 증표이기도 했다.

근대화 이후에도 임금명세서는 아무나 받는 게 아니었다. 지난해까지도 5인 미만 사업장은 예외였다. 그러나 지난해 11월 개정 근로기준법이 적용되면서 고용 형태나 업종, 사업장 규모와 관계없이 사용자는 반드시 임금명세서를 교부하도록 의무화됐다. 대기업부터 구멍가게에 농장까지, 정규직·계약직·일용직 가리지 않고 임금명세서를 줘야 한다. 사실상 근로를 제공하는 누구나 임금명세서를 받도록 바뀐 것이다. 근로일수와 각종 수당, 공제 내역 등 임금 대장에 들어갈 상세 항목 십수개도 근로기준법 시행령에 명시해놨다. 만약 고용계약서나 취업규칙에 수당 등에 대한 규정을 두지 않았다면 임금명세서에 각각의 항목에 대한 계산 근거도 밝혀야 한다. 사업주가 이를 어기면 근로자 1인당 20만~30만원, 여러 차례 위반하면 최대 500만원까지 과태료가 부과될 수 있다. 인당 과태료가 나오므로 영세 사업장은 물론 중소사업장에도 적잖은 부담이다.

고용노동부는 최근 임금명세서 작성 프로그램을 배포했다. 임금명세서 교부가 의무화됐는지 모르는 사업장도 많은 실정이라서다. 아직은 계도 기간이라 위반 사항을 적발해도 25일가량 시정 기간을 준다. 근로기준법 위반은 대개 근로자가 신고해야 단속기관이 인지할 수 있다. 우리 회사는 임금명세서를 잘 주고 있나, 확인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