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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BK 비정상의 정상화, 김호철 ‘호요미’ 연기 잘한 덕이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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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3호 25면

[스포츠 오디세이] 이정철 SBS 배구 해설위원

흥국생명·IBK기업은행·국가대표팀 등 30년 넘게 여자배구 지도자로 활약한 이정철 SBS 해설위원은 선수들의 특성과 기량을 꿰뚫어보는 매의 눈을 가졌다. 신인섭 기자

흥국생명·IBK기업은행·국가대표팀 등 30년 넘게 여자배구 지도자로 활약한 이정철 SBS 해설위원은 선수들의 특성과 기량을 꿰뚫어보는 매의 눈을 가졌다. 신인섭 기자

국내 최고 인기 스포츠로 자리 잡은 여자배구가 아쉬움 속에 막을 내렸다. 2021~22 시즌 프로배구 V리그는 각 팀에서 코로나19 확진자가 속출하면서 리그 중단-속개를 반복했다. 급기야 여자부는 전체 6라운드 중 5라운드까지 성적만으로 순위를 정한 채 리그를 끝내야 했다. 남자부는 일정을 축소해 포스트시즌을 치렀다.

여자배구는 현대건설이 압도적인 성적으로 1위를 했지만 가장 주목 받은 팀은 IBK기업은행이었다. 챔프전 6회 연속 진출, 통산 3회 통합우승에 빛나는 IBK는 리그 초반 주전 세터와 코치의 팀 이탈, 감독 교체 등으로 홍역을 치르며 연패 늪에 빠졌다. 김호철 감독이 부임해 팀을 잘 추슬렀고, 막판 연승을 달리며 ‘호철 스쿨’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이 모든 과정을 누구보다 착잡한 심정으로 지켜본 이가 이정철(62) SBS 배구 해설위원이다. 2010년 IBK기업은행 창단 감독이 된 그는 불과 1년 만에 팀을 챔피언결정전 우승으로 이끌었다. 10년간 챔프전 6회 연속 진출, 통산 3회 우승도 그의 리더십에 힘입은 바 크다.

부드러운 이미지로 변신했지만 여전히 직설적이고 날카로운 지적을 쏟아내는 그를 만났다.

‘내 마음속 팀’이 내게 막판에 실수

IBK 감독 시절을 기억하는 분들이 볼 때 스타일이 너무 많이 바뀌었어요.
“자신에게 투자를 좀 했죠. 가족 권유로 머리도 좀 심었어요. 이게 뭐 흉은 아니잖아요. 요즘 의학 기술이 참 대단하다고 느꼈습니다. 테 있는 안경은 해설 할 때만 쓰는데 모니터 글자가 잘 안 보여서 다초점으로 맞춘 겁니다.”
기업은행 감독 시절 선수들을 하도 못 살게 굴어서 ‘가가멜’이라는 별명이 붙었는데요.
“그 별명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이젠 워낙 퍼져 있어서 부인하고 싶은 마음도 없습니다. 그런데 가가멜은 스머프들한테 늘 당하지만 저는 그렇지 않거든요. 저는 지도자로서 선수들이 좀 더 높은 기술을 발휘하고 팀이 견고해지도록 만드는 데 좀 악역을 맡는다고 생각하니까 괜찮습니다.”
본인에게 IBK기업은행이라는 팀은 어떤 존재인가요.
“창단 다음해 통합우승, 여섯 번 연속 챔프전 진출, 세 차례 통합우승 등을 이뤘으니까 마음속 영원한 나의 팀이죠. 창단했을 때 정말 고생 많이 했거든요. 체육관·숙소 등 인프라가 전혀 갖춰지지 않아 맨땅에 헤딩을 하면서 하나하나 만들어 나갔어요. 일반인이 운동하는 체육관에서 훈련하면서 눈치도 많이 봤어요. 그런데 제가 물러나는 과정에서 구단이 저한테 상당한 실수를 했어요.”
지난 시즌 초반에 IBK가 내홍을 겪는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아팠겠습니다.
“2년 반 동안 감독이 세 번 바뀐 거잖아요. 그런 모습을 보면서 너무 안타깝고 화도 났죠. 특히 구단 프런트가 현장을 너무 가볍게 본 것 아닌가 싶어요. 그래도 김호철 감독님이 오셔서 전화위복이 된 것 같습니다.”
IBK 사태의 본질을 뭐라고 보십니까. 일부 고참 선수들이 감독을 쫓아내려고 쿠데타를 했다고 보는 시각도 있는데요.
“깊숙한 내용은 잘 모르지만 전체적으로 봤을 때는 다 잘못됐죠. 구단주도, 코칭스태프도, 선수들도 마찬가지고요. 특히 구단 사무국 프런트의 역할이 정말 중요한데 뭔가 선수들에게 잘못된 신호, 잘못된 학습을 시켜준 것 같아요. 그러면서 모두가 피해자가 된 거죠.”
지난해 말 IBK기업은행에 부임한 세터 출신 김호철 감독은 백업 세터 김하경을 집중 지도해 팀의 중심을 잡았다. [중앙포토]

지난해 말 IBK기업은행에 부임한 세터 출신 김호철 감독은 백업 세터 김하경을 집중 지도해 팀의 중심을 잡았다. [중앙포토]

어쨌든 김호철 감독이 부임하면서 팀이 극적인 반전을 이뤘는데요.
“저는 그렇게 생각 안 합니다. 뭐가 반전입니까. 정상으로 돌아가는 거죠. 내홍 때문에 팀이 망가져서 그렇지 도쿄 올림픽 주역 김희진·김수지·표승주가 있는 IBK는 강팀이에요. 우리가 어떤 팀이라는 걸 선수 본인들이 더 잘 알고 있어요. 어지러운 상황들을 어떡하든지 빨리 헤쳐 나와야겠다는 의지가 있었는데 김 감독이 오셔서 거기에 불을 붙이신 거죠. 말하자면 비정상의 정상화 같은 겁니다.”
그 과정에서 백업 세터 김하경 선수가 신데렐라가 됐는데요.
“주전 세터 조송화가 팀을 이탈하는 바람에 김하경 선수에게 기회가 왔죠. 하경이는 2014년에 제가 뽑은 선수인데 출전 기회를 얻지 못해 실업팀 대구시청에서 2년 뛰다 돌아왔어요. 하경이는 김호철 감독을 만난 게 천운이죠. 욕심도 많고 농땡이를 부리는 선수가 아니어서 김 감독의 강한 주문을 잘 소화하면서 성장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김하경 선수는 세터로서 어떤 특징이 있나요.
“레프트 공격수 쪽으로 쏴 주는 토스가 빠르고 힘이 있어요. 표승주나 산타나는 다른 팀 주공격수에 비해 높이가 처집니다. 김하경이 빠른 토스로 상대 블로킹이 채 자리를 잡기 전에 공격할 수 있게 해 줍니다. 또 스피드 있는 볼을 때리면 파워가 더 커지죠. 이처럼 세터와 공격수의 합이 맞아떨어져 IBK 공격력이 살아났다고 볼 수 있죠. 배구 인생의 큰 기회를 잡은 하경이를 흐뭇하게 지켜보면서 응원하고 있습니다.”

올해도 여자배구는 ‘봄 배구’가 사라졌다. 12연승에 이어 15연승까지 달성하며 압도적인 선두를 달리던 현대건설은 ‘우승’이 아닌 ‘1위’로 시즌을 마쳐야 했다. 현대건설로선 ‘트로피 없는 1위’가 아쉬울 수밖에 없지만 이 위원은 “현대건설이 챔피전결정전에서 우승한다는 보장이 없었다”고 단언했다. 그는 “현대건설 주전 중에서 챔프전 우승 경험이 있는 선수는 양효진(센터), 김연견(리베로) 정도다. 단기전에서 경험은 무엇보다 큰 자산”이라고 말했다.

현대건설에서 가장 눈에 띈 선수는?
“센터 이다현(21)이죠. 이다현은 지난 시즌까지 국가대표 양효진-정지윤의 백업 정도였는데 올 시즌 정지윤이 레프트로 옮기면서 베스트 멤버가 됐고, 큰 경기의 중요한 장면에서 신예답지 않은 맹활약을 했습니다. 앞으로 양효진의 뒤를 이어 국가대표 센터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합니다.”
감독 시절에 선수들을 혹독하게 다그치고 야단도 많이 치셨죠.
“그건 야단이 아니고 지적이죠. 하하. 물론 당하는 입장에선 좀 많이 아프겠지만,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아야 하는데 웃으면서 얘기하면 그게 되겠어요? 감독은 지적을 하는데 선수는 야단치는 걸로 받아들인다면 그건 잘못된 거죠. 물론 전달 과정에서 제가 좀 약지도 못했고 직선적인 부분이 있었다는 건 인정합니다. 그렇게 열정을 가지고 안 했다면 과연 그 정도 성적이 났을까, 그런 생각도 들면서 저는 제 행동을 후회한 적은 없습니다.”

언제든 투입될 ‘소방수 감독’ 1순위

‘버럭 호철’로 유명했던 김호철 감독도 ‘호요미(호철+귀요미)’로 바뀌었는데요.
“아, 호철이 형 연기 잘하더라고요(웃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라고 할 것도 없이 전부 다 연기예요. 수십년간 남자만 맡았던 그 형이 여자팀 온다고 했을 때 30년간 여자부에 있었던 제가 ‘형, 답답할 거요’라고 했어요. 공에 대한 반사신경이나 스피드 같은 게 남녀 차이가 크잖아요. 그런 거 다 삭히면서 뜻대로 안 되는데도 방긋방긋 웃어야 하니까 속에서 천불이 날 겁니다. ‘마스크를 써서 다행이다’고 하신 말 속에 진심이 모두 담겨 있어요.”

‘부드러운 남자’로 이미지 변신을 했다지만 그의 눈매는 여전히 날카로웠다. 사진기자가 “너무 강해 보이니 눈에 힘을 조금만 풀어주세요”라고 부탁할 정도였다. 아직은 ‘해설위원’보다는 ‘감독’이라고 불리는 게 좋다는 그는 여자 프로팀 중 어디라도 삐끗할 경우 당장 투입될 ‘소방수 1순위’로 꼽힌다.

중앙UCN 유튜브 채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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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경 권유로 입단한 김사니, 감독대행 시킨 게 잘못”

2012년 부산 그랑프리 세계배구대회 때 김연경·김사니·한유미(오른쪽부터). [중앙포토]

2012년 부산 그랑프리 세계배구대회 때 김연경·김사니·한유미(오른쪽부터). [중앙포토]

지난해 11월 벌어진 ‘IBK기업은행 사태’는 주전 세터 조송화의 팀 무단 이탈→김사니 코치 동반 이탈→서남원 감독 사퇴→김사니 코치 감독대행 선임→김사니 대행에 대한 타 감독들 악수 거부→김사니 코치 퇴임 및 김호철 감독 선임 순으로 숨가쁘게 진행됐다.

이정철 위원은 이번 사태의 중심에 있었던 김사니 코치와는 국기대표팀과 소속팀에서 오랜 인연을 쌓았다.

2014년 김사니가 IBK로 이적할 때는 ‘배구 여제’ 김연경의 역할도 컸다고 한다. 이 위원은 “김사니와는 대표팀에서도 오래 봤고, 중간에 기업은행으로 데려오면서도 우여곡절이 있었다. 내가 영입 제안을 했을 때 김사니가 김연경 선수와 같이 미국 여행 중이었는데 김연경이 ‘언니, 기업은행 가면 우승할 수 있어’라면서 적극 추천했다고 들었다”고 회고했다.

이 위원은 “김사니가 이번 일에 처신을 잘못한 것도 있지만 본인도 피해자일 수 있다고 본다”며 “구단이 서남원 감독을 내보낸 뒤 김 코치에게 감독대행을 시킨 게 잘못이다. 그냥 코치로서 경기를 책임지게 하고, 시간을 두고 감독을 뽑았으면 좋았을 텐데…”라고 아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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