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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영화계 애주가 모임 20년, K시네마 홍보에 한몫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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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3호 16면

[김동호 남기고 싶은 이야기] 타이거 사람들〈4〉타이거 클럽

세계영화계 애주가 모임인 타이거 클럽의 멤버들이 2010년 10월 부산영화제에 모였다. 왼쪽부터 네덜란드 언론인이자 영화평론가인 피터 반 뷰런, 칸영화제 집행위원장 티에리 프레모, 김동호 부산영화제 집행위원장, 대만의 허우샤오셴(侯孝賢) 감독. [사진 김동호]

세계영화계 애주가 모임인 타이거 클럽의 멤버들이 2010년 10월 부산영화제에 모였다. 왼쪽부터 네덜란드 언론인이자 영화평론가인 피터 반 뷰런, 칸영화제 집행위원장 티에리 프레모, 김동호 부산영화제 집행위원장, 대만의 허우샤오셴(侯孝賢) 감독. [사진 김동호]

타이거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풀어놓기 전에 ‘타이거 클럽’ 이야기를 먼저 하는 게 순서일 것 같다. 이 클럽은 2002년 1월 로테르담영화제에서 결성한 세계영화계의 애주가 모임이다. 회원은 대만의 허우샤오셴(侯孝賢) 감독, 칸영화제 집행위원장 티에리 프레모, 로테르담영화제 집행위원장 사이먼 필드, 네덜란드 원로 언론인이자 영화평론가인 피터 반 뷰런에 나까지 모두 다섯 명이다. 때로 태국의 논지 니미부트르 감독과 오스트리아 필름커미션 대표 마틴 슈바이호퍼가 준회원으로 함께한다.

로테르담 로고, 내 이름 본떠 ‘타이거 클럽’

영화제를 매개로 오랜 우정을 쌓은 피터 반 뷰런, 김동호, 사이먼 필드 로테르담영화제 집행위원장(왼쪽부터). [사진 김동호]

영화제를 매개로 오랜 우정을 쌓은 피터 반 뷰런, 김동호, 사이먼 필드 로테르담영화제 집행위원장(왼쪽부터). [사진 김동호]

2001년 11월 9일 개막한 제6회 부산국제영화제가 결성 계기다. 당시 심사위원은 배우 윤정희와 허우 감독, 반 뷰런, 니미부트르 감독, 뉴질랜드 오클랜드대 교수로 영화평론가인 폴 클락 등 다섯 명이었다. 심사위원장 허우 감독은 에드워드 양, 챠이밍량(蔡明亮)과 함께 대만 뉴웨이브운동을 주도한 거장이다. 1947년 중국 광둥(廣東)성 메이셴(梅縣) 출신으로 이듬해 대만으로 이주했다. 81년 ‘귀여운 여인’으로 감독에 데뷔했다. 두 번째 작품 ‘펑꾸이(風櫃)에서 온 소년’으로 낭트영화제 최우수작품상을, 89년 ‘비정성시(非情城市)’로 베니스영화제 대상인 황금사자상을 각각 받으며 거장 반열에 올랐다. 그 뒤 ‘해상화’(98) ‘밀레니엄 맘보’(2001) ‘쓰리 타임스’(2005) 등이 줄 이어 칸 경쟁부문에서 상영됐고 2015년 ‘자객 섭은낭(聶隱娘)’으로 칸 감독상을 받았다.

반 뷰런은 97년 내가 심사위원장으로 참가했던 로테르담에서 처음 만난 이후 매년 부산에 왔고, 로테르담영화제 집행위원장인 필드와 함께 절친으로 지냈다. 클락은 90년 인도에서 열린 국제회의에 함께 참가했고, 아시아영화진흥기구(NETPAC)의 창립 멤버다. 태국감독 니미부트르는 데뷔작 ‘댕 버럴리와 일당들’로 97년 제2회 부산국제영화제에 참가했다.

2001년 11월 15일 부산국제영화제 심사가 끝난 뒤 나는 심사위원들을 위로하는 회식을 마련했다. 필드와 프레모가 동석했다. 사실 프레모가 오기까지 많은 정성을 쏟았다.

그해 세계영화계는 3대 영화제의 수장이 모두 바뀌는 지각변동이 있었다. 칸에선 23년간 집행위원장 자리를 지키던 질 자콥이 조직위원장으로 옮기고 후임에 뤼미에르박물관장인 티에리 프레모가 선임됐다. 베를린영화제는 모리츠 데 하델른 집행위원장이 물러나고 독일 최대의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영화기금(Filmstiftung NRW)’ 대표인 디터 코슬릭이 뒤를 이었다. 베를린에서 물러난 데 하델른은 같은 해 5월 알베르토 바베라의 뒤를 이어 베니스영화제 집행위원장이 됐다. 둘다 나와 교류가 많아 신임 3대 영화제 수장 모두를 부산에 모으자는 욕심이 생겼다.

칸부터 공략했다. 1월 말 로테르담영화제와 2월 10일 전후에 개막하는 베를린영화제 사이엔 4~5일의 간격이 있다. 나는 98년 이후 매년 그 시기에 파리에서 칸 집행부 책임자들을 만나 완성 단계의 한국영화들이 초청받도록 교섭해 왔다.

2001년 칸 사무실을 방문해 자콥의 소개로 프레모 신임 집행위원장을 만났다. 부산영화제 참석을 부탁하자 “내년에나 갈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해 5월 칸영화제에서 다시 요청했더니 “6월이 돼야 결정할 수 있을 것 같다”며 가능성을 비쳤다. 마침 6월 초 임권택 감독 회고전이 파리에서 열려 사비로 참석했다. 개막식 다음 날 그와 조찬을 함께하는 자리에서 마침내 참석 확답을 받았다.

2016년 2월 암스테르담의 피터 반 뷰런 자택에서 허우샤오셴 감독, 피터, 김동호가 만났다(왼쪽부터). 이날이 피터와의 생전 마지막 만남이 될 줄은 몰랐다. [사진 김동호]

2016년 2월 암스테르담의 피터 반 뷰런 자택에서 허우샤오셴 감독, 피터, 김동호가 만났다(왼쪽부터). 이날이 피터와의 생전 마지막 만남이 될 줄은 몰랐다. [사진 김동호]

다음 목표는 코슬릭 베를린영화제 집행위원장. 그해 베를린영화제에 갔을 때 그는 행사 뒤부터 집행위원장을 맡겠다며 나타나지 않아 만날 수 없었다. 그래서 베를린영화제 프로그래머인 도로시 베너를 통해 집요하게 부탁했다. 귀국한 뒤 코슬릭이 부산영화제에 오기로 했다는 희소식을 접했다.

베를린영화제에서 물러난 데 하델른이 베니스영화제 집행위원장에 내정되었다는 소식은 칸에서 들었다. 마침 칸에 와 있던 그를 만나 축하 인사를 하며 부산에 초청했더니 흔쾌히 수락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2001년 11월 개막한 부산국제영화제에 그해 새로 부임한 세계 3대 영화제 수장들이 모두 참가하는 새 역사를 만들었다.

다음 해인 2002년 1월 29일 로테르담에 도착했다. 필드, 반 뷰런, 허우 감독과 사흘 동안 매일 일정이 끝나면 ‘페스티벌 카페’에서 만나 문을 닫는 새벽 3시까지 함께 술을 마시다 폐막식을 하루 앞둔 1월 31일 ‘타이거 클럽’을 결성했다. 필드와 허우 감독은 55세, 반 뷰런은 60세여서 65세인 내가 ‘빅 브라더’가 됐다. 로테르담영화제의 로고가 호랑이인 데다 내 이름 끝 자인 ‘호(虎)’도 호랑이여서 ‘타이거클럽’이란 이름을 붙였다. 칸에서 다시 만나자 프레모가 자기도 부산에서 만났으니 당연히 회원이 돼야 한다고 해서 만장일치로 받아들였다. 그 뒤로 우리는 로테르담·베를린·칸에서 자주 만났고, 특히 부산에선 매년 모였다.

부산에선 다섯 명이 모두 함께할 수 있는 날을 잡아 밤 12시 해운대 노래방에 모여 새벽 3시까지 춤추고 노래한 뒤 포장마차로 옮겨 6시까지 환담했다. 프레모는 6시에 호텔로 돌아가 짐을 들고 공항으로 가서 출국한 적도 있다. 세계 최고 영화제를 이끄는 스트레스를 1년에 한 번 부산에서 풀고 가는 게 아니었나 싶었다. 그는 2001년부터 내가 집행위원장을 그만둔 2010년까지 10년 동안 한해도 거르지 않고 부산을 찾았다. 단 하루만 있다 간 적도 있었다. 그 뒤로는 한국을 다시 찾지 못하고 있다.

올가을 강릉서 반 뷰런 추모 모임 계획

2012년 3월 초 70회 생일을 맞은 반 뷰런이 암스테르담에서 자축 리셉션을 연다는 e메일을 보냈다. 나는 리셉션이 열리는 카페 근처에 숙소를 예약하고 3월 17일 토요일 오후 2시 55분에 인천공항을 출발, 오후 6시 35분 암스테르담에 도착했다. 리셉션 장소는 앉을 자리조차 없이 비좁았다. 맥주와 와인, 위스키만 마시는 카페였다. 이탈리아와 벨기에에 사는 그의 두 딸과 런던에서 온 필드가 와 있었다. 2006년 1월 1일 술을 끊은 나는 자정까지 ‘물과 안주’로 담소만 나누다 호텔로 갔다. 다음날 체크아웃한 뒤 반 뷰런과 그의 두 딸, 그리고 필드와 점심을 먹고 귀국길에 올랐다. 이처럼 나는 국내외와 원근을 가리지 않고 경조사에 참석했다.

2010년 부산영화제를 떠난 뒤론 로테르담에 갈 기회가 없었는데, 거기에 다녀온 영화인들로부터 반 뷰런이 암 투병 중이라는 소식을 접했다. 그를 다시 만난 건 6년 뒤인 2016년이었다. 그해 2월 15일 나는 아이슬란드가 배출한 거장 프리드릭 토르 프리드릭슨 감독이 운영하는 레이캬비크영화제에 초청받아 가는 길에 영국 런던에 도착했다. 출발 전 뷰런에게 연락했더니 허우 감독이 ‘자객 섭은낭’ 홍보차 런던에 와있다고 알려줬다. 허우 감독에게 전화해 암스테르담에 함께 들러 문병하자고 제의했다. 다음날 암스테르담에 가서 반 뷰런의 집에서 허우 감독과 셋이서 점심을 함께했다. 그 뒤 허우 감독은 다음 행선지인 파리로, 나는 다시 런던을 경유해 레이캬비크로 각각 떠났다. 이 만남이 마지막이 될 줄은 몰랐다.

코로나 확산 직전인 2020년 2월 20일 베를린영화제 개막 리셉션에 참석했을 때 암스테르담에서 온 영화인으로부터 “피터가 두 달밖에 살지 못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다음 날 아침 반 뷰런에게 전화했더니 그도 “두 달밖에 못 산다”라고 담담하게 말했다.

2020년 3월 28일 그와 종종 메일을 주고받던 이창동 감독이 전화로 타계 소식을 알려왔다. 딸 사라에게 전화했더니 4월 1일 가족과 가까운 친지만 모여 장례식을 치른다며, 코로나가 잠잠해지면 별도 추모행사를 열겠다고 했다. 추모식엔 이창동 감독과 함께 가겠다고 약속했지만, 코로나가 계속 확산하면서 이도 무산됐다.

로테르담을 떠난 필드는 지금 태국감독 아핏차풍 위라세타쿤의 프로듀서로 일한다. 아핏차풍은 2010년 칸영화제에서 ‘엉클분미’로 태국감독으론 최초로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올가을 코로나 상황이 호전되면 프레모 칸 집행위원장, 허우 감독과 필드를 강릉에 초청해 타계한 반 뷰런을 추모하는 ‘타이거 클럽’ 모임을 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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