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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영화제 심사 해본 적도 없는데, 위원장 맡아 당황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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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2호 16면

[김동호 남기고 싶은 이야기] 타이거 사람들 〈3〉로테르담영화제 심사위원장

2014년 베니스영화제에 참석한 홍상수 감독, 김동호 부산영화제 명예집행위원장, 배우 문소리(왼쪽부터). [사진 김동호]

2014년 베니스영화제에 참석한 홍상수 감독, 김동호 부산영화제 명예집행위원장, 배우 문소리(왼쪽부터). [사진 김동호]

지난 2월 16일 열린 제72회 베를린영화제 시상식에서 홍상수 감독의 작품 ‘소설가의 영화’가 심사위원대상을 받았다. 심사위원대상은 최고상인 황금곰상 다음으로 큰 상이다. 이를 포함해 감독상 등 부문상은 모두 ‘은곰상’으로 부른다.

홍 감독은 베를린영화제에서 지난해 ‘인트로덕션’으로 각본상을, 코로나19 확산 전인 2020년 2월엔 ‘도망친 여자’로 감독상을 각각 받아 올해까지 3년 연속 수상하는 쾌거를 이룩했다. 홍 감독의 장편 데뷔작인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은 1996년 9월 제1회 부산영화제에서 처음 상영된 뒤 다음해 1월 제26회 로테르담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됐다.

부산에서 홍 감독의 영화는 봤지만 만난 기억은 없어 로테르담에서 그를 처음 만난 셈이다. 부산영화제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96년 11월 18일, 사이먼 필드 로테르담영화제 집행위원장으로부터 심사위원장을 맡아 달라는 전문을 받았다. 국내 영화제에서도 심사해 본 적이 없었는데 큰 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도 아닌 심사위원장이라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우선 교보문고에서 회의 진행에 관한 영문 서적을 구해 용어부터 메모했다.

홍 감독, 베를린서 최근 3연속 수상 쾌거

1997년 김동호 부산영화제집행위원장(왼쪽 둘째)은 로테르담영화제 심사위원장을 맡았다. 사진 왼쪽부터 당시 심사위원으로 활동한 튀니지 여성감독 모피다 틀라틀리, 김 위원장, 미국 평론가 파비아노 카노사, 벨기에 출신 프랑스 여성감독 샹탈 아케르만, 네덜란드 여배우 아리안 슈루터. [사진 김동호]

1997년 김동호 부산영화제집행위원장(왼쪽 둘째)은 로테르담영화제 심사위원장을 맡았다. 사진 왼쪽부터 당시 심사위원으로 활동한 튀니지 여성감독 모피다 틀라틀리, 김 위원장, 미국 평론가 파비아노 카노사, 벨기에 출신 프랑스 여성감독 샹탈 아케르만, 네덜란드 여배우 아리안 슈루터. [사진 김동호]

암스테르담을 거쳐 로테르담으로 갔더니 심사위원은 나와 미국 평론가 파비아노 카노사, 네덜란드 여배우 아리안 슈루터, 튀니지 여성감독 모피다 틀라틀리, 벨기에 출신 프랑스 여성감독 샹탈 아케르만(애커만)까지 다섯이었다. 아케르만은 베니스영화제(86년)와 베를린영화제(91년)에서 이미 심사위원을 지낸 세계적인 여성감독이었다. 내가 심사위원장을 맡게 된 건 집행위원장 사이먼과의 특별한 친분 때문이었다. 94년 6월 14일 영국 현대미술원(ICA) 영화 책임자이던 사이먼을 처음 만났다. 그는 ‘한국영화주간’ 행사를 기획하고 영화 선정을 마친 뒤 개막작품으로 내정한 ‘만다라’(임권택 감독)의 새 필름을 구하려고 친구인 영국인 영화평론가 토니 레인즈와 함께 서울을 방문했다.

나는 당시 문화부 차관에서 물러나 공연윤리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었다. 아시아 영화를 서구에 본격적으로 소개한 토니는 영화진흥공사 시절부터 종종 만나 온 지인이다. 나는 토니와 사이먼 그리고 박기용 감독을 퍼시픽호텔로 초대해 아침식사를 대접했다. 다음날 귀국한다기에 그날 오후 9시 한남동의 카페 ‘가을’에서 다시 만났다. 낮에 ‘만다라’ 제작사인 화천공사의 박종찬 사장에게 부탁해 새 필름을 빌려주겠다는 확답을 받았다. 그날 밤 나와 사이먼은 양주 한 병씩, 토니는 진 한 병을 마시며 환담했다. 두주불사의 사이먼과 의기상통했다.

사이먼은 95년 ICA에서 로테르담영화제 집행위원장으로 옮겼고, 나는 신설 부산영화제의 집행위원장을 맡았다. 부산영화제를 준비하던 다음해 5월, 사이먼을 칸영화제에서 다시 만났다. 귀국한 뒤 사이먼을 첫 부산영화제에 초청했지만, 자신의 영화제 준비로 오지 못했고, 대신 나를 심사위원장으로 초대한 것이다.

97년 로테르담영화제에서 다섯 명의 심사위원은 만장일치로 홍상수 감독의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에 ‘타이거상’을 주기로 결정했다. 경쟁작 중 세 편을 뽑아 상금 1만5000유로와 함께 수여하는 상이다. 당시 14편의 경쟁작에는 훗날 거장이 된 가와세 나오미(河瀨直美·일본), 왕샤오슈아이(王小帥·중국), 엘리아 술레이만(팔레스타인)의 첫 번째 또는 두 번째 작품이 포함됐다. 수상의 영예는 홍 감독의 첫 영화와 다른 두 감독의 작품에 돌아갔다. 홍 감독과의 만남은 출발부터가 좋았다.

홍 감독은 ‘돼지가 우물에 빠진날’(1996)부터 ‘소설가의 영화’(2022)까지 모두 27편의 장편영화를 만들었다. 이 중 한두 편을 제외한 모든 작품이 메이저 영화제에 초청받았거나 수상했다. 그만큼 한국영화를 세계에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임권택 감독이 3대 영화제의 문을 열었다면 홍 감독은 그 길 위에서 가장 많은 영화를 선보이면서 수상했다. 아르헨티나 마르델플라타에서 감독상을 받은 ‘해변의 여인’(2006), 낭트 제3대륙영화제에서최우수작품상을 수상한 ‘자유의 언덕’(2014), 로카르노영화제에서 황금표범상을 거머쥔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2015), 그리고 베니스에서 상영된 ‘밤과 낮’(경쟁, 2008), ‘옥희의 영화’(오리종티, 2010) 외에는 모두 칸과 베를린에서 상영됐다. 그만큼 칸과 베를린이 좋아하는, 어쩌면 편애하는 감독이다.

그의 작품 중 두 번째인 ‘강원도의 힘’(1998)과 세 번째인 ‘오 수정’(2000)은 칸의 ‘주목할 만한 부문’에 초청됐고,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2001)와 ‘극장전’(2005)은 경쟁부문에서 상영됐다. 2010년 ‘하하하’가 다시 칸의 주목할 만한 부문에 선정됐다. 공교롭게도 나는 이때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다. 칸에는 불문율이 있다. 영화제 책임자는 심사위원으로 위촉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내게 심사위원을 맡긴 건 15년간 지속해 온 칸과의 특별한 관계 때문이다. 부산영화제 집행위원장으로서는 그 해가 마지막 해라는 점도 배려했던 것 같다.

당시 나를 포함해 위원장인 프랑스 여성감독 클레어(프랑스식은 클레르) 드니, 프랑스 시네마테크 관장인 세르쥬 투비아나, 스위스 프로듀서 파트리크 페를라, 스웨덴 언론인 헬레나 린드브라드 등 다섯 명의 심사위원이 모두 19편을 심사했다. 클레어는 2002년 심사위원으로 부산영화제에 왔다가 당시 같은 심사위원이던 홍 감독과 심사 뒤 자갈치시장에서 거의 매일 밤새워 술을 마시면서 절친한 사이가 됐다. 물론 나하고도. 드니는 2년 뒤 ‘개입자(Intruder)’란 영화를 만들면서 일부를 부산에서 촬영했는데, 나는 그의 요청으로 그 작품에 출연도 했다. 이 영화는 베니스영화제 경쟁부문에서 상영됐고 나는 단역배우로도 알려졌다.

그해 주목할 만한 부문에는 거장 장 뤽 고다르(프랑스), 마노엘 드 올리베이라(포르투갈), 아바스 키아로스타미(이란)와 그자비에 돌란(캐나다), 지아장커(賈樟柯·중국) 등의 작품이 포함됐다. 올리베이라 감독의 ‘안젤리카의 이상한 사건’과 홍 감독의 ‘하하하’가 최종 심사에 올랐다. 당시 올리베이라 감독은 102세(1908년생), 홍상수는 50세(60년생)였다. ‘안젤리카의 이상한 사건’은 간명하면서도 메시지가 강했다. 100세가 넘은 감독이 이처럼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에 감탄했다.

‘밤의 해변 …’ 김민희, 베를린 여우주연상

영화제 책임자는 칸영화제 심사위원으로 위촉하지 않는다는 불문율을 깨고 2010년 심사위원에 선정된 김동호 부산영화제집행위원장(오른쪽 둘째). 사진은 당시 심사위원들. 왼쪽부터 프랑스 시네마테크 관장인 세르쥬 투비아나, 심사위원장인 프랑스 여성감독 클레어 드니, 스웨덴 언론인 헬레나 린드브라드, 김 위원장, 스위스 프로듀서 파트리크 페를라. [사진 김동호]

영화제 책임자는 칸영화제 심사위원으로 위촉하지 않는다는 불문율을 깨고 2010년 심사위원에 선정된 김동호 부산영화제집행위원장(오른쪽 둘째). 사진은 당시 심사위원들. 왼쪽부터 프랑스 시네마테크 관장인 세르쥬 투비아나, 심사위원장인 프랑스 여성감독 클레어 드니, 스웨덴 언론인 헬레나 린드브라드, 김 위원장, 스위스 프로듀서 파트리크 페를라. [사진 김동호]

칸·베를린·베니스영화제는 상금을 주지 않는다. 칸에선 황금종려상 외에는 트로피도 없다. 종이 상장만 수여한다. 다만, 주목할 만한 부문의 대상에는 프랑스 배급을 조건으로 배급업자에게 3만 유로를 준다. 그래서 우열을 가릴 수 없다면, 노장보다 역량 있는 젊은 감독에게 대상을 주자는 논리에 따라 결국 홍 감독이 받게 됐다. 5월 22일 열린 시상식 무대에는 그와 배우 예지원·유준상이 함께 올라가 수상했다.

예지원의 시상식 참석은 기적에 가까웠다. 당일 오후 그는 한국 귀국을 위해 칸을 출발, 니스공항에서 에어프랑스기에 탑승한 뒤 수상 소식을 들었다. 이륙하던 비행기 안에서 그는 ‘수상하러 가야 한다’며 승무원에게 영화제 카탈로그에 실린 자기 사진까지 보여 준 끝에 칸으로 돌아와 무대에 오를 수 있었다.

홍 감독은 그 뒤에도 칸과의 인연을 이어 갔다. ‘북촌방향’(2011)이 주목할 만한 부문에, ‘다른 나라에서’(2011)와 ‘그 후’(2017)가 경쟁 부문에, ‘클레어의 카메라’(2017)가 특별상영 부문에 각각 진출했다. 지난해엔 ‘당신 얼굴 앞에서’가 신설 부문인 ‘프리미아 섹션’에서 상영됐다.

베를린영화제는 뒤늦게 홍 감독에게 주목했다. 2012년 ‘누구의 딸도 아닌 혜원’이 경쟁부문에 소개된 뒤 2016년 ‘밤의 해변에서 혼자’로 배우 김민희가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김민희의 수상으로 베니스의 강수연, 칸의 전도연에 이어 3대 영화제에서 모두 한국 배우가 여우주연상을 받는 기록을 남겼다. 그리고 이번 베를린에선 홍 감독이 3년 연속 수상하기까지 했다.

나는 칸영화제는 96년부터, 베를린영화제는 98년부터 각각 매년 참가했기에 홍 감독을 해외에서 자주 만날 수 있었다. 더러는 양주 한 병을 사 들고 숙소에 찾아가 술잔을 나누기도 했고, 밖에서 회식도 자주 하면서 친숙해졌다. 내년이나 내후년에는 홍 감독의 황금종려상이나 황금곰상 수상의 낭보가 전해 오지 않을까 고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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