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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현상의 시시각각

굽은 막대 함부로 펴다간 부러진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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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현상 기자 중앙일보 논설실장
이현상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현상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문재인 정부 부동산 실정(失政)의 출발은 일차원적 사고였다. 규제와 세금, 공공임대 확대로 수요를 누르면 집값은 간단히 잡힌다고 생각했다. 부동산 문제가 기대와 욕망, 돈과 심리가 얽힌 고차 방정식임을 외면했다. 문 대통령은 취임 초 "부동산을 잡으면 피자 한 판씩 쏘겠다"고 농담하듯 말하더니 임기 중반엔 "부동산은 안정됐다"며 엉뚱한 통계를 들이댔다.

규제 완화 기대감에 부동산 불안 #'전 정권과 차별' 집착은 경계해야 #"부자 위한 정책" 소리 나오면 위험

윤석열 정부의 밑그림을 그리는 인수위도 문제를 너무 쉽게 생각하는 건 아닌지 걱정스럽다. 인수위가 잇따라 내놓는 부동산 대책은 규제 완화 일변도다. 다주택자 양도소득세 중과 유예, 임대차 3법 폐지·축소, 재건축 규제 완화, 주택담보대출비율(LTV) 상향 등이다. 규제가 오히려 집값과 전셋값 폭등을 초래한 모순을 해소하겠다는 의도는 이해가 간다. 그러나 규제를 풀면 곧바로 문제가 풀릴 것이라는 생각은 단순하다. 규제로 집값을 잡을 수 있다는 생각만큼 일차원적이다.

차기 정부의 재건축 규제 및 다주택자 보유세 완화 기대감에 재건축 단지가 있는 서울 강남 지역 아파트 값이 상승세로 돌아섰다. 7일 한국부동산원에 따르면 서울 아파트 가격이 10주간의 하락장을 끝내고 보합세로 돌아섰다. 강남 서초구와 용산구의 상승폭은 커졌고, 광진 양천 동작구는 보합 전환했다. [뉴스1]

차기 정부의 재건축 규제 및 다주택자 보유세 완화 기대감에 재건축 단지가 있는 서울 강남 지역 아파트 값이 상승세로 돌아섰다. 7일 한국부동산원에 따르면 서울 아파트 가격이 10주간의 하락장을 끝내고 보합세로 돌아섰다. 강남 서초구와 용산구의 상승폭은 커졌고, 광진 양천 동작구는 보합 전환했다. [뉴스1]

"우로 굽은 막대를 바로잡으려면 의도적으로 좌로 힘을 줘야 한다." 러시아 혁명 과정에서 당내 노선 투쟁을 벌였던 레닌의 말이다. 규제 완화는 말하자면 새 정부의 '우로 힘주기'다. 그러나 민생 정책은 노선 투쟁이 아니다. 굽은 막대를 편답시고 무리하게 반대로 구부리다간 막대가 부러지는 수가 있다. 정권의 색깔과 관계없이 최소한의 정책 일관성은 유지해야 한다. 무엇보다 1가구 1주택 원칙은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 양도세 유예 기간이 끝날 때까지 버티는 다주택자들에겐 "버텨 봤자 손해"라는 확실한 신호가 있어야 한다.

윤 당선인은 공약으로 LTV 70% 일괄 상향을 내걸었다. 그러나 가계 부채 상황이 만만찮다. 국제통화기금(IMF)도 LTV·DSR(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 같은 대출 규제 강화를 한국 정부에 주문한 마당이다. 집값을 밀어 올리는 동력은 뭐니뭐니해도 유동성이다. 유시민씨가 정리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서전 『운명이다』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유동성 규제를 하지 않고도 부동산 가격 폭등을 막을 수 있는지 몇 차례나 경제보좌관과 장관들에게 물었다. 문제없다는 대답을 들었다. 그걸 믿은 게 잘못이었다." 윤 당선인이 새겨들을 대목이다.

부동산 문제를 전쟁에 비유하는 건 어폐가 있으나 치밀한 작전이 앞서야 함은 다를 바 없다. 현대전은 미사일과 공습으로 적의 사령부와 방공망, 무기고 같은 전략 거점을 제압한 뒤 지상군을 투입하는 패턴을 취한다. 작전의 기본은 위험 관리다. 1991년 걸프전 때 미국은 이라크에 40일 동안 공습을 퍼부은 뒤 단 100시간의 지상작전으로 쿠웨이트를 수복했다. 인수위의 규제 완화 일변도가 행여 적의 방공망을 그대로 둔 채 지상군을 투입하는 무모함은 아닌지 따져봐야 한다.

다행히 시간은 윤석열 정부에 불리하지 않다. 금리 인상과 유동성 축소를 앞두고 시장은 지난해 하반기부터 숨을 고르는 형국이다. 일부 전문가는 오히려 급락을 걱정할 정도다. 이런 판에 전 정부와의 차별성을 앞세워 정제 안 된 대책으로 시장을 들쑤실 필요가 없다. 어리석은 사령부가 택하는 작전이 급한 김에 되는대로 병력을 전선으로 내모는 '축차(逐次) 투입'이다. 문재인 정부의 30번 가까운 땜질식 처방은 축차 투입의 전형이었다. 견고한 시장 앞에서 정책 역량만 낭비했다. 정교한 로드맵을 짜 정책 신뢰와 예측 가능성을 높이는 것이 우선이다.

보수 정권에 따르는 달갑잖은 딱지가 '부자 정부'다. 윤석열 정부도 예외가 아니다. 인수위 구성, 총리 지명자 고문료 등에서 벌써 뒷말이 나온다. 부동산 대책마저 이런 낙인이 찍힌다면 정책이 힘을 받을 수 없다. 모처럼 잠잠하던 서울 강남 부동산이 다시 들썩인다. 세금 완화 기대에 '똘똘한 한 채' 심리까지 가세해 "일단 버텨보자"는 심리가 번지고 있다. 전 정권의 부동산 민심 이반을 디딤돌 삼아 집권한 윤석열 정권엔 몹시 위험한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