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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수저에 남은건 아이돌뿐"…극한훈련 버티는 K팝 악바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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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활동한 일본 3인조 걸그룹 '소녀대(少女隊)'. [중앙포토]

1980년대 활동한 일본 3인조 걸그룹 '소녀대(少女隊)'. [중앙포토]

1986년 7월, 86아시안게임을 앞두고 열린 서울 국제가요제에서는 세계 각국의 가수들이 초대되어 기량을 뽐냈다. 이중 가장 시선을 모은 팀은 일본의 3인조 걸그룹 소녀대( 少女隊). 흥겨운 비트의 댄스곡을 소화한 이들의 퍼포먼스는 이제껏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무대였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소녀대와 비슷한 걸그룹이 등장한 것은 10년이나 지난 뒤였다.

[K아이돌 탄생기 2]

한·일 아이돌의 역전  

일본 걸그룹 AKB48의 데뷔 7년 차인 미야와키 사쿠라는 한·일 합작 걸그룹 오디션 '프로듀스 48'에 연습생 신분으로 도전했다. [사진 Mnet]

일본 걸그룹 AKB48의 데뷔 7년 차인 미야와키 사쿠라는 한·일 합작 걸그룹 오디션 '프로듀스 48'에 연습생 신분으로 도전했다. [사진 Mnet]

90년대 중반 태동한 K팝이 J팝을 모방해 발전했다는 건 비밀이 아니다. 80년대부터 아이돌 문화가 발달한 일본 대중음악에 대한 한국 대중의 관심은 뜨거웠다. 90년대만 해도 스맙(SMAP) 같은 일본 인기 그룹이 한국에서 막강한 팬덤을 형성했다.
그런데 한 세대가 지난 현재 양국의 위치가 완벽하게 뒤집혔다.
2000년대 중반 동방신기·소녀시대·트와이스 등이 일본으로 건너가 오리콘 차트에 오르면서, 이젠 일본 내에서도 “수준이 다르다”는 말이 나온다. 일본의 주요 거리에 K팝이 흘러나오고, 유명 연예인까지 K팝의 팬임을 인증하는 시대가 됐다.

양국의 위상 차이는 2018년 Mnet의 한·일 합작 걸그룹 오디션 ‘프로 듀스 48’을 봐도 확연하다.
당시 일본 측은 최고 걸그룹이라 평가받던 AKB48에서 미야와키 사쿠라, 마츠이 쥬리나 등 인기 정상의 멤버들을 내보냈다. 반면 한국에선 데뷔도 하지 못한 연습생들이 출전했다. 당시 데뷔 7년 차인 미야와키 사쿠라는 '프로듀스 48'에 연습생 신분으로 도전한 이유를 묻자 “한국 걸그룹처럼 최고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내수형 vs 수출형

2017년 'MAMA'에 참석한 일본 걸그룹 AKB48. [사진 Mnet]

2017년 'MAMA'에 참석한 일본 걸그룹 AKB48. [사진 Mnet]

이같은 한국과 일본의 격차는 어쩌면 당연한 결과다. 양국의 ‘아이돌 생산 라인’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AKB48로 대표되는 일본 아이돌은 철저히 ‘내수용’이다. 자국 시장이 충분히 크기 때문에 밖으로 나갈 필요가 없다. 인구가 1억 명이 넘고 음반이나 굿즈 등에 대한 소비력이 탄탄하게 시장을 받쳐준다. 이들은  실력보다는 ‘악수회’로 대표되는 팬과의 만남 등 정서적 공감을 통해 인기를 얻는다.

반면 시장이 작은 한국은 생존을 위해 수출형 아이돌을 만든다.수출형 아이돌에겐 철저한 연습을 통해 압도적인 실력을 갖추는 게 중요하다. 해외에선 멤버의 개인 서사나 본연의 매력만으로는 관심을 끌기 어려운 구조이기 때문이다.

이중 단연 돋보이는 것은 여러 명이 마치 한 몸처럼 움직이는 '칼군무'다. 방탄소년단(BTS)의 리더 RM은 2017년 빌보드 뮤직 어워드에서 처음으로 ‘톱 소셜 미디어 아티스트’ 부문에서 수상했을 때 “트렌디한 사운드를 좋게 봐주는 것 같고, 칼군무도 해외 팬들이 보기에 새롭게 비치지 않았나 싶다”고 소감을 밝혔다. 하재근 대중문화평론가도 “K팝이 해외에서 큰 인기를 얻은 가장 큰 원동력 중 하나가 칼군무라고 생각한다”며 “서양에 친숙한 음악을 하면서 이런 안무까지 소화가 가능하다는 점이 해외 팬들에게 충격적으로 다가왔을 것”이라고 말했다.

걸그룹 소녀시대가 2009년 처음 일본에 진출했을 때도 칼군무가 돋보이는 ‘소원을 말해봐’가 큰 화제가 됐다. 당시 일본의 한 걸그룹 멤버는 “우리는 저렇게 못 한다”고 말할 정도로 놀라움을 나타냈다.

일본 공연 오프닝 무대인 '소원을 말해봐'를 선보이는 소녀시대. [사진 SM엔터테인먼트]

일본 공연 오프닝 무대인 '소원을 말해봐'를 선보이는 소녀시대. [사진 SM엔터테인먼트]

이같은 실력은 합숙과 혹독한 트레이닝을 통한 한국형 아이돌 육성 시 스템에서 비롯됐다.
일본의 경우 아이돌 연습생이나 데뷔 멤버 모두 합숙이 없고, 자택에서 출퇴근한다. 또, 트레이닝도 자율에 맡기는 경우가 적지 않다. 반면 한국은 국가대표처럼 철저한 엘리트 육성 시스템을 거친다. 아이돌 연습생들의 삶은 '태릉 선수촌'을 연상케 할 정도다.

태릉 선수촌급 훈련으로 다듬는 ‘칼군무’ 

데뷔를 앞둔 ‘데뷔조’에 선발되면 숙소에서 멤버들과 단체 생활을 한다. 또 연습생들은 매달 노래, 댄스 테스트를 받는 한편 체중 증감까지 검사받는다. 해외에서라면 받아들이기 어려운 조건이다. 이런 과정은 다큐멘터리 ‘나인뮤지스, 그녀들의 서바이벌’에 소개되기도 했다. 이 작품은 9인조 걸그룹 나인뮤지스의 데뷔 과정을 다큐멘터리다. 암스테 르담 국제 다큐멘터리 영화제(IDFA), 밴쿠버 영화제, 상하이 국제영화제 등 해외 유수 영화제에 초청돼 큰 관심을 얻었다.

해외 언론은 종종 혹독한 연습생 시절을 거쳐야 하는 K팝 시스템을 ‘공장’에 비유하며 비판하기도 한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2020년 3월 ‘K팝 신화의 뒷면’이라는 기사를 통해 “K팝의 성공 요인은 강도 높은 훈련 시스템”이라면서 “경쟁을 강조하는 한국의 사회 시스템이 K팝을 만드는 배경”이라고 진단했다. 이 기사는 서울의 한 K팝 전문 학원을 소개하면서 400여명의 학원생 중 10% 미만만 기획사의 오디션을 통과했으며, 학생 중 40%는 서울 이외의 지방 출신이라고 지적했다.

 9인조 걸그룹 나인뮤지스의 데뷔 과정을 다큐멘터리로 담은 영화 '나인뮤지스; 그녀들의 서바이벌'. [사진 민치앤필름]

9인조 걸그룹 나인뮤지스의 데뷔 과정을 다큐멘터리로 담은 영화 '나인뮤지스; 그녀들의 서바이벌'. [사진 민치앤필름]

그런데도 K팝에 아이돌 지망생이 몰리는 이유는 계층 이동이 갈수록 어려워지는 사회에서 몇 안 되는 신분 상승의 기회로 보이기 때문이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과거엔 학업, 특히 고시를 통해서 신분을 상승시킨다는 개념이 있었지만 이제 그런 '사다리'가 많이 사라졌고 남은 건 운동과 K팝이라는 인식이 강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K팝은 그래도 아직 공개 선발을 하는 등 집안이나 재력이 부족해도 실력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기대가 있다”라고 설명했다.

한 기획사 관계자는 “집안이 유복한 쪽보다는 어려운 쪽이, 서울보다는 지방 출신 연습생이 ‘악바리’처럼 버티는 경우가 많다”며 “이들에겐 꼭 성공해서 집안을 일으켜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고 이것 외엔 기댈 수 있는 게 없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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