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리앗’ 러에 맞선 ‘다윗’ 우크라의 힘은 디지털 리더 양성

중앙선데이

입력 2022.04.02 0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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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2호 22면

디지털 걸리버여행기 

우크라이나 국기를 게양해 지지를 천명한 하버드대. [사진 하버드]

우크라이나 국기를 게양해 지지를 천명한 하버드대. [사진 하버드]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지 5주가 지났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독재자, 전범이라고 부르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 의해 한 국가의 주권이 무참히 훼손됐다. 로이터에 따르면 지금까지 최소 1000만명의 난민과 2만3000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이 골리앗과 다윗의 전쟁은 시작할 때만 해도 푸틴의 무대인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경직되고 폐쇄된 세계를 살아온 골리앗은 새로운 패러다임의 부상을 예견하지 못했다. 희극 배우 출신의 볼로미디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소셜미디어(SNS)와 디지털 정책, 스토리텔링은 골리앗의 탱크와 미사일에 맞서는 다윗의 돌멩이가 됐다. 과거 전쟁 룰을 뛰어넘는 패러다임의 변화가 일어났다. 전쟁을 반대하는 전 세계가 이 패러다임의 주역 젤렌스키에게 환호하고 있다. 러시아와 인접한 폴란드와 체코, 슬로베니아의 총리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이우를 기차로 방문해 젤렌스키와 함께 한다는 연대를 보였다.

전쟁 전만 해도 유럽에서 존재감이 높지 않던 젤렌스키가 러시아와의 전쟁을 통해 21세기 처칠이 됐다. 3월 25일 키이우에 잠입한 영국의 이코노미스트 취재팀이 젤렌스키에게 어떻게 이런 큰 변화가 일어났는지 물었다. 그는 자신을 있는 대로 드러내는 정직함을 리더십의 최우선으로 들었다.

젤렌스키, 미·영 의회서 원격 화상 연설

지난해 9월 스탠퍼드대에서 연설하고 있는 젤렌스키 대통령. [사진 스탠퍼드]

지난해 9월 스탠퍼드대에서 연설하고 있는 젤렌스키 대통령. [사진 스탠퍼드]

젤렌스키는 수도 키이우에 대한 러시아의 공격이 임박하자 피신을 권유한 미국과 터키 정부에게 안전한 곳으로의 라이드(ride) 대신 싸우는 데 필요한 무기를 달라고 말한 후 SNS로 자신이 키이우에서 우크라이나 국민과 함께 끝까지 싸울 것을 알렸다. 세계와 직접 소통하며 여론의 힘을 모아 침략자에 대항했다.

지난 3월 8일 세계에서 처음으로 피침략국가 우크라이나의 대통령으로서 전투가 진행 중인 수도에서 영국 의회를 인터넷으로 연결해 감동적인 화상 연설을 했다. 이어 폴란드, 미국, 독일, 이스라엘, 일본 등 전쟁을 반대하는 주요국의 의회에서도 인터넷 화상 연설을 했다. 국가 원수만을 상대하는 데 한계를 느낀 젤렌스키가 각국의 의회와 국민에게 직접 다가가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젤렌스키의 영국 의회 연설은 13일간의 전쟁 고통을 하루하루 열거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이어 셰익스피어의 ‘햄릿’에 나오는 ‘죽느냐, 사느냐(To be or not to be)’를 인용하면서 우리의 답은 사는 것이며(to be)이며, 포기하지 않고 패배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우리는 숲에서, 들에서, 해변에서, 거리에서 끝까지 싸울 것이다.”

그의 이 다짐은 1940년 6월 윈스턴 처칠의 명연설을 따온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초기에 독일군의 공격으로 수세에 몰렸던 영국의 역사를 상기시키며 영국의 도움을 호소한 것이다. 감동한 보리스 존슨 총리와 영국 의원들이 기립 박수로 답했다.

3월 16일의 미국 상하원 합동 연설에서 젤렌스키는 1941년의 진주만 공습과 2001년의 9·11 테러를 상기시켰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우크라이나만을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미래의 이름을 걸고 유럽과 세계의 가치를 위해 싸우는 것입니다. 미국이 우크라이나를 돕는 것은 유럽과 전 세계를 돕는 것이며 역사에서 정의를 지키는 것입니다.”

우방국 의회에 인터넷 화상 연설로 전쟁의 비극을 보여주면서 호소하는 그의 새로운 외교는 지난해 9월 워싱턴 DC에서 바이든 대통령을 만난 후 서부의 실리콘 밸리를 직접 방문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우크라이나에서는 어떤 것이든 가능하다(Anything is possible). 9월 2일 젤렌스키의 스탠퍼드 연설의 핵심이다. 부패를 몰아내고 러시아 침략 위협에 맞서기 위해 민주적이고 투명한 체제를 구축하고 있으며 스티브 잡스의 스탠퍼드 졸업식 연설 ‘Stay Hungry, Stay Foolish’ 정신에 따라 변화를 추진하고 있다고 그는 말했다.

실제로 우크라이나는 정부를 투명하게 하기 위해 디지털 ID, 디지털 패스포트, 디지털 인허가, 모바일 투표 등 모든 공공 서비스의 디지털화를 추진하면서 관련 산업의 발전을 도모하고 있다. 애플 최고경영자(CEO) 팀 쿡을 만나고 벤처 캐피털을 만나 협력을 요청했다. 전쟁 때문에 이 계획은 멈춰 있지만 어떤 것이든 가능하다는 믿음은 우크라이나를 러시아에서 지키는 힘의 근간이 되고 있다.

젤렌스키 대통령의 화상 연설에 기립 박수를 보내고 있는 영국 하원의원들. [AP=연합뉴스]

젤렌스키 대통령의 화상 연설에 기립 박수를 보내고 있는 영국 하원의원들. [AP=연합뉴스]

젤렌스키의 실리콘 밸리 방문은 스탠퍼드가 우크라이나와 쌓아 온 관계 때문에 가능했다. 2005년부터 20명 이상의 우크라이나 리더들이 스탠퍼드 ‘민주주의와 개발, 법의 지배’ 센터의 ‘드레이퍼 힐즈’ 연수 프로그램을 졸업했다. 2016년부터는 UELP(Ukrainian Emerging Leaders Program) 프로그램을 만들어 우크라이나의 차세대 리더가 10개월 동안 스탠퍼드에서 연구하도록 했다. 2021년에 3명의 차세대 리더가 초청됐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터지자 스탠퍼드대 마크 테시에-라빈 총장은 바로 우크라이나 출신 학생들과 학자들을 만나 위로했다.

스탠퍼드대만 우크라이나에 대해 선제적 투자를 한 것은 아니다. 지난 2월 28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나흘 뒤 로렌스 바카우 하버드대 총장은 다음과 같이 공개적 입장을 밝혔다.

“비난받아 마땅한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수많은 생명을 위험에 빠뜨리고 한 국가의 주권을 훼손했습니다. 민주주의 이상과 인권을 수호해야 하는 우리 대학은 이런 무자비한 침략을 규탄할 책임이 있습니다. 오늘부터 하버드는 우크라이나 국기를 게양하고 우크라이나 국민과 함께할 것입니다.”

선도 대학의 총장으로서 당연한 이 입장 표명은 하버드대의 우크라이나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한다. 이 대학은 1948년 러시아 연구센터를 설립해 러시아와 유라시아를 연구해 왔으며 1973년에는 우크라이나 연구를 위한 독립 연구소를 설립했다.

국제 사회의 깨어 있는 지성으로서 적시에 의견을 밝히며 세계를 선도하는 하버드와 스탠퍼드대학을 이끄는 총장은 어떤 사람들인가? 공통점이 있다. 스티브 잡스처럼 흙수저로 태어나 항상 새로운 것을 찾고 도전한다. 2018년 하버드 총장으로 취임한 바카우 총장은 제2차 세계대전 중 유럽에서 탈출해 미국으로 온 유대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벨라루스 출신이며 어머니는 가족 중에서 혼자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았다. 그는 MIT 경제학사와 하버드 로스쿨 법무 박사(J.D.), 공공정책학 박사 학위를 받은 후 1977년부터 MIT에서 24년간 도시 계획 분야를 연구했다. 2001년 터프츠대 총장으로 발탁됐다가 2011년 하버드대로 옮긴 후 2018년 67세의 나이에 총장이 됐다.

변방 아웃라이어가 패러다임 변화 주도

스탠퍼드대는 21세기를 맞아 퀀텀 도약을 위해 연구로 창업해 성공한 흙수저 출신의 교수들을 총장으로 임명했다. 마크 테시에-라빈 총장은 직계 가족 중 처음으로 대학 학위를 받았다. 캐나다 맥길대를 조기 졸업한 후 영국 옥스퍼드대에 입학해 철학과 생리학으로 학사학위를 또 받았다. 영국 유니버시티칼리지런던(UCL)에서 생리학 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1991년 캘리포니아대 샌프란시스코(UCSF) 교수가 되었다가 2001년 스탠퍼드로 옮겼다. 2003년 제넨테크(Genentech)의 최고 과학책임자로 발탁되어 암, 면역체계 혼란, 감염병, 신경퇴행질환 등 질병과 신약을 연구하는 1400명의 과학자를 이끌었다. 2011년 록펠러 대학교 총장을 거쳐 2016년 9월 스탠퍼드 총장이 됐다.

스탠퍼드대를 2000년부터 16년간 이끈 존 헤네시 총장은 컴퓨터 아키텍처 연구로 회사를 창업하고 산업에 기여한 공로로 튜링상을 받은 컴퓨터 과학자다. 그는 저서 ‘리더십의 중요성(Leading Matters)’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회사를 설립하고 성공적으로 기업공개(IPO)를 하기까지 5년 동안 몇 차례 위기를 겪다 보니 그런 어려움에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겼다. 또한 뭔가를 하겠다는 결의를 가진 소수의 사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뒤 우리 대학이 세상에 더 크고 긍정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게 하는 여정을 시작하게 됐다.”

국가든 대학이든 끊임없이 변하지 않으면 영원할 수 없다. 토머스 쿤은 패러다임의 변화는 불연속적 전환을 통해 일어나며 주류 세력이 아닌 변방의 용감한 아웃라이어가 이런 전환을 이끈다고 했다. 배우 출신의 젤렌스키 대통령과 손꼽히는 미국 대학의 총장들은 처음부터 주류가 아니었다.  이들은 불연속적 전환을 두려워하지 않는 리더들이다. 젤렌스키가 우크라이나의 주권 수호에 성공하기를 기원한다.

차상균 서울대 데이터사이언스대학원장. 서울대 전기공학사, 계측제어공학석사, 스탠퍼드대 박사. 2014~19년 서울대 빅데이터연구원 초대 원장. 2002년 실리콘밸리에 실험실벤처를 창업했다. 이 회사를 인수한 독일 기업 SAP의 한국연구소를 설립해 SAP HANA가 나오기까지의 연구를 이끌고 전사적 개발을 공동 지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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