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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안 들이고 주가 띄우기, 1분기에만 9개 기업 ‘주식분할’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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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2호 14면

주식 액면분할 열풍 

서울에 사는 직장인 김모(45)씨는 최근 아세아시멘트 주식에 투자했다. 이 회사가 주식 액면분할(주식분할) 계획을 밝힌 뒤 주가가 한 달 동안 21% 넘게 급등하자 투자를 결심한 것이다. 김씨는 “액면분할 소식에 이목이 쏠리자 주가도 제대로 평가받기 시작한 것 같아 투자했다”며 “사업 내용이 투자자들의 눈길을 끌기 어려운 시멘트 기업인 탓에 아직도 주가가 순자산 가치에도 미치지 못해 추가 상승에 베팅한 것”이라고 말했다. 아세아시멘트는 지난해 영업이익이 69.4% 증가하고도 올 들어 주가가 약세를 보였다. 이 회사의 주당순자산가치(PBR)는 0.7배에 불과하다. PBR이 1배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은 당장 자산을 전부 내다팔아 회사 주식을 몽땅 사도 돈이 남는다는 뜻이다.

최근 주식시장에 주식 액면분할 바람이 불고 있다. 아세아시멘트를 비롯해 신세계인터내셔날, 한미반도체 등이 잇따라 액면분할을 공시했다. 주식 액면분할은 기존에 거래되던 주식 1주를 여러 주로 쪼개 유통 주식 수를 늘리는 것이다. 주식을 쪼갠 만큼 1주당 주가가 낮아져 신규 투자자 유입을 기대할 수 있다. 예컨대 1주에 10만원하던 주식을 2개로 쪼개면 주가는 1주당 5만원이 된다. 회사 입장에선 현금 배당과 자사주 매입 등 재원을 투입해야 하는 주가 부양책과 달리 대규모 자금 동원 없이 주가를 부양할 수 있다는 점이 장점이다.

주당순자산가치 낮아 추가 상승 여지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올 들어 1분기에만 9개 기업이 액면분할을 공시했거나 단행할 예정이다. 이같은 추세라면 연간 36개 기업이 액면분할에 나설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작년과 2020년을 훌쩍 뛰어넘는 것으로 최근의 분위기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국내 주식시장에 액면분할이 유행처럼 번지는 건 올해 들어 국내 증시가 급락 후 횡보장을 이어가고 있는 것과 무관치 않다. 올 초만 해도 3000선에 근접했던 코스피는 3월 말 2757.65를 기록하며 연초 대비 7.7% 낮은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코스닥도 연초 대비 8.9% 하락한 상태다. 이처럼 주가가 저조하자 기업들이 ‘주가 띄우기’에 나섰다는 것이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미국 구글(알파벳)·아마존·테슬라와 같은 글로벌 기업의 주가 영향도 있다. 이들 기업은 최근 일제히 주식분할을 발표하면서 주가가 급등세다. 국내에서도 서학개미들의 매수 상위에 이름이 오르내리는 이들 기업은 비싸기로 유명하다. 아마존과 구글의 모회사 알파벳은 주가가 각각 3200달러, 2700달러를 넘고 테슬라도 1000달러대 위에서 거래되고 있다. 주식을 쪼개 신규 투자자들을 끌어들일 만한 상황인 것이다. 알파벳은 7월 기존 주식을 20대 1로 분할한다. 아마존은 3월 9일 이사회에서 액면분할을 의결하며 6월에 현재 주식 1주를 20주로 쪼개기로 했다. 김호준 대신지배구조연구소장은 “글로벌 기업들이 액면분할로 주가를 부양하자 국내에서도 투자자들의 요구가 커진 것이 사실”이라며 “주식 액면분할은 기업가치에는 변화가 없지만, 거래가 적을 경우 유통 주식 수를 늘린다는 측면에서 주가 상승에 긍정적”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뱅크오브아메리카가 지금까지 액면분할에 나선 기업들의 1년 후 주가를 집계해본 결과, 평균 25% 상승을 기록한 것으로 나타났다. 같은 기간 주식 시장 평균 상승률은 9%에 그쳐 상승률이 3배 가까이 높았다. 주식분할이 주가의 촉매제로 작용했단 얘기다. 최근 액면분할을 발표한 구글과 아마존, 테슬라 모두 주가가 급등세다. 테슬라는 28일(현지시간) 액면분할 계획을 공시한 뒤 주가가 8% 넘게 급등했다. 2월 액면분할 계획을 발표한 구글도 발표 직후 주가가 7.5% 올랐다. 아마존 주가는 최근 한 달 새 10.03% 상승했다.

주변 환경 침체 탓 주식분할 이어질 듯

국내 기업 중에선 속옷 브랜드 ‘비너스’로 유명한 신영와코루가 10대 1 액면분할을 공시한 날 5.58% 상승 마감했다. 이 회사 내부 사정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신영와코루는 최대주주와 지주회사 지분이 74%에 이를 정도로 유통 물량이 적은 주식”이라며 “주식을 쪼개 유통 주식 수를 늘려 주가를 부양하기 위한 선택에 나선 것”이라고 말했다.

증권가에선 증시 주변 환경 침체 탓에 기업들의 주식 쪼개기 행보가 당분간 이어질 것으로 점치고 있다. 지정학적 위기와 인플레이션, 중앙은행의 긴축 전환 등 최근 증시를 짓누르는 악재들은 개별 기업 입장에서 손 쓸 도리가 없으니 부양책으로 주식 액면분할을 선택한 것이란 얘기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액면분할이라는 이벤트로 주가가 단기 상승할 수는 있지만, 기업 실적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역효과가 날 수도 있다고 지적한다. 호실적을 내고도 주식의 유통 물량이 적어 주가가 상승하지 못했던 기업이라면 도움이 되겠지만, 반대의 경우라면 주식 액면분할이 힘을 쓰지 못한단 얘기다.

실제로 2019년부터 2021년까지 3년간 국내 증시에서 액면분할을 단행한 기업 71곳 가운데 한 달 뒤 주가가 하락하지 않은 곳은 24곳에 불과하다. 국내 대표 포털 사이트인 네이버만 하더라도 2018년 10월 1주를 5주로 쪼개는 액면분할을 실시한 뒤 한 달 만에 주가가 18% 하락한 바 있다. 국내 액면분할의 대표 사례로 꼽히는 삼성전자도 2018년 5월 50대 1 액면분할 이후 5만원대에 거래되던 주가가 연말 3만원대까지 빠졌다. 박세익 체슬리투자자문 전무는 “수급은 모든 재료에 우선한다는 주식시장의 격언대로 주식 액면분할은 수급을 개선해 단기적으론 주가 부양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며 “다만 액면분할 자체가 기업 가치를 높이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무턱대고 추격매수에 나서기 보단 회사 상황을 꼼꼼히 살펴야 한다”고 말했다.

최근의 증시 상황을 냉정하게 돌아봐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시장 상황이 좋다면 걱정할 게 없겠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김영익 서강대 경제대학원 교수는 “대표적인 경기침체 신호로 여겨지는 장단기 금리차(미국채 2년물과 10년물 금리 차이)가 최근 역전될 정도로 경기 침체가 우려되는 상황”이라며 “이런 상황에서 회사 재원을 투입하지 않고도 주가를 부양할 수 있는 주식 쪼개기가 각광받는 것은 그 만큼 경기가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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