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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야의 이리처럼 산 방랑자, 포도주 탐닉하며 고독 견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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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1호 28면

와글와글

스위스 몬타뇰라에 있는 헤르만 헤세 박물관. [사진 위키피디아]

스위스 몬타뇰라에 있는 헤르만 헤세 박물관. [사진 위키피디아]

봄기운 때문일까. 오디세우스를 유혹하던 세이렌 자매의 목소리처럼 어디선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훌쩍 떠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아쉬움을 달래고자 영화 ‘이지 라이더’를 다시 봤다. 피터 폰다, 데니스 호퍼, 잭 니콜슨이 오토바이를 타고 드넓은 미대륙을 누비는 전설적인 로드 무비로 영화 속에 등장한 할리데이비슨은 개조한 초퍼형으로 이후 자유영혼의 로망이 됐다. 황야를 달릴 때 배경음악으로 들리던 ‘본 투 비 와일드(Born to be wild)’는 이 영화의 백미였다. 기성세대의 위선에 저항하던 젊은이들에게 절규처럼 여겨졌으며, 노래 가사 속에 ‘헤비메탈’이란 말로 인해 헤비메탈 음악의 선구자가 되기도 했다. 이 노래를 부른 록밴드의 이름은 스테픈울프(Steppenwolf), 헤르만 헤세의 소설 제목 ‘황야의 이리’에서 유래된 것으로 독일어 발음으로는 ‘슈테펜볼프’라 한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미국 반전(反戰) 세대는 헤르만 헤세에 열광했다.

한국과 일본에서 헤세 열풍의 진원지가 ‘데미안’이었던 것과 달리 서구에서는 ‘황야의 이리’와 ‘싯다르타’가 엄청난 인기였다. 월남전과 핵전쟁 위기 앞에 반전과 반핵을 외치고 탈권위주의를 모토로 자연이 전하는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자고 외쳤다. 특히 히피들에게 성서처럼 여겨졌던 작품이 ‘황야의 이리’였다. 이 소설은 세상으로부터 동떨어진 채 홀로 방랑하는 하리 할러의 고독이 모티브다.

“그는 매우 조용한 고독자의 삶을 살았다. 매우 비사교적인 사람, 그는 가끔 스스로 불렀듯이 정말 한 마리 황야의 이리, 내가 사는 세계와 다른 세계에서 온 낯설고 야성적이면서도 수줍어하는 존재였다.”

미국 반전 세대, 헤르만 헤세에 열광

소설 『황야의 이리』 초판. [사진 위키피디아]

소설 『황야의 이리』 초판. [사진 위키피디아]

작품 주인공은 쉰 살쯤 되어 보이는 남자로 묘사하고 있는데 공교롭게도 1927년 그의 나이 50살 생일을 즈음해 발표됐다. ‘황야의 이리’ 주인공과 헤세는 비슷한 게 많다. 주인공 하리 할러의 이름을 줄이면 HH, 헤르만 헤세의 그것과 같다. 고향을 떠나 타국의 낯선 곳에 떠돌이 삶을 살아야 했었으니까. 주인공의 방을 묘사한 장면은 곧 헤세가 평소 관심을 기울이던 것들이다.

“시암 종파의 부처 그림, 미켈란젤로의 조각 ‘밤’의 복제품, 마하트마 간디의 초상으로 바뀌었고 옆에는 온갖 술병이 나뒹굴고 있었다. 짚으로 감싼 한 술병에는 대체로 근처 작은 가게에서 사 온 이탈리아산 적포도주와 말라가산 포도주도 보였다.”

주인공의 단골 술집은 세상에 실망한 이의 피난처, 포도주 한 병 마시면 마취제가 되어 하룻밤의 고독과 고단함을 견디게 해주는 것으로 묘사됐다. 이 작품 속 와인은 방랑자의 고독을 가리키는 은유다. 이는 헤세가 좋아했던 중국 시인 이태백의 시 ‘춘일취기언지(春日醉起言志)’에 그려진 명정(酩酊) 상태 개념과 비슷하다. 명정이란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로 취한 상태를 의미하는데 무상한 인생의 슬픔과 괴로움을 잊기 위해 술을 친구로 삼은 결과다. 헤세는 이태백의 시를 패러디해  ‘클랑소어 가을 숲속에서 통음하다’란 시를 쓰기도 했다.

여기서 짐작할 수 있듯이 헤세는 평생 포도주에 탐닉했던 작가였다. 그렇다고 술에 취해 있었다는 뜻은 아니다. 훗날 스위스 남쪽  몬타뇰라에 살 때 작은 포도 농원을 소유했으며, 그런 연유로 2021년 몬타뇰라의 헤르만 헤세 박물관에선 ‘릴케, 헤세, 뒤렌마트 그리고 와인’이라는 이름의 특별전이 열리기도 했다. 세 사람의 국적이 다르긴 했어도 모두 독일어로 쓴 작가였으며, 스위스와 인연을 맺었고 하나같이 와인에 탐닉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와인, 산책과 함께 그가 즐겼던 것은 그림이다. 마흔 살 무렵 정신과 의사 조언에 따라 그리기 시작해 약 3천 점의 수채화를 남겼다. 지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 의미를 설명했다.

전쟁 반대, 스위스로 가 포도농원 가꿔

와인 일러스트

와인 일러스트

“펜과 붓으로 작품을 창조해내는 것은 내게 포도주와 같아서 그것의 취한 상태가 삶을 그래도 견뎌낼 수 있을 정도로 따스하고 아름답게 만들어줍니다.”

그는 인도를 여행했고, 동양 정신을 예찬했던 세계시민이었다. 합리를 강조하는 서양철학과 달리 동양의 철학에서 합리와 비합리적 힘을 모두 끌어들이는 특성을 발견했다. 변화를 의미하는 역(易)의 원리를 다룬 ‘역경’에도 큰 관심을 기울였다. 동양 탐구, 명정 상태에 대한 열정은 시대의 광기와 무관하지 않다. 1차대전 때 비인간적인 전쟁의 참상을 목격하고 그는 전쟁에 반대하는 평화주의자를 선언했다. 이로 인해 극우 언론의 공격대상이 되고 민족주의 광풍이 불던 조국 독일을 떠나 중립국 스위스로 이주했다. 서양 합리주의의 한계를 온몸으로 느꼈기 때문이다. ‘황야의 이리’는 이런 시대적 배경 속에 탄생했다. 이 작품에서 프랑스 부르고뉴, 이탈리아 키안티, 스페인 말라가 등 다양한 포도주가 언급되지만 그가 예찬한 것은 소박한 시골 포도주였고 고향 칼브와 가까운 알자스산 포도주를 특히 좋아했다.

헤세의 변치 않는 주제는 존재의 위기, 진정한 ‘나’를 만나기 위해 평생 고독과 악수하는 삶을 살았다. 주인공 하리 할러의 입을 빌어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고독은 독립적이 되는 것이고, 나는 오랜 세월 그것을 갈망했으며 이제는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들었다.”

전쟁이 끝난 직후 1946년 헤세에게 노벨문학상이 돌아간다. 평화주의를 외쳤던 영원한 방랑자에게 주는 선물이었다. 수상식 날 와인이 함께 했음은 물론이다.

손관승 인문여행작가 ceonomad@gmail.com
MBC 베를린특파원과 iMBC 대표이사를 지냈으며, 『리더를 위한 하멜 오디세이아』, 『괴테와 함께한 이탈리아 여행』 등 여러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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