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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조기숙의 일리(1·2)있는 선택

'특별 인연' 이재명 안뽑았다, 盧홍보수석이 이런 결정한 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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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조기숙 이화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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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의 새 기획 칼럼 시리즈 '나는 고발한다. J'Accuse...!'가 대선 이후 드러난 다양한 표심 읽기에 도움이 될 '나는 고발한다 번외편-일리(1·2) 있는 선택'을 14일부터 일주일 동안 매일 연재합니다.

1번이든 2번이든 나와 다른 선택을 한 사람을 무지하다고 비판하거나 악마화하는 대신 그 선택의 이유를 들어보며 상대에 대한 이해를 높여보자는 취지입니다.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의 합당 결정에도 불구하고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에 표를 주지 않은 국민의당 지지자 최준원씨의 글에 이어 노무현 청와대에서 홍보수석을 지낸 조기숙 이화여대 교수의 글을 소개합니다. 더 많은 관련 칼럼은 중앙일보 사이트 나는 고발한다 섹션(www.joongang.co.kr/series/11534)에서 볼 수 있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진보 정치가였지만, 경제 분야에선 시장과 실리를 중시하는 자유주의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노무현 전 대통령은 진보 정치가였지만, 경제 분야에선 시장과 실리를 중시하는 자유주의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는 유능하고 실행력 강한 소통의 귀재다. 게다가 나와는 특별한 인연이 있다. 사적 인연에도 불구하고 대선 내내 이 후보에게 표를 줄지 말지 심각하게 고민했다. 이번 대선을 앞두고 여론이 수없이 흔들릴 때마다 내 생각도 널뛰듯 변했다. 결국 나는 이 후보에게 표를 주지 않았다. 민주화 이후 민주당에게만 투표했던 내 관성을 거스르는 것도 어려웠지만,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후보에게 표를 주지 않는 결정은 몸살을 앓을 만큼 힘들었다.

문제 제기 외면한 文 정부, 먼저 연락한 李

노무현 대통령(왼쪽)과 조기숙 당시 홍보수석. [중앙포토]

노무현 대통령(왼쪽)과 조기숙 당시 홍보수석. [중앙포토]

문재인 정부 초기부터 나는 이 정부 사람들에게 부동산 정책 문제를 지속해서 제기했지만 어떤 응답도 받지 못했다. 결국 대통령의 관심을 촉구하는 글을 SNS에 올린 게 언론에 보도됐다. 일체의 인터뷰를 삼가고 2주가 흘렀지만 당·정·청 어느 곳에서도 연락이 없었다. 결국 ·JTBC 뉴스룸에 출연해 구체적인 문제를 제기하자 가장 먼저 연락해온 분이 이재명 당시 경기지사였다. 내 책을 샀는데 부동산 문제가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 없다며 간단히 설명해 달라고 했다. 부동산 관련 새 아이디어에 대해 조언을 구하기도 했는데 이틀 뒤에 이를 정책에 반영할 만큼 실행력이 대단했다. 가끔 텔레그램으로 먼저 안부를 물을 만큼 다정하기도 했다. 전문가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고 한다. 그 후에도 문 정부로부터 아무런 연락을 받은 바 없기에 이 지사를 특별하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이 후보에게 표를 주지 않은 이유는 2012년, 2017년 문재인 후보를 공개 지지하지 않은 이유와도 같다. 당시 대선을 앞두고 SNS 상에서는 유명인들의 후보 지지가 이어졌다. 하지만 정작 문 후보를 비판하는 언론과 싸우던 내가 침묵하자 많은 이들이 공개지지를 요구해왔다. 공개 지지한다는 건 문재인은 물론 문재인 정부 정책까지 옹호함으로써 성공적으로 임기가 마무리되도록 함께 책임을 지는 걸 의미한다. 나는 그럴 자신이 없었다. 정책적 지향이 달라서다.

나는 내가 청와대에서 모셨던 노무현 대통령이 문 대통령이나 이 후보보다 진보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경제정책만큼은 실용적인 시장주의를 택했기에 "좌회전 깜빡이 켜고 우회적 한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노 대통령은 공적 영역의 민영화는 반대했고, 복지는 확대함으로써 정부 역할을 시장에 맡기지 않았다.

진보와 좌파는 다르다 

많은 이들이 진보-보수, 좌-우가 같다고 혼동하는데 둘은 엄연히 다르다. 진보는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나 현상의 변화, 보수는 현상의 유지를 추구한다면, 좌-우는 20세기에 한정된 국가와 시장의 역할에 대한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20세기에 진보 좌파와 보수 우파는 서구 유럽에서 정합성이 맞는 한 쌍의 이념이었다. 그러나 1968년 국가 역할을 강조하는 좌파나 시장 만능을 강조하는 우파를 모두 거부하는 학생 운동이 유럽 전역을 휩쓸면서 탈물질주의라는 제3의 조류가 등장했다.

2002년 고 노무현 전 대통령 당선의 일등공신이었던 노사모는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모인 최초의 정치인 팬클럽이다. [중앙포토]

2002년 고 노무현 전 대통령 당선의 일등공신이었던 노사모는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모인 최초의 정치인 팬클럽이다. [중앙포토]

탈물질주의는 경제를 우선시하는 물질주의 자체를 낡은 사고로 간주하면서 인간의 자율성을 억압하는 모든 권위에 도전했다. 정보화·민주화· 세계화가 가속화되면서 좌우 대립이 아니라 (좌우) 물질주의 대 탈물질주의가 신생민주국가에도 새로운 균열로 등장했다. 우리 사회에서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는 최초의 탈물질주의 집단이며, 노무현은 대표적인 탈물질주의 리더였다. 권위주의 문화에 도전하면서 물질보다 사람의 가치를 중시하는 철학으로 폭발적 지지를 만들었다. 노동의 이익을 대변하는 좌파나 자본의 이익을 대변하는 우파는 유럽에서도 그 적실성을 상실해가면서 영국 토니 블레어 제3의 길이 주목받았다. 노 대통령은 자율과 분권이라는 탈물질주의적 가치를 국정운영의 원칙으로 제시했다.

반면, 당시 대선에 나선 문 후보는 노 대통령이 양극화 해결에 실패했다는 판단 아래 국가 역할을 강조하는 좌파정책을 선거공약으로 내세웠다. 2012년 나는 "그렇게 해서는 이길 수 없다"며 중도 회귀를 조언했지만 문 후보는 거절했다. 내가 대선 3일 전 한 진보 팟캐스트에 출연해 "아무리 표 계산을 해도 문 후보가 이길 방법이 없다"고 했던 이유다. 만일 탄핵이 없었다면 문 후보는 재수에 성공하지 못했을 수 있다. 탄핵 후에도 압도적 표차가 아니라 41% 득표로 대통령에 당선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 역시 경제정책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번 대선 전 정권교체 요구가 높았던 건 반드시 문 정부 실패 탓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임기 말 문 대통령의 지지도는 50%에 육박할 정도로 역대 최고지만, 정책 방향이 잘못되었다는 응답은 높게 나온다. 비록 지지도는 낮았지만 정책 방향은 옳다는 응답이 매우 높았던 노 대통령과 대조적이다.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 타다 금지법, 시장을 무시한 규제 일변도의 부동산 정책 등은 태어나면서부터 민주주의만 경험했던 20~30대에게는 유럽의 68세대처럼 받아들이기 어려운 국가의 억압으로 보일 수 있다.

내가 좌파 정책을 신뢰하지 않는 건 내 계급과는 무관하다. 좌파 정책은 인간의 욕망과 본성을 부정하기에 규제 일변도가 될 수밖에 없고, 결국은 실패한다는 걸 공산주의의 몰락에서 우리는 이미 목도한 바 있다. 문 정부의 부동산 정책이 의도와는 다르게 초래된 현격한 자산 격차는 시장을 무시한 정책의 반작용 결과다.

만일 이 후보가 보다 시장 친화적인 정책을 내세웠다면 단임인 대통령 선거는 회고적 투표보다는 전망적 투표가 더 강하기에 높은 정권교체 여론에도 불구하고 당선되었을 가능성이 높았다고 본다. 여론의 반대에 기본소득을 슬그머니 뒤로 숨겼음에도 불구하고 표 주기를 망설였던 중도층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지난해 11월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와 부인 김혜경씨가 충북 보은군 판동초등학교에서 기본소득을 주제로 학생, 학부모들과 대화하는 모습. [뉴스1]

지난해 11월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와 부인 김혜경씨가 충북 보은군 판동초등학교에서 기본소득을 주제로 학생, 학부모들과 대화하는 모습. [뉴스1]

특히 기본소득은 보편적 복지에 드는 비용을 없애고 현금을 주자는 '작은 정부'주의자에서 시작된 대표적인 우파 정책이다. 이걸 진보정당에서 하겠다는 건 전형적인 좌파 포퓰리즘이다. 이 후보의 주장으로 시행된 전 국민 재난지원금 효과에도 회의적이다. 경기 활성화 정책으로는 효과가 있었겠지만 국가가 해야 했을 재분배 효과는 별로 없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정작 지원을 받아야 할 자영업자는 목숨을 버리는데, 재난지원금은 잘되는 가게에만 소비가 몰리는 빈익빈 부익부의 효과를 가져왔으리라 추측한다. 큰 정부는 거둬들인 세금으로 저소득층에게 적극적인 재분배를 하라고 존재한다. 정부가 모두에게 돈을 뿌려 시장에 재분배 기능을 맡긴다면 정부의 존재 이유를 묻지 않을 수 없다.

경제 상식도 몰랐던 李 캠프 

투표를 망설인 보다 결정적 이유는 “한은이 돈을 마구 찍어서 물가가 100배 상승했다고 하면 돈 100억원 가진 사람은 돈의 실질가치가 1억원으로 줄지만 돈이 없는 사람은 피해가 없다”는 이재명 캠프 요직의 경제학 교수 발언에 있다. 봉급이나 연금생활자는 월 수령액 300만원이 3만원으로 줄어드는데 자산가들의 건물가격은 100배가 뛴다는 상식도 모르는 게 황당하다. 본의가 왜곡된 보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당사자의 SNS에 질문했으나 답을 받지 못했다.

물론 경제정책이 전부는 아니었다. 선거를 얼마 앞두고 터진 법인카드 유용과 합숙소 운영 의혹이 망설이던 마음에 쐐기를 박았다. 공금과 공적조직이 선거운동에 유용되었을지 모른다는 의혹은 민주주의 근간을 흔드는 것이라, 무고하다는 수사결과가 나오기 전에는 양심을 버리고 친분을 택하기 어려웠다. 이 후보가 모든 의혹을 벗고 경제정책을 보다 실용적으로 수정한다면 다음 대선 민주당 경선에 참여해 그에게 표를 줄 의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