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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은주의 아트&디자인

90세 화가 박서보의 우직한 봄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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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이은주 기자 중앙일보 문화선임기자
이은주 문화선임기자

이은주 문화선임기자

지난해 9월 서울 삼청동 국제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연 박서보 화백은 당시 경제전문지 ‘포브스’와의 인터뷰에서 앞으로 해야 할 일 두 가지를 꼽았습니다. 첫째는 장학재단을 만들어 홍대 회화과·예술학과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고, 둘째는 ‘박서보국제미술상’을 만들어 꾸준히 작업해온 작가에게 주고 싶다고 했습니다. “6·25 전쟁 중 대학을 다니고, 결혼해 단칸방을 전전하면서 오랫동안 그림을 팔지 못했다”는 그는 기자에게 “나야말로 고생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6개월이 흘렀는데요, 그는 최근 통화에서 “이 계획을 모두 이뤘다”고 했습니다. 장학금을 주기 위해 장학재단을 만들어 우선 40억원을 넣었고, 또 내년부터 20년간 광주비엔날레를 통해 격년으로 예술상을 주기로 결정하고 후원(미화 100만 달러) 협약식을 마쳤다고요. 그러면서 그는 “이것은 시작이다. 내가 죽은 후에도 이 일들이 재단을 통해 계속되길 바란다”고 했습니다.

박서보, 묘법(描法) No.140410, 2014. 캔버스에 혼합매체, 130x200㎝. [사진 국제갤러리]

박서보, 묘법(描法) No.140410, 2014. 캔버스에 혼합매체, 130x200㎝. [사진 국제갤러리]

만 아흔 살인 그의 하루하루는 놀라울 정도로 분주합니다. 지난주엔 러시아의 침공에 맞서고 있는 우크라이나의 평화를 지지하며 5000만원을 기부하며 “전쟁을 멈춰야 한다. 침략 전쟁은 범죄”라고 비판했습니다.

해외에선 더 바쁩니다. 오는 26일 도쿄화랑에서 그의 개인전이 시작되고, 4월 23일 개막하는 베니스 비엔날레 기간엔 베니스에서 미국의 일본계 조각거장 노구치 이사무(1904~1988) 등과 나란히 작품을 선보입니다. 이 전시는 박 화백의 해외 전속 갤러리 중 하나인 영국 화이트큐브가 앞장서 준비하고 있습니다. 또 4월 말 세계적인 예술서적 출판사 리졸리(Rizzoli)와 협업한 영문 모노그래프 박서보:『묘법(Park Seo-Bo: Ecriture)』가 발간되고, 이어 이탈리아 디자인 브랜드 알레시(ALESSI)에선 박 화백의 ‘묘법’ 시리즈를 입은 와인 오프너 2종이 곧 출시될 예정입니다.

박 화백에게 요즘은 하루하루가 봄날입니다.  하지만 그가 여든 중반이 될 때까지 이런 날이 오리라고 확신한 사람은 박 화백 본인 외에 별로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의 딸 박승숙씨는 아버지의 삶을 정리한 책 『권태를 모르는 위대한 노동자』에서 “어느 날 아침, 자고 일어나니 아버지가 갑자기 잘 팔리는 화가로 둔갑해 있었다”고 썼으니까요.

그는 작품이 잘 팔리지 않을 때조차도 “언젠가 세상이 나를 알아줄 것”이라 믿고, “양도 어마어마하게” 대작을 그리고 또 그렸습니다, “우직하게 한길만” 걷고, 지금은 자기 뜻을 하나씩 이뤄가는 그가 우리 곁에 있습니다. “이제 내가 지구에 살아 있을 시간이 별로 많지 않다. 무덤에 가서 후회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그의 말을 기억하며, 이 혼란스러운 시대에 ‘우직하게 살아가기’의 힘을 다시 생각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