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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찰수 윤석열의 다짐 "왼손엔 칼, 오른손에는 공정을 들리라" [이정재의 대권무림 3부⑤]

중앙일보

입력

이정재의 정치풍자 무협판타지 대권무림

〈3부 제5편〉초출지존(初出之尊):무림 초짜가 지존좌를 차지하다

"이 지긋지긋한 곳도 이제는 끝이군."

명박대제의 얼굴에 흐릿한 희색이 돌았다. 무림옥에 갇힌 지 3년, 어느새 머리는 백발이 성성해졌다.

"당신을 가둔 나찰수 윤석열이 당신의 구세주가 될 줄이야…."

그의 아내 윤옥선자 역시 살짝 웃음을 지으며 맞장구를 쳤다.

"당연한 결과요. 나와 그네공주를 무림옥에 쳐넣은 재인군의 후계자 재명공자 따위가 어찌 무림지존이 될 수 있겠소. 더 크게 못 이긴 게 아쉬울 따름이지."
"그렇지요. 잘 모르는 백성들이 당신을 손가락질하지만 천만의 말씀. 당신은 무림 경제를 누구보다 잘 꾸려냈고 재여무림 불패신화도 지켜냈어요. 재인군과는 비교도 할 수 없지요. 빈말이지만 재인군은 참 안 됐네요. 퇴임 후 잊히고 싶다고 했는데 잊히기는커녕, 늘그막에 고생 좀 하게 생겼으니. 하지만 어쩌겠어요, 세상만사 사필귀정이니."

명박대제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게 무림지존된 자의 숙명인가 보오"
"나찰수 윤석열은 어떨까요?"

"그는 최초의 무림감찰 출신이니, 역대 지존과는 다른 운명을 만들 수도 있겠지요. 자기 손으로 역대 지존을 감옥으로 보낸 자니 검찰의 칼이 얼마나 무서운지 누구보다 잘 알 것 아니겠소…."
"그렇다고 과연 나찰수가 성공한 지존이 될 수 있을까요?"

"쉽지 않겠지만 확률은 반반이라고 생각하오. 그러려면 첫 번째 단추를 잘 꿰어야 하오. 우선 민주련이 크게 요동칠 거요. 구심점이 될 인재를 몽땅 잃었으니 이합집산과 세력갈등이 본격화하겠지. 곧 무림에 대분열이 생길 거요. 이걸 어떻게 잘, 얼마나 빨리 요리하느냐가 첫번째 과제가 될 거요. 무엇보다 반으로 갈린 강호 민심을 어찌 달래느냐가 관건이요. 자칫 정쟁에 시간을 질질 끌거나 전리품처럼 자리를 나눠 갖거나 대화합무림을 만드는 데 실패한다면 끝이요. 부끄럽지만 내 꼴이 날 수도 있소. 지존좌에 등극한 지 석 달 만에 좌파무림의 '미친소광풍'초식에 당해 권력의 대부분을 잃지 않았소."

윤옥선자가 깊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렇게 보면 천하의 나찰수라해도 재인군을 당장 어찌하기는 어렵겠군요. 그의 세력이 여전히 천하의 반을 쥐고 있음을 이번 비무로 확인했으니. 자칫 당신의 출옥도 덩달아 늦어질까 걱정이예요."
"그건 걱정 마시오. 늦어도 5월이면 나는 이곳에서 나가게 될 것이요. 석가탄신일이 오월 초여드레. 마침 재인군의 임기 하루 전이니, 악연의 사슬을 끊기에 이보다 좋은 날이 없소. 게다가 재인군은 자신의 측근 중 측근인 전경남도백 김경수를 꼭 사면해줘야 할 처지. 나의 사면은 오는 권력과 가는 권력의 화합선언으로 안성맞춤이요. 또 나를 풀어줌으로써 '윤핵관'들에게 자신을 잡아넣지 말라는 암시를 주는 효과도 있소."

나찰수 윤석열을 지존좌에 앉힌 주역 '윤핵관'이야말로 나 명박대제의 측근이었던 자들, 이른바 '이핵관'이 아닌가. 자신의 안위라면 무엇보다 끔찍이 챙기는 재인군이 이런 사정을 무시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런 쪽으론 워낙 영악한 재인군이 아닌가.

"흥. 아무리 그래도 재인군은 자신의 숙명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에요. 재인군에 대한 백성의 원성이 이미 하늘에 닿았어요. 무림 정의가 살아있다는 걸 보여주려면 재인군은 당신보다 최소한 두 배는 더 고생해야 마땅해요. 딴 건 몰라도 백성에게 죄지은 무림지존은 반드시 처벌받는다는 신화는 꼭 이어져야 해요."

명박대제의 고개가 크게 끄덕여졌다.

같은 시각 청와궐.
재인군은 벌써 몇 차례나 같은 자리를 맴도는 중이었다. 재명공자가 결국 패했다. 그렇다고 최악은 아니다. 그야말로 박빙의 승부. 나를 지지하는 백성이 얼마나 많은지 보여준 승부였다. 최선은 아니나 차선은 된다. 나를 위해선 최선의 결과일 수도 있다. 아무리 나찰수 윤석열이라 한들 절반의 무림을 무시할 수는 없을 터, 억지로 나를 무림옥에 가둘 수는 없을 것이다.
벌써 만반의 준비는 마쳤다. 명박대제는 그네공주가 지존좌에 오르자마자 청와궐 대신회의를 소집했다지. 그래놓고 "문제없다"고 큰소리쳤지만, 결국 감옥행을 피하지 못했다. 그네공주는 감추느라고 감췄지만 청와궐 책장에서 한 뭉치의 밀지(密旨)가 발견돼 무림옥에 갇혔다.

나는 다를 것이다. 어떤 죄목으로도 나를 엮을 수는 없을 것이다. 내게 불리한 모든 자료는 이미 폐기했다. 내겐 최고의 집사신공을 익힌 청와궐 총무비서가 있다. 그는 이미 바보공자 무현의 모든 밀지를 폐기한 적이 있다. 수첩 하나 글자 한 줄 놓치지 않았다. 내가 그를 5년 내내 집사로 데리고 있는 이유가 뭐겠나.
게다가 민주련의 180석은 내 든든한 바람막이가 돼줄 것이다. 이미 구심점을 잃은 민주련은 당분간 나를 중심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다. 유월의 지방무림비무와 2년 뒤 무림의원 비무. 여기서 이겨야 한다. 민주련과 나 재인군의 운명이 이 두 개의 승부에 달렸다. 절대 질 수 없다. 반드시 권토중래(捲土重來), 흙먼지를 일으키며 다시 중원을 차지하리라.

 #군림천하

나찰수 윤석열은 화분 하나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축 무림지존 등극'
화분은 현 무림지존 재인군이 보낸 것이었다. 나찰수는 재인군에 대한 원망과 미움을 거뒀다. 따지고 보면 오늘 내가 이 자리에 선 것도 다 재인군 때문이 아니던가.

무림은 이제 달라질 것이다. 땅에 떨어졌던 정의와 공정이 빠르게 되살아날 것이다. 검찰공의 일인자인 나 나찰수 윤석열이 드디어 지존좌에 올랐으므로. 나를 선택한 백성들에게 다시는 실망과 배신감을 맛보게 하지 않으리라. 혹자는 내가 지존좌에 오르면 복수와 보복의 칼부림에 날을 지새울 것이라 하나 언감생심, 어림도 없는 소리. 5년 재인군 치하에 종지부를 찍게 한 백성의 눈이 시퍼렇게 지켜보고 있는데 어찌 구원(舊怨)을 푸는 허튼일 따위에 시간을 낭비하랴.

저 화분에라도 대고 맹세하리라.
역대 무림지존이 모두 감옥에 갇히거나 비참한 최후를 맞았으나 나 나찰수 윤석열은 그 전철을 밟지 않으리라. 전임 지존을 감옥에 보내는 일도 내 손에서 끊으리라. 무림사 최초로 백성들이 송덕비를 세워 주는 무림지존이 되리라. 자리 나눠먹기, 패거리 챙기기 따위는 나의 치세에 아예 없을 것이요, 구중궁궐 청와궐에 갇혀 나홀로 지존노릇하는 일도 끝내리라. 재인군도 못한 일, 광화문 지존 시대를 기필코 열리라.

"무림의 대화합을 이루리라. 오직 백성의 마음을 살피고 따르는 무림지존이 되리라"
어제 전무림언론이 모인 자리에서 나찰수 윤석열은 지존좌 등극 일성을 이렇게 열었다.
그런 그에게 누구보다 열렬한 환호를 보낸 것은 철수의사 안철수였다. 나찰수가 철수의사에게 고개를 숙여 감사를 전한 것은 물론이었다.

"고맙소. 철수의사. 이 모든 게 철수의사 덕분이요. 26만 표 차라니. 3푼(80만 표)만 철수의사가 가져갔어도 비무의 향방은 바뀌었을 거요. 철수의사가 결단을 내려주시지 않았다면 지금 웃고 있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재명공자였을 것이요."
"천만의 말씀. 우리는 어차피 공동운명체, 나찰수의 영광이 곧 나의 영광, 나는 내 소신껏 할 일을 했을 뿐이요."
"그나저나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우리가 무림사에 남을 위대한 발자취를 함께 남기는 일은. 말이 나온 김에 철수의사께 한 말씀 드리리다. 귀공의 무림총리 등극은 시간을 갖고 다시 생각해보는 게 어떻겠소? 나는 솔직히 호남무림 출신의 무림총리를 생각하고 있소이다. 괜히 180석 거대 야당무림에 빌미를 줘선 안 되겠기에 하는 말씀이요. 물론 귀공의 양해와 허락이 있어야겠지만…."

나찰수가 말끝을 흐리며 조심스럽게 물었지만 철수의사는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나찰수 윤석열이 다시 입을 열었다.

"결코 화장실 갈 때와 나올 때가 달라서 드리는 말씀이 아니오. 그렇게 하는 게 백성들을 안심시키고 통합과 화해의 무림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될 듯해 하는 말이오. 나는 일구이언하지 않는 사내, 나를 믿고 큰 아량을 베풀어주시기 바라오."
나찰수가 대답을 채근하자 철수의사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그 문제는 좀 더 시간을 두고 생각해 봅시다. "
철수의사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 벌써 이런 식이라니. 나찰수가 비무에서 이기자마자 벌써 측근에게 귀를 잡혔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윤핵관' 중 최고 입안의 혀로 불리는 구중지설(口中之舌) 장제원은 새벽부터 그의 집을 지키고 있다가 넙죽 절하고는 도승지 자리를 따냈다고 한다. 실패한 무림지존으로 가는 첫걸음이 바로 측근에 휘둘린 인사이건만, 쯔쯔쯔 이를 어쩌면 좋을까.
 5년 만의 재인군 천하 교체. 무림사 최초 검찰출신 무림지존의 탄생. 그 앞날이 마냥 탄탄대로로 이어지지는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철수의사의 뇌리를 스친 건 바로 그때였다.

같은 시각 분당골.
재명공자는 한 줄기 빛도 보이지 않는 어둠에 갇힌 느낌이었다. 돌이켜보면 패배는 예정된 것이었는지 모른다. 민주련의 후보가 될 때부터, 재인군과 척을 지고 문파(文波)들의 미움을 살 때부터 그리고 나찰수 윤석열과 철수의사 안철수의 합일이 이뤄진 때부터.
하지만 돌이켜보면 얼마든지 이길 수 있었다. 한양무림에서 부동산감세 초식을 조금만 더 과감하게 휘둘렀어도, 심불리(心不利) 심상정을 무슨 수를 쓰든 주저앉히기만 했어도, 아니 최소한 철수의사의 막판 합일만 막았어도…. 갖은 상념이 미련처럼 머릿속을 맴돌았다.

재명공자는 거세게 머리를 흔들었다. 이제와 그깟 생각들이 무슨 소용이랴. 이미 날은 저물고 물은 엎질러 진 것을. 내 아내를 원망하지 않는다. 무림초짜에게 패했다고 창피해할 이유도 없다. 어차피 칼날 위에서 춤추는 게 무림인의 삶, 져도 재미있다. 재명공자는 이제 선택해야 했다. 재기를 노릴 것인가, 이것으로 무림인생의 종지부를 찍을 것인가.

주인 잃은 민주련은 곧 이합집산의 길을 걸을 것이다. 국힘방은 국힘방대로 이전투구를 벌일 것이다. 그 격동의 현장에 나의 공간이 있을 법도 하다. 그러나 지금 그런 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으랴. 다 부질없는 일이다. 이것으로 됐다. 사력을 다해 싸웠고, 아쉬웠지만 즐거웠다.
그래, 이것으로 됐다. 애써 위안거리를 찾자 비로소 마음이 편해졌다. 그러자 갑자기 젖은 솜처럼 온 몸이 무거워졌다. 재명공자는 곧 죽음처럼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大尾〉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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