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틴 '에너지 제국' 야망 4700㎞ 송유관에 꿈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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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 바이칼 호수 인근도시 이르쿠츠크에서 서북쪽으로 600km 정도 떨어진 타이세트 부근 타이가에서 세계 최장 파이프라인(4700km)인 '동시베리아·태평양 송유관' 건설 공사가 한창이다. [트란스네프티사 제공]

블라디미르 푸틴

18~19일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 참석할 블라디미르 푸틴(사진) 러시아 대통령의 어깨에는 한층 힘이 들어가게 됐다. 이 회의에서 북핵 문제와 함께 에너지 문제를 주요 의제로 다룰 예정이기 때문이다. 현재 시베리아와 극동의 막대한 원유와 가스를 개발해 아시아로 공급하는 거대 프로젝트를 추진 중인 푸틴 대통령에게 APEC 정상회의는 러시아의 힘을 확인하는 선전장이나 다름없다. 이 프로젝트가 완성되면 유럽에 이어 아시아까지 러시아의 에너지 영향권이 확대된다. 이렇게 되면 과거 소련 시절 못지않은 국제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을 전망이다. '에너지 차르' 푸틴의 야망이 꿈틀거리는 동시베리아.극동 에너지 개발 현장을 APEC 회의를 앞두고 본지와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 공동기획으로 둘러봤다.

지난달 동시베리아 바이칼 호수 인근 도시 이르쿠츠크에서 서북쪽으로 약 600km 떨어진 소도시 타이세트. 광활하게 펼쳐진 타이가(냉대 침엽수림) 한가운데로 뚫린 황톳길을 따라 지름 1m, 길이 10m짜리 강관이 줄이어 연결되고 있다. 동시베리아.극동 지역 유전에서 생산될 석유를 모아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 끝 나홋카항 인근 코즈미노 수출터미널로 운송해 갈 길이 4700km의 대송유관을 건설하는 현장이다. 강관을 파묻고 땅을 다지는 불도저 소리가 시베리아의 차가운 냉기 사이로 퍼져간다.

'동시베리아.태평양 송유관'으로 불리는 이 '석유 고속도로'는 중국.일본.한국 등 동북아 국가와 미국으로의 원유 수출을 겨냥한 것이다. 1960~70년대 서시베리아와 우랄지역 유전을 집중 개발해 원유를 유럽으로 수출해온 러시아가 이번엔 아시아.미국으로 시장을 다각화하기 위해 추진하는 국가 전략 프로젝트다. 푸틴은 올 9월 "러시아 전체 석유와 천연가스 수출 중 현재 3%에 불과한 아시아 지역 수출 비중을 10~15년 뒤에는 30%까지 끌어올릴 것"이라고 강조했다. 유럽에 이어 동북아까지 에너지 영향권 아래 두겠다는 야심 찬 계산이다.

동시베리아와 극동의 '검은 황금'을 선점하기 위한 자원 소비국들의 경쟁은 말 그대로 '총성 없는 전쟁'을 방불케 한다. 오일 달러를 바탕으로 지난해 GDP 순위 14위에서 올해 한국(지난해 11위)을 제치고 10위로 올라설 것으로 예상된 러시아는 "외국의 투자가 아쉬운 시대는 지났다"며 배짱을 부리고 있다. 에너지 자원에 대한 국가의 직접통제도 강화하고 있다. 그 때문에 지리적으로 가까운 러시아 자원 도입에 큰 기대를 걸고 있는 한국의 입지는 갈수록 좁아지고 있다.

모스크바.이르쿠츠크.블라디보스토크.나홋카.코즈미노.사할린=유철종 기자

취재 동행 및 자문=KIEP 이재영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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