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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강남규의 글로벌 머니

“경제제재 성공 100년간 4%뿐”…푸틴 굴복시킬 수 있을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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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7면

강남규 기자 중앙일보 국제경제 선임기자
강남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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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아테네의 지도자 페리클레스는 민주주의 상징이다. 그런데 그는 ‘경제제재의 아버지’로도 불린다. 서양 역사상 처음으로 경제제재를 국제정치 도구로 사용해서다. 그는 기원전 432년 그리스 교역의 중심지인 메가라를 경제봉쇄했다. 영국 런던정경대(LSE) 메리 모건 교수(경제사)는 최근 기자와 통화에서 “메가라는 페리클레스 제재 때문에 경제적으로 고통이 컸다”고 말했다. 이후 유럽 역사에서 경제제재는 중요한 국제정치 수단이 됐다. 나폴레옹이 영국을 겨냥해 내린 대륙 봉쇄령이 대표적인 예다.

경제제재의 패키지는 1870년대 이후 교역봉쇄에서 금융·에너지·기술 제재로 확대됐다. 모건 교수는 “세계 경제가 1차 글로벌화하던 시기가 바로 1870년대 이후”라며 “이때부터 상품뿐 아니라 자본·에너지·기술 이동이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글로벌화해 경제제재 수단이 많아졌다”고 말했다.

교역·자본·에너지 봉쇄까지 총망라
러시아 경제 올해 -9% 성장 예측
전비 부담 급증, 금융위기 가능성

경제적 고통 커도 전쟁 포기 드물어
오히려 독재자 수명 연장 역효과도

서방 국가 주도 경제제재와는 별도로 스웨덴 가구회사인 이케아가 러시아와 벨라루스 매장의 영업을 중단한다고 4일 발표했다. 사진은 러시아인들이 영업 중단 전에 이케아 제품을 사기 위해 모스크바 키므키 매장 앞에 줄지어 선 모습. [모스크바 : 타스=연합뉴스]

서방 국가 주도 경제제재와는 별도로 스웨덴 가구회사인 이케아가 러시아와 벨라루스 매장의 영업을 중단한다고 4일 발표했다. 사진은 러시아인들이 영업 중단 전에 이케아 제품을 사기 위해 모스크바 키므키 매장 앞에 줄지어 선 모습. [모스크바 : 타스=연합뉴스]

요즘 미국과 유럽 등이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를 겨냥해 경제제재의 토털 패키지를 적용하기 시작했다. 서방은 러시아의 첨단 산업과 전략 물자를 만드는데 핵심인 기술과 부품의 교역을 금지했다. 러시아 에너지 기업에 대한 투자나 대출 등도 막았다. 러시아 시중은행 가운데 6~7곳을 이달 12일부터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에서 차단한다. SWIFT는 은행이 고객의 요청에 따라 해외에 송금할 때 거치는 필수적인 네트워크다.

여차하면 서방이 러시아 외환보유액까지 동결할 태세다. 러시아 중앙은행은 외환보유액 6300억 달러(약 762조3000억원) 가운데 70% 정도를 해외에 예치하거나 투자해놓고 있다. 지금까지 미국이 주요 20개 나라(G20)를 겨냥해 외환보유액 동결이란 카드를 써본 적이 없다. 그만큼 타격이 커서다. 또 미 정부는 러시아 에너지 수입을 막을 움직임을 보인다.

서방 정부 차원의 제재만 있는 게 아니다. 미국 애플과 비자카드 등 글로벌 기업이 러시아 리스크를 줄이는 차원에서 비즈니스를 중단하고 나섰다. 러시아를 겨냥해 공공·민간의 제재 파트너십까지 갖춰진 셈이다.

반면 러시아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침공에서 고전하고 있다. 미 군사 싱크탱크인 전쟁연구소(ISW)는 “푸틴의 장군들이 우크라이나의 저항 의지와 능력을 간과해 1·2차 공세에도 주요 도시를 점령하지 못하고 있다”며 “이달 5일 이후 군사작전이 소강상태에 들어갔다”고 분석했다. 장기화의 조짐이라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러시아가 겪을수 있는 금융위기는.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러시아가 겪을수 있는 금융위기는.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전쟁은 인간의 행위 가운데 가장 소모적이다. 오죽했으면 ‘병사들은 총알을 쏘는 게 아니라 돈을 쏜다’는 말이 월가에 관용어로 자리 잡을까. 특히 장기전이 경제에 주는 충격과 스트레스는 파괴적이다. 실제 미 투자은행 JP 모건은 러시아 경제가 올해 -7% 성장할 것으로, 골드만 삭스는 -9% 성장할 것으로 예측했다. 1998년 러 경제위기와 비슷한 일이 올해 발생할 수 있다는 얘기다.

성장률은 최종 결과다. 도중에 러 경제 여기저기서 붕괴음이 울릴 수밖에 없다. 뱅크런(인출사태)에서 신용경색, 외환위기, 디폴트 등 다양한 형태의 금융위기가 발생할 수 있다. 월가는 이미 상황판〈표 참조〉을 만들어 대비하고 있다. JP모건은 러시아 정부가 이달 16일 디폴트를 선언할 수 있다고 경고할 지경이다. 디폴트는 국내 투자자와 비즈니스 리더도 촉각을 곤두세워야 할만한 사건이다. “터키 등 신흥국으로 전염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블룸버그 인텔리전스)이다.

한 마디로 전례가 드문 경제제재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전비 지출이 푸틴을 옥죄고 있다. 이 정도면 푸틴이 물러서지 않을까. 그러나 경제제재의 역사엔 놀라운 반전이 있다. 미 싱크탱크인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PIIE)의 제프리 쇼트 수석 연구원 등이 1914년 1차 대전 발발 이후 100년 동안 이뤄진 경제제재를 분석한 적이 있다. 제재에 따른 고통과 목표 달성 정도 등을 1~16점 사이에서 평가했다. 9점 이상이어야 제재는 성공이다. 쇼트는 몇 해 전 기자와 통화에서 “1914년 이후 100년간 이뤄진 제재 가운데 9점 이상인 경우는 4% 남짓이었다”고 설명했다. 특히 2002년 이후의 제재 효과는 1에 지나지 않았다.

제재가 경제적 고통을 주지 못한 것일까. 아니다.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상대 국가가 제재에 굴복해 전쟁을 그만두거나 핵을 포기하거나 하는 경우가 아주 드물었다. 오히려 제재가 “상대 국민의 분노를 야기해 독재자의 정치적 수명이 연장하는 역효과가 나타나기도 했다”고 쇼트는 말했다. 만약 우크라이나 사태가 장기화하고 푸틴이 버티면, 러시아 경제가 위기에 빠지고 터키 등 신흥국이 외환위기를 맞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 팬데믹 등 극단적 사건이 벌어지는 시대에 최악의 사태가 현실이 될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