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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안에서 중부지역으로…꿀벌 ‘집단 실종’ 북상중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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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면

지난 2일 오후 경북 성주군 성주읍 한 양봉농장. 두 줄로 길게 세워진 벌통 사이를 오가던 농장주 박윤백(63)씨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이맘때면 벌통 사이를 걸어 다니기 힘들 정도로 극성스럽게 날아다니던 벌들이 자취를 감춰서다.

박씨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벌통 뚜껑을 하나를 더 열어봤다. 나란히 꽂혀 있는 사양기(飼養器·꿀벌의 먹이 그릇) 사이엔 벌 한 마리 없이 텅 비어 있었다. 원래 사양기는 꿀벌들이 집을 지어놓고 빼곡하게 무리를 이루고 있어야 할 곳이다.

2일 경북 성주군 성주읍 대황1리 한 양봉농장에서 농장주가 빈 벌통 사이를 걷고 있다. 김정석 기자

2일 경북 성주군 성주읍 대황1리 한 양봉농장에서 농장주가 빈 벌통 사이를 걷고 있다. 김정석 기자

박씨는 “이 자리에서만 20년 가까이 벌을 키워왔는데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며 “벌통 400군(개) 중 350군 정도가 모두 사라지고 없는 상태”라고 말했다.

양봉업계에 따르면 한겨울에는 꿀벌들이 벌통 안에서 겨울을 나는데, 1월 중순쯤 날이 풀리면 벌통을 열어 벌을 깨우는 일을 한다. 박씨는 올해도 여느 때처럼 벌통을 열었다가 대부분의 벌통에서 벌이 사라진 것을 발견했다.

인근인 선남면에서 양봉농장을 운영하는 이덕희씨의 벌통 320군 중 130군 정도에서 ‘꿀벌 집단 실종’ 사태가 벌어졌다. 그는 “처음엔 벌을 몽땅 훔쳐간 줄 알았다”고 황당해했다.

최근 경남·전남·제주 등 남부지역을 중심으로 양봉농장의 벌들이 사라지는 일이 잦아지면서 양봉업계가 뒤숭숭하다. 꿀벌들이 집단으로 사라졌는데, 이렇다 할 이유도 찾지 못하고 있어서다.

가장 먼저 꿀벌 집단 실종 사태가 확인된 것은 경남과 전남 등 최남단 지역에서다. 경남도에 따르면 지난 1월 말부터 2월 초까지 약 2주간 18개 시·군 양봉 농가로부터 피해 신고를 받은 결과 321개 농가의 벌통 3만8433개에서 피해가 발생했다. 한국양봉협회 전남지회가 1월 27일 자체 조사한 결과 전남에서도 826농가, 7만1655개의 벌통에서 피해가 발생했다.

한국양봉협회는 농촌진흥청과 농림축산검역본부 등 관련 기관에 원인 조사가 필요하다고 요청했고 경북도 역시 조사에 나섰다. 지난달 9일부터 21일까지 1차로 피해를 조사한 결과 경북 지역 역시 ‘꿀벌 집단 실종’이 확인됐다. 경북 양봉농가 6129호의 15.2%인 930호에서 피해가 난 것으로 파악됐다. 국내 양봉 농가는 2020년 12월 현재 2만7000여 곳에 달한다.

벌통 기준으로 따지면 경북 전체 58만 군의 12.9%인 7만4582군에서 꿀벌 50% 이상이 사라졌다. 벌통 기준으로는 성주(1만613군), 영천(8021군), 의성(6342군), 영덕(6219군)에서 피해가 컸다. 평균적으로 벌통 1개에는 약 2만 마리의 꿀벌이 산다.

현재까지 꿀벌이 사라진 원인은 뚜렷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이상기후나 병해충 또는 바이러스 피해, 봉군(蜂群·벌 무리) 관리 기술 부족, 약제과다 사용 등 다양한 원인을 두고 분석이 이뤄지고 있다. “따뜻해진 기후 탓” “꿀벌응애(기생충) 탓”이라는 말도 나온다.

꿀벌 개체 수 감소는 직접 벌꿀 채취량 감소로 이어져 벌꿀 유통업계에 타격을 준다. 더 큰 문제는 꿀벌이 줄어들면 주변 농작물과 식물 생장에 큰 악영향을 줄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꿀벌은 식물의 꽃가루받이(수분·受粉)를 해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참외 주산지인 경북 성주는 꿀벌이 급격하게 줄어들자 당장 올해 참외 농사 피해를 걱정하고 있다.

한국양봉협회 성주군지부 전용운 지부장은 “참외 주산지인 성주에는 약 5만 동 정도의 참외 하우스가 있는데 이 중 4만 동가량이 벌을 이용한 수분을 하고 있다”며 “사람이 수분하기엔 한계가 있어 꿀벌이 농사에 필수적인데 벌이 사라지니 농가에도 비상이 걸린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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